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환경] 생태적 화해와 회심을 사는 생태 사도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20 ㅣ No.1864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생태적 화해와 회심을 사는 생태 사도들

 

 

우리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태’-‘ecology’는 ‘집’을 뜻한다고 하였는데요, 어머니가 태아에게 집이자 영양과 숨-생명을 주는 존재인 것처럼 ‘생태’-우리의 ‘집’의 중심인 ‘지구’는 우리 모두에게 ‘집’이자 ‘밥’과 ‘숨’을 제공해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생태의 ‘원생태’로서, 우리의 모든 ‘집들의 집’이자 모든 밥들의 밥이며 모든 숨들의 숨이십니다. 태아에게 어머니가 집인 것처럼 우리에게 지구가 하나의 공동의 집이고, 하느님이 우리 한 존재 한 존재에게 공동의 바닥이 되어 주십니다.

 

저는 지금 원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요, 지역 교회에 계시는 여러분과 원주 태장동에 있는 제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여러분과 제가 눈으로 볼 수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바닥으로는, 하나의 땅으로는 서로 이어져 있고, 한 하늘 아래 살면서 하나의 태양에서 오는 빛을 받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지구라는 하나의 바닥과 태양빛을 통해서 하나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하나의 땅과 하나의 태양에서 오는 빛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세계 전체는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에 대한 무한한 자애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하신 “흙과 물과 산, 이 모든 것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찬미받으소서」, 84항)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하나의 땅, 하나의 지구, 하나의 태양빛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을 이루게 하시고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이 자연 만물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이 작용하게 하시는 것인데요, 교황님은 하느님이 이루시는 이 생명의 섭리를 기억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지구의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공기를 마시며 지구의 물로 생명과 생기를 얻습니다.”(「찬미받으소서」, 2항)

 

그런데 우리는 매년 재의 수요일에 거룩한 전례를 통해서 일깨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흙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는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자연과 지구 생명 공동체에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로마서 8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지구와 지구에 사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게 만듭니다.(「찬미받으소서」, 2항) 교황님은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서 “억압받고 황폐화된 땅도 가장 버림받고 혹사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서 죄를 짓는 것임을 일깨우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하느님 피조물의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본래 모습에 손상을 입히고, 자연 삼림과 습지를 파괴하며, 지구의 물, 흙, 공기,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은 모두 …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입니다.(「찬미받으소서」, 8항)

 

이런 틀 위에서 다시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창조하신 사람을 ‘아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은 사람이 ‘흙’으로 -이때 ‘흙’은 자연 만물을 대변하는 것인데요­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의 외형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흙과 물로 구성되어 있고, 물이 빠져나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참으로 사람은 다른 생명체들과 지구 행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존재 사물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인간에게 하느님의 숨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다른 생명체들도 하느님께 생명의 숨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느님께 받은 이 숨은 다른 생명체들이 받은 숨과 상통하면서도 다른 면을 갖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받은 숨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과 관계를 맺으며 하느님의 생명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유를 갖게 해 주는 인간의 특이한 능력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받는 이 특이한 차원을 하느님의 ‘영(Spirit)’과 연관지어 이해해 왔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숨’-‘바람’(spirit)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부여해 주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에게 온 창조물을 돌볼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사람은 지구와 우주의 ‘뇌’와 같은 존재로 창조되어 이 사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증거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다스림에 참여하며 그분의 부름에 찬양과 감사로 응답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선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흙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빛과 하느님의 바람 없이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이 모든 자연물이 하느님의 생명 살림에서 얼마나 소중한 역할을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뇌는 사람에게 중요하지만 영양과 산소 없이 작용할 수 없는 것처럼, 지구의 뇌 역할을 하는 인간도 지구가 흙을 통해서 제공하는 밥과 물과 바람과 빛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숨으로서 흙과 물, 빛과 바람을 어떻게 존중하고 지켜 갈지 돌아보면서 저는 꿈을 꿉니다. 신앙 공동체 구성원이 흙처럼 바닥이 되고 물처럼 싸안고 돌아흐르면서 낮은 자리를 찾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동반하는 아름다운 꿈을요. 그분의 빛처럼 서로 따뜻하게 하며 밝고 맑게 웃을 수 있게 하는 우리를 그려봅니다. 하느님의 바람처럼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 하는 ‘서로 살림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이렇게 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생태적 회심(「찬미받으소서」 5항, 217항, 219-220항)과 생태적 화해(「찬미받으소서」66항, 100항, 218항 등)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실천해 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빛 안에서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하느님의 흙과 물로 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지수광풍(地水光風)에 감사하고 그 지수광풍을 받아서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생명과 존재들과 우주적 친교(universal communion)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생태적 회심입니다. 이 생태적 회심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2019년 3월 10일자 가톨릭신문에 ‘이산화탄소 단식운동’(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yiew. php?aid=304430)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여러분이 이미 집에서, 본당에서, 일상에서 실천해 온 것들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찬미받으소서」 211항에서 제시하신 방법들과 연결해 놓았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관대하고 품위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 …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의 운명에 따뜻한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그 모든 행동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말씀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지구의 고난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볼 줄 아는 열린 눈으로 지구의 ‘뇌’로서 우리의 ‘존엄’에 맞게 지구 살림을 위해 실천한 것들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드러내는 기쁜 ‘생태 사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인사드립니다. “샬롬, 주님의 빛 안에서요.”

 

뇌의 작용에 대해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뇌의 세계를 다 알기가 불가능합니다. 한 신경과 전문의가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톰슨 씨에게 혼이 있습니까? 아니면 병 때문에 혼이 빠져 나갔을까요?”1) 이 의사는 자신의 물음에 간호사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하며 곤혹스러워했다고 기억합니다. 톰슨 씨는 “시끄럽고 화려한 언행과 끊임없는 농담으로 현실세계를 대신하고자 했”던 정신 착란 속에서 “쉬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를 떠들어댔던 환자였습니다.(199쪽)

 

그는 감정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지만 자신이 “감정을 잃어 버렸다는 감각이 없”었습니다.(196쪽) 한번은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지어낸 갖가지 사람에 관해 빠른 말투로 지껄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럽쇼, 내 동생 봅이 창밖으로 지나가네.” 이렇게 말했을 때 늘 하던 대로 독백 투였고 흥분하기는 했지만 무관심하고 별다른 동요가 없는 말투였습니다. 그런데 1분 후에 한 남자가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서 “저는 월리엄의 동생 봅입니다. 형이 제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광경을 본 것 같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무척 놀라며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실재하는 동생을 보고도 마치 실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와 똑같은 말투로 말하다니!”(197쪽) 이런 형을 보면서 서글퍼진 동생 봅은 낭패감에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봅이에요. 동생 봅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톰슨 씨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고, 이런 중에 자신의 형에 대해서 기억이 났는지 직접화법의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면서 그에 대해서 계속 말해 댔습니다. 봅은 어안이 벙벙해서 “하지만 큰형님 조지는 19년 전에 죽었어요.”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톰슨 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맞아, 형님은 언제나 입을 열면 농담만 하지.”(198쪽) 톰슨 씨는 계속해서 형 조지에 대해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흥분한 채 제멋대로. 진실이나 실제, 타당성,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하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살아 있는 동생의 절망스러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198쪽)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신경과 의사 색스가 간호사들에게 위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톰슨 씨에게 혼이 있습니까? 아니면 병 때문에 혼이 빠져나갔을까요?”

 

올리버 색스는 신경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를 만나면서도 이런 환자는 처음 만난 것이지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뇌 작용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가를 말해 줍니다. 의사는 톰슨 씨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 어떤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자아, 영혼 그 자체인데도” 그 자신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톰슨 씨에게 인격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치료법을 ‘그의 맥락을 다시 연결하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백합니다. “그의 맥락을 다시 연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그는 참담한 심경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심하게 이야기를 지어냈다.”(201쪽)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실패하고 물러났을 때 다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단념하고 그의 곁을 떠나면 그는 이따금씩 병원을 둘러싸고 있는 조용하고 평온한 정원을 거닐었다. 그는 병원에 딸린 정원의 정적 속에서 자신의 평온을 되찾곤 했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는 흥분해서 되는대로 지껄였고, 정체성을 되찾으려고 쉬지 않고 지껄이거나 비현실의 혼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람이 없고 혼자가 되면 자연 속에서 정체성의 혼미 상태에서 벗어나고 흥분 상태에서 해방되어 유유자적한 평정을 되찾았다.” 식물, 조용한 정원,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욕구나 인간적인 욕구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말이 필요 없는 일체감을 누리면서, 이 일체감을 통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가식이 아닌 진정한 존재성을 회복하더라는 것입니다.(201쪽)

 

올리버 색스는 신경과 환자들이 자연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병원 관계자들은 환자들에게 화단, 채소밭, 정원 가꾸는 일을 장려했습니다.(274쪽) 그는 한 환자에게서 이런 증언을 듣기도 합니다. “정원을 손질하고 있을 때 마음이 제일 포근해요. 식물에는 에고가 없으니 다툼이 일어날 리도 없잖아요. 그러니 감정을 해치는 일도 없어요.”(278쪽) 그는 이런 효과를 ‘건강한 취미’와 ‘노동’과 연결해 이해하고 있는데요, 톰슨 씨가 극적으로 보여주는 자연-정원-지구 안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일체감은 이런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체험에 의하면, 이런 존재의 안정은 우리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선물받은 가장 원초적인 존재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보입니다. 우리는 뱃속에서 어머니를 통해서 받고 또 받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태아에게 모든 것입니다. 어머니는 집이며 밥이고 물이며 빛이자 바람-숨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매개해 주는 사회 전체이고, 자연 만물과 지구 만물이며 우주 만물입니다. 태아는 어머니를 통해서 깨어 있을 때도 받고 움직일 때도 받고 쉴 때도 받고 잘 때도 받습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동안 어머니를 통해서 자연과 지구와 사람들에게 받고 또 받습니다. 때로는 아프게 하는 것도 받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태아를 아프게 하는 것들보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더 받아서 한 생명으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는 자신이 받을 때마다, 자신에게 생명이 자라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을 받을 때마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됩니다. 이때 어머니와 태아는 많은 경우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살아서 태어난 후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어머니와 자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뇌 속에, 그리고 자신의 온몸 모든 뼈, 모든 근육, 모든 장기, 모든 세포에 각인된 상태에서 어머니와 분리되게 됩니다. 모든 아기는 어머니를 통해서 자연 만물을,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흙과 물과 빛과 바람, 그 아름답고 충만한 지수광풍을 선물받아서 생명으로 자라니까요. 톰슨 씨가 자연 정원 안에서 꾸며 낸 이야기들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상태를 내려놓고, 한 인격체로서 존재의 안정감과 일체감을 회복하여 평온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 만났던 그 원자연 체험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떤지요? 이 시대 우리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는지요? 그래야 무언가 의미 있는 존재인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톰슨 씨는 자연과 정원을 만나서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가 지금처럼 사는 방식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포크레인과 불도저를 동원해서 밤낮없이 일하면서 쉴 줄 모르고 잠도 줄여 가며 정원도 자연도 모두 개발해 가는 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개발주의에 묻혀 사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어머니 자연과 지구를 온갖 쓰레기들로 황폐하게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람 형제들과 자연 형제들에게 다정하게가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는 사실을 공허하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공허해지게 될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는 톰슨 씨에게 필요한 것이 “그의 맥락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통해서 살고 우주는 우리를 통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뇌이고 우주는 우리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뇌인 우리가 우리의 몸인 우주와 지구와 이웃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건강한 살림 관계를 이어 사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 우리 신앙공동체가 그분께 받은 ‘시대적 부름’이리라 믿으면서 깊어가는 이 사순 시기에 주님의 부활 안에서 생태적 화해와 회심을 사는 공동체의 부활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조석현 역,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2016, 198쪽

 

[월간빛, 2022년 4월호,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1,04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