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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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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25 ㅣ No.668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 (상)


병자와 가난한 이들 위한 공동체

 

 

케틀러 주교와 마리 드 라 로쉬 수녀. 천주 섭리 수녀회 제공.

 

 

1891년 5월 15일 발표된 레오 13세 교황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는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해결 방책과 이론을 분석·비판하고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 원리를 제시한 가톨릭 사회교리 분야 대헌장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마인츠교구장 빌헬름 엠마누엘 폰 케틀러 주교(1811~1877)는 회칙이 발표되기 40여 년 전부터 이미 당시 심각하게 제기되던 사회 문제들, 특히 노동자 문제에 대해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밝혔다. 또 그 구체적 해결을 위한 방안 모색에도 나섰다. 이러한 활동들은 회칙을 세상에 나오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1844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하고 병든 지역 주민들을 돌보며 사회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1850년 마인츠교구장 주교로 서품되고 나서 이를 실천하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케틀러 주교는 당시 사회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적대시하는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파악했다. 교회를 위협하던 무신론에 대항해 교회와 인간의 참된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교육과 복지 및 도덕 문제를 고심했다.

 

1869년 독일주교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회정의 실천’이 가톨릭 공직자의 의무임을 강조했으며, 주교직을 수행하는 27년 동안 「노동 문제와 그리스도교」(1864)를 포함한 92개 사목 서한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기고문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사회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사태」는 케틀러 주교가 제안했던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의 휴일 보장 등을 참고했다.

 

그는 폐쇄된 신학교를 다시 열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남녀 수도회 창설을 과제로 삼았다. 교구를 사목 방문하면서 여러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은 교육과 간호 사업에 종사하는 수녀회를 두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및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 판단한 케틀러 주교는 여러 수녀회에 이 문제를 의뢰해 협조를 구했지만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수녀회 초대 원장이 된 마리 드 라 로쉬를 만나게 된다. 프랑스 개신교인이었던 마리 드 라 로쉬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수녀회 입회도 거절당한 상태였다. 케틀러 주교는 그의 내적 성숙함과 타인에 대한 관심, 하느님 뜻을 완수하려는 각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심중에 있던 새로운 공동체 설립에 함께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그녀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 1851년 4명의 여성이 수도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휜튼본당 주임 안톤 아우취 신부에게 밝혔다. 이를 전해 들은 케틀러 주교는 심사숙고한 끝에 수녀회 창설을 결정했다. 그해 9월 29일 네 명의 여성이 입회했고, 새 수도회 명칭은 ‘교육과 간호를 위한 천주 섭리 수녀회’로 정해졌다. 수도회 이름은 두 차례 개정을 거쳐 천주 섭리 수녀회가 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4월 25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 (중)


하느님 섭리 세상에 드러내며 헌신

 

 

- 1934년 가톨릭노동자 협회가 기증한 케틀러 주교 묘지의 기념 등불. 천주 섭리 수녀회 제공.

 

 

“본 수녀회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회헌 1852)

 

이 내용은 수녀회 첫 회헌에 명시된 후, 현재까지 강조되고 이어져 내려오는 정신이다. 영성도 이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케틀러 주교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를 통해, 당시 교회와 사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한’(필리 2,8)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에 충성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했다. 마리 드 라 로쉬 수녀는 케틀러 주교와 뜻을 같이하면서 활동과 결합한 관상의 정신을 모범적으로 살아냈다.

 

케틀러 주교가 수녀회 영성에 기초를 놓고 회원들이 살아야 할 길을 제시했다면 마리 드 라 로쉬 수녀는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된 신념은 하느님 섭리대로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하느님 뜻 안에서 일어난다’는 믿음은 결코 무기력한 운명론이나 체념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올바른 일을 소신껏 추진하게 하고,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투신하는 용기를 준다.

 

케틀러 주교는 어려움의 폭풍우 속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을 지켜 주었다는 확신과 하느님은 큰일을 하기 위해 종종 보잘것없는 이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늘 하느님 계명에 복종해야 하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우리 자신을 내드려야 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모든 것의 마지막 목적”이라며 주님 뜻에 온전히 따르고자 했다.

 

1877년 7월 13일 66세 나이로 선종한 케틀러 주교는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께서 삶과 수난을 통해 말씀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신비를 깊이 새기십시오.” 인간은 난관을 극복하고 정의를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임을 강조한 그는 새로운 시각을 지닌 사회개혁의 선구자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봉사한 그의 생애와 정신은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회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설립자들의 정신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한다. 또 이를 기초로 변화하는 시대 요청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살아가려 노력한다.

 

“저희가 받은 은사와 지구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로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시대의 악과 불의에 용감히 직면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기쁨과 고통에 온 마음으로 동참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고자 애쓰는 선의의 이웃들과 희망차게 협력함으로써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

 

회원들이 매일 바치는 섭리기도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과 응답을 어떻게 이뤄내고자 하는지 잘 보여준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5월 2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천주 섭리 수녀회 (하)


창설 때부터 교육 · 의료사도직에 주력

 

 

- 2016년 5월 1일 수녀회 본원에서 한국진출 50주년을 기념해 회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천주 섭리 수녀회 제공.

 

 

독일 마인츠교구 설립 수녀회로 자리를 잡아가던 천주 섭리 수녀회는 회원들이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모색하게 된다. 당시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전개한 반(反)가톨릭교회 운동 ‘문화투쟁’의 여파 때문이었다. 문화투쟁으로 가톨릭교회의 종교 교육과 선교 활동은 국가로부터 큰 통제를 받아야 했고 수도회들은 새 회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대적 혼란은 회원들이 봉사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나서는 배경이 됐다.

 

그런 흐름 속에서 1876년 미국으로 수녀회 카리스마와 사명을 확장한 천주 섭리 수녀회는 이후 1884년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인준받았다. 나중에는 독일과 미국에도 각각 세 개 관구가 설립됐다.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66년이다. 수녀회는 모든 수도회가 해외선교에 투신하기를 바랐던 비오 12세 교황 요청에 따라 1961년 페루 아방카이에 진출을 시도했고 이어서 한국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영향을 미쳤다. 1959년 총회에서 해외선교 동의안을 결의했던 수녀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가톨릭교회의 해외 선교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의 활동도 긍정적으로 모색했다.

 

특히 초대 대전교구장 라리보 주교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 수도회들이 한국인 성소자를 양성해 성공적으로 선교지에 파견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이에 라리보 주교는 천주 섭리 수녀회 총원에 의료 선교를 위한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수녀회는 1963년 한국을 방문해 상황을 살폈고 이듬해 대전교구 고(故) 오기선 신부 주선으로 한국인 지원자 13명이 로마 총본부에서 기초 양성 교육을 받았다. 1966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대전교구 진출을 승인받고 서울에서 공동체를 시작한 수녀회는 대전교구에서의 의료사도직 시도가 여의찮게 되자 인천에 수녀원과 수련소를 설립했다.

 

이후 수녀회는 1971년 인천시립병원에 간호 수녀를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1978년 은인들 도움을 받아 후원회인 ‘섭리가족회’를 구성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에 협력했다.

 

수녀회 창설 때부터 교육사도직과 의료사도직에 주력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수녀회 활동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기관을 설립해 운영하기보다는 수녀들을 필요로 하는 곳,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도직 선택에 집중했다.

 

1995년 성요셉 관구로 승격된 후에는 사회복지 관련 사도직에 주력하면서 사회적 사안에 관심을 넓히고 외국인 근로자 상담 사도직 등도 시작했다. 현재 관구는 교육, 본당 및 해외선교, 사회복지, 의료사도직 분야에서 소임을 맡고 있으며 JPIC(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활동 등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다. 아울러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사회정의 실현 및 지구 살리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5월 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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