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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근대 한국천주교회에서 시행된 여성 성인 · 순교자 공경의 영향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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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23 ㅣ No.1513

근대 한국천주교회에서 시행된 여성 성인 · 순교자 공경의 영향과 그 의의

 

 

국문 초록

 

이 연구에서는 근대 한국천주교회에서 시행한 여성 성인·순교자 현양이 여성신자의 인식과 활동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검토하였다.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여성이 공경의 대상으로 세워진 사실에 힘입어 여성신자와 교회 안팎에 일어난 변화와 그 의의이다.

 

근대 한국천주교회는 여러 강좌와 교육, 출판 활동을 통해 한국과 세계 교회사에 보이는 치명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며 순교신심을 촉구하였다. 이 과정에 한국과 세계 교회사에 남은 여성 성인과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 자주 다루었으며, 그들을 본받아 신심 함양에 힘쓸 것을 독려하였다.

 

교회는 천주교의 교리와 역사를 배우는 일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듯이, 공경해야 할 순교자도 성별이나 빈부귀천을 논하지 말 것을 힘주어 말했다. 치명한 순교자에는 귀족 부인도 있지만 남의 집 종살이하는 천한 여인, 나이가 어린 여인 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히 공경하는 대상에 여성이 세워졌다. 이 점은 한국천주교회가 일으킨 획기적인 변화였다.

 

역사에 존재한 성녀의 삶과 신앙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여성신자들은 세계와 한국에 신앙의 모범이 된 이러한 여성의 삶과 신앙을 상세히 접하며 천주교 여성으로 살아갔다. 이는 여성신자들이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이 지니고 살아가도록 독려해 주는 힘이 되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여성신자를 널리 알리며 이를 본받을 것을 촉구하였다. 교회 언론이 보도한 여성신자는 ‘여성신자’로 국한됨이 아닌 모두를 향한 ‘모범 신자’로서의 활동이었다.

 

천주교 여성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주체적으로 신앙을 지켜나간 사람들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와 지역사회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친 여성이었다. 신분, 지위, 재산, 성별의 다름을 배제하는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천주교 여성은 근대사회에서 성장해 나갔다. 이 점에서 천주교 여성사는 한국사회의 근대로의 전환을 가장 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 머리말


1) 연구의 목적과 선행 연구에 대한 정리

 

이 연구의 목적은 근대 한국천주교회1)에서 시행한 여성 성인 · 순교자 현양이 여성신자의 인식과 활동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검토하는 데 있다.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여성이 공경의 대상으로 세워진 사실에 힘입어 여성신자와 교회 안팎에 일어난 변화이다.

 

조선천주교회 순교자에 대한 현양과 시복 작업은 개항 이후 교회가 큰 관심을 갖고 추진한 일이었다. 교회는 순교자 묘소 방문과 순교지 확보, 순교자 유해 발굴을 진행하며 순교자에 관한 연구와 출판 활동을 펴나갔다. 특히 교회 잡지를 통해 박해시대 교회사가 일반 신자에게 널리 전달되면서 순교자에 대한 관심과 순교자 신심은 신자들에게 크게 확산되어 갔다.2) 이러한 흐름 가운데 이 글은 각별히 여성에 주목하여 여성 성인 · 순교자 현양이 여성신자와 교회, 그리고 사회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려 한다.

 

이 글을 작성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되는 선행 연구는 괄목할 만하게 이루어져 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천주교 여성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김옥희의 『한국 천주교 여성사』 Ⅰ·Ⅱ가 간행되었다.3) 여성사적 시각으로 교회사를 연구하는 노력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2002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와 여성’에서는 한국천주교 여성사에 주요한 디딤돌을 놓은 여러 연구가 발표되었다.4)

 

이 심포지엄에서 신영숙은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여성관과 여성 교육에 대해 검토한 「일제시기 천주교회의 여성 인식과 여성 교육」을 발표하였다. 신영숙은 당시 교회의 남성 지도자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매사에 여성이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이 우선임을 가르쳤다고 지적하였다. 이로써 성 역할 분담은 더욱 고정되었고, 여성신자들은 교회와 사회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에 잘 길들어져 갔다고 하였다.5) 결국 근대에 들어섰지만 교회와 사회에서 천주교 여성이 처한 객관적 조건이 매우 열악했다고 분석하였다.6)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으로 모인 여러 학자들이 다년간의 노력으로 출간한 연구서인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도 천주교여성 연구사의 한 획을 그었다.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여성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일부터 시작하여 박해기 여성의 신앙과 활동, 선교 자유 이후 여성 수도자와 신자의 활동, 일제 강점기 교육 · 문화 · 사회복지 등에 여성이 펼친 활동을 주의 깊게 분석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진 여성신자의 활동도 다루었다.7)

 

위의 연구서에서 특히 손숙경과 신영숙의 글이 참고된다. 손숙경은 1882년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1911년까지 여성의 신앙과 활동을 분석하였다. 교회 성장과 교안(敎案) 발생이라는 명암이 엇갈리는 시기에 여성은 적극적으로 신앙 활동을 이어가며 교회의 사회사업과 본당 설립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교회의 학교 사업을 통해 여성이 문밖을 나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를 지적하며 천주교회의 여학교 설립의 의의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섰어도 교회에의 헌신을 강조하고 전통사회가 요구하던 여성의 역할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밝혔다. 비록 교회의 학교 사업이 활발하였어도 교육을 통해 여성에게 근대적이고 주체적인 자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지적이다.8)

 

신영숙은 일련의 연구에서 1911년 이후 1945년에 이르는 기간의 천주교 여성사를 검토하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련 속에서 여성이 신앙을 실천하고 근대 여성교육의 수혜를 받으며 가톨릭 문화에 일각을 담당했음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신영숙은, “이 시기 교회 여성의 신앙생활과 사회적 역할은 당시의 식민지 체제와 가부장적 교회 체계 안에서의 많은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주어진 조건 속에 순명하는 자세로 헌신하는 데 있었다.”고 하였다.9)

 

치밀하고 상세한 관련 연구를 통해 천주교 여성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는 근대 교회의 여성 성인 · 순교자 현양과 천주교 여성의 문제를 연관 지어 주목하지는 않았다. 여성 성인과 순교자에 대한 공경에 힘입어 일어난 여성의 자각, 그에 따른 여성신자의 활동과 교회 안팎에 일어난 변화를 분석한다면 천주교 여성사에 대해 새로운 전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 여성신자 활동의 원동력으로 지적된 것은 성모 신심이었다. 성모 신심은 박해기 이래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고, 신앙의 자유 이후로는 ‘성모성심회’를 비롯한 여러 성모 신심 단체가 활동하였다. 이에 김정숙은 천주교 여성사를 개괄하는 자리에서 성모 신심은 “많은 여성신자들이 신앙생활하는 데에 큰 의지처가 되었다.”고 정리하였다.10)

 

여기에 더해 한국과 세계 교회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 성인과 순교자에 대한 현양은 여성신자에게 또 다른 신앙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여성 성인과 순교자를 흠숭하며 따르고자 하는 신심은 천주교 여성의 삶과 신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근대 이후 천주교 여성사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잡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

 

그 밖의 일반 천주교회사에서도 여성신자의 활동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조망되었다. 박해기 여성의 활동은 물론 신앙의 자유 이후 진출해 온 외국 여자 수도회의 활동, 그와 더불어 탄생한 한국인 수녀회의 설립과 활동에 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근대 이후 활발해진 교회의 교육 · 사회 · 문화 등에 관한 연구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 교회의 사회복지와 의료 등의 사업에 여성 수도자나 신자의 활동을 다룬 연구도 진행되었다.11) 여성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니었어도 기존의 연구 성과가 이룬 한국천주교회사의 전체적인 흐름과 방법론, 관점 등은 이 글의 작성에 큰 참고가 되었다.

 

2) 다루고자 하는 내용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교회’라는 정체성을 세워 나갔다. 교회는 강연과 교회 잡지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며 성인과 순교자에 관한 연구와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12) 이 과정에서 한국과 세계 교회사에 남은 여성 성인과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 자주 다루었으며, 이들을 본받으려는 노력을 촉구하였다. 이 점에 주목하여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서 여성 성인과 순교자 현양이 여성신자와 교회 안팎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13)

 

첫째, 근대 한국천주교회에서 시행한 여성 성인·순교자 현양이 여성에게 미친 영향과 의의이다. 역사적으로 유교 사회에서 이상적 여성상은 이상적 인간(남성)인 군자를 조력한 어머니나 부인이었다. 또는 남성 중심의 사회와 짝한 이념을 지킨 열녀, 열부, 효녀 등이었다. 천주교회의 여성상은 이와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이 선택한 신앙을 지켜낸 여성이 공식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세워졌다. 심지어 과부, 결혼하지 않은 동정녀도 신앙 안에서 존경할 행적을 보인 인물로 세워졌다. 이러한 ‘천주교 여성’이 모두가 본받고 따라야 할 존재로서의 공적인 위상을 갖게 된 일은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변화이며 성숙의 지표이다.14) 신앙의 자유 이후 여성 성인과 여성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적극 시행된 내용과 의의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15)

 

둘째, 여성신자의 인식 변화와 모범 신자로 세워진 여성신자의 활동을 분석하는 일이다. 교회는 언론·출판 사업을 통해 여성신자를 모범 교우로 자주 보도하여 신자들에게 널리 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성인 · 순교자 현양과 마찬가지로 ‘모범 교우’에도 여성을 주목하여 성별의 구분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교회가 보도한 여성신자의 활동에 담긴 특징과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여성의 교회를 통한 활동을 공적 영역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검토하는 일이다. 근대 이후 여성은 사적 영역과 분리된 공적 영역에서 학교에 다니고, 일터에 출근하며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렇게 열린 여성의 공적 영역에 교회에서의 활동이 갖는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여성의 신앙생활은 교회와 긴밀한 관련을 갖으며, 교회에 영향을 주는 주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여성신자의 활동을 공적 영역에서 분석하는 일은 교회를 통한 근대사회로의 변화를 밝혀주는 유용한 통로라는 생각이다.

 

 

2. 여성 성인 · 순교자 공경과 여성의 위상 변화

 

근대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시대적 변화와 교회 안팎에 봉착한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를 일으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 나갔다.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착수하였고, 본당을 설정해 나갔으며,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며 교구 조직을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16) 순교자에 대한 신심을 간직하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온 신자들은 순교자 신심을 확산시켜 나갔고, 이는 교회 차원에서 순교자 시복 작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여러 매체와 강좌를 통해 세계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정리하면서 신자들을 교육해 나갔다.17)

 

이러한 움직임 안에서 여성 성인과 여성 순교자에 대한 교육과 공경도 이어졌다. 교회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 큰 본보기를 남긴 많은 여성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지속적으로 알려 나갔다. ‘예수의 수난’을 그 아래 함께 했던 여인들을 주목하여 설명하는18) 등 초대 교회 이래 세계 여러 지역의 여성 성인과 순교자를 자주 소개하였다. 교회는 여성들이 천주교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덕과 용덕으로 주를 위하여 치명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며, 선한 말로 “모든 이”를 권면하였다고 강조하였다.19)

 

『가톨릭연구』20)에는 「강의 가톨릭연구―유명한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162년에 로마의 귀족으로 순교한 성 비리시다21)를 비롯하여 「유명한 순교자」로 성녀 아녜스를 소개하는 등 「성인행적」, 「유명한 순교자」 등의 제목 아래 여러 성녀의 삶과 신앙을 삽화를 곁들여 널리 교육하였다. 교회가 세계 교회사에 남은 유명한 순교자로 현양하며 소개한 성 비르지타, 성녀 루치아, 성녀 아나스타시아, 성녀 아녜스 등은 과부나 동정녀였다.22)

 

세계 교회사에서만이 아니라 박해기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 성인 ·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정리하여 신자들에게 전하였다. 『가톨릭연구』는 「내 혼은 살련다―복자 김대건 안드레아를 사모하고」라고 하며 김대건 신부의 화상과 함께 그 신앙과 삶을 기리는 사모곡을 실었다. 바로 뒤이어 「낯익은 두 처녀―동정복녀 김롤놈바와 아녜스를 思慕」라는 제목의 글을 나란히 게재하였다. 기해박해(1839) 당시 26세로 순교한 김효임 골룸바와 24세로 순교한 김효주 아녜스를 어린양(예수)의 뒤를 따르는 두 처녀라고 노래하였다.23)

 

교회는 수시로 『경향잡지』, 『가톨릭연구』 등의 간행물을 통해 성 아녜스, 성 아나스타시아, 성 루치아, 성 골룸바 등 여성 성인과 순교자를 다루고 순교신심을 독려하였다.24) 여성신자들에게 이러한 출판물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순교자에 대한 공경을 더 깊이 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이는 또한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공경해야 할 대상에 여성이 세워진 획기적인 변화를 몸소 체험함이었다.

 

박해기에 이미 천주교회는 생명을 전수하는 책임에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여성 회장이 등장하고 여성신자 공동체가 형성되는 등 여성신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25) 여성신자가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을 전개한 일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이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책임에 비중을 두었으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보호와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딸을 출산한 산모라도 보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든가, 며느리 학대를 금지하고, 부인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남편에게 아내와 자녀를 가르칠 것을 명하였고, 딸도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26)

 

이처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나 한계가 남아있었어도, 여성 성인과 순교자는 신앙의 실천에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들에 대한 공경도 남녀를 막론하고 신자라면 모두가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여기서 교회가 『경향잡지』에 발표한 「논설 - 치명자의 지위와 형벌을 상고함이라」는 글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논설에서 교회는 순교한 이들을 상세히 고찰하며 각별히 유념해야 할 문제를 발표하였다. 그것은 절대 “치명자들의 지위를 상고하건대 남녀노소빈부귀천을 의론하지 말고” 공경할 것이었다. 교회는 “심히 혹독한 형벌을 견디며 치명한 순교자에는 양반, 군사만이 아니라 여인, 귀족 부인, 천한 여인, 나이 어린 여인 등이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27) 곧이어 「치명자들이 무엇을 증거하였는가」라는 논설도 연거푸 발표하였다. 순교자의 남녀, 신분, 나이 등의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못 박았다. 다만 신덕을 온전히 지킴을 공경할 일이라고 강조하였다.28)

 

더욱이 그 순교의 여정은 여성의 매우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이었음을 드러내었다. 일례로 여러 번 소개된 성녀 아녜스가 있다. 로마의 순교자들 가운데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인 성녀 아녜스는 박해가 일어나자 집을 떠나고, 정혼을 거부하며, 고문으로 위협하는 총독에 정면으로 맞서다 순교한 여성이었다.29) 성녀 아녜스는 청혼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났다. 그때 나이가 불과 13세였지만 “나는 그리스도와 정혼하였노라.”며 결혼을 거부하고 순교하였다.30)

 

여성신자들은 이와 같은 여성 성인과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접하며 천주교 여성으로 살아갔다. 역사에 존재한 성녀의 삶과 신앙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이는 여성신자들이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이 지니고 살아가도록 독려해 주는 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31) 한국천주교회와 여성에 주목한 선학의 연구에서 복음화의 충격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더 크게 미쳤으며, 천주교 신앙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자극을 준 힘으로 분석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앙의 실천을 근대화의 주요 기점으로 지적하였다.32) 자신이 선택한 믿음을 생명을 희생하면서도 지켜낸 여성을 남녀 모두가 공경하고, 그 여성의 삶과 신앙을 따르려는 사람이 생겨남은 천주교회가 드러낸 근대성이었다.

 

‘종교의 근대성’에 관한 여러 논의에서 주요 요소로 지적하는 것이 종교와 지배 권력과의 단절이다.33) 한국 고대사회에서 불교와 조선왕조 이후 유교는 지배 권력과 결합된 종교였다. 이 점에서 개인이 선택해 지켜낸 믿음인 천주교는 전근대를 벗어나 근대성을 지닌 종교라는 차이를 보인다.34) 거기에 더해 특히 천주교는 성별의 구분을 초월한 가르침에 바탕을 두어 여성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이해하여 실천한 종교였다. 천주교 여성에게서 근대를 향한 거센 물꼬가 열림을 볼 수 있다.

 

 

3. 여성신자의 인식 변화와 모범 신자로서의 활동

 

개항 이후 여전히 잦은 박해는 일어났지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상황이었기에 여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수도회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아 사업과 양로원사업을 거들고 본당 설립에 필요한 여러 뒷바라지도 하였다.35) 박해기 여성신자들은 신앙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어서 성사 준비나 교리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세례나 성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구전으로 전수받았지만, 교리 내용에 대한 지식은 늘 부족한 실정이었다.36) 그러나 이제는 여성 스스로가 교리를 배우기 위해 움직였고, 교육받을 기회를 갖게 되면서 보다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갔다.37)

 

곧이어 닥친 일제 치하에서 “교회 여성의 신앙생활과 사회적 역할은 당시의 식민지 체제와 가부장적 교회 체계 안에서의 많은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주어진 조건 속에 순명하는 자세로 헌신하는 데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굳건한 사회의 기반을 형성, 발전케 해준 밑거름이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는 설명이다.38)

 

비록 여러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천주교회는 성직자 수가 증가하였고 신자의 수도 급격이 증가해 갔다.39) 교세의 확대 속에서 여성신자의 조직적 활동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성신자 단체에 비해 조금 늦게 확인되지만, 여성신자 단체로 1924년경 종현(현 명동) 본당 내에 ‘성모자비회’가 최초로 목격된다.40) 여성신자들이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안 여성에 대한 인식과 위상의 변화는 이미 1910년대 초반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순교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신자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일에도 남녀 구분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식 아래 교회는 여러 매체를 통해 모두에게 모범이 되는 여성 교우를 적극 선정하여 보도해 나갔다.

 

교회가 ‘모범 교우’, ‘모범 될 만한 교우’ 등으로 소개한 여성신자의 활동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하여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여성신자가 주체적으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소유를 내놓은 일이다. 여성신자가 교사로 나선 일도 그 의미가 크다.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일을 여성이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여성이 먼저 신자가 되어 가족과 주변의 사람을 개종으로 인도한 사례도 중요하다. 이러한 활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그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성신자가 주체적으로 재산을 희사하고 나선 일이다. 여성신자의 이러한 활동은 교회의 잡지에 종종 보도되었다. 주교, 사제, 그리고 회장 등 주요 인사의 소식을 전하는 「교회 소식」에 재산을 헌납한 여성신자가 모범 교우로 소개되곤 하였다. 1912년 1월호 『경향잡지』의「모범 될만한 교우」에는 사회적으로는 긍휼의 대상이 될 만한 여성이 오히려 재산을 희사한 사례가 실렸다. 평안북도 의주부 영동에 사는 정 마리아는 혈육 하나 없이 사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재산을 가난한 교우와 이웃 사람을 위해 내어놓고, 의주 성당 중수에도 50원을 기부하였다. 성탄을 맞이해서는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초를 봉헌하였으며, 성탄 행사에서는 교우만이 아니라 이를 보러 온 사람들까지도 대접하였다.41)

 

의주부 송당면 상곡리 정 마리아는 해마다 일정한 돈을 희사하였고, 마침내 그녀가 기부한 돈으로 종각까지 건축하였다. 이에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종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왔다고 한다. 모든 교우가 더욱 열심히 봉교하게 된 공로도 그녀에게 돌렸다.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성당 건축과 성물 설비 등을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매일 성사 받는 교우가 끊어지지 않음도 모두 정 마리아의 믿음과 열심 때문이라는 칭송이 자자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장에 힘입어 본당 신부는 청년들을 모집하였고, 많은 청년이 기쁘게 모여들었다고 한다. 성당에서 매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성경과 여러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42) 정 마리아라는 여성신자의 믿음과 활동이 교회의 발전과 지역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이다. 이처럼 교회가 모범 교우로 소개한 여성의 행적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재산을 희사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넘어 지역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점이다.

 

1914년 이 마리아라는 여성은 평양 성당과 지역의 두어 공소에 여러 차례 재물을 희사하여 모든 교우가 그녀의 행적에 감동했다고 한다.43) 같은 해 황해도 은율군에 사는 김 막달레나도 교우들을 위해 성당과 인접한 가택과 막대한 토지를 구입하여 성당에 헌납하였다. 교회는 김 막달레나가 본래부터 자선심이 풍부한 열심인 교우로서 봉헌을 아끼지 않았다고 평하며, 그녀의 ‘아름다운 자선심과 맹렬한 호교심’을 본받자고 강조하였다.44) 황해도 재령 본당은 전교회장과 주일학교 선생을 비롯해 예비 교우도 날로 증가하는 중에 이 요안나라는 여성 교우가 본당을 돕고 전교사업도 후원하고자 주일학교 선생의 식비를 맡았다는 소식을 전했다.45)

 

여성신자의 주체적인 활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지할 곳 없는 과부들의 연이은 활동도 주목된다. 평양 본당의 이 마리아라는 과부는 73세의 고령이었는데 모든 교우가 다 칭찬하는 여성신자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평양 성당과 평남 강서군 광여울 공소를 비롯한 교회의 건축 사업을 위해 재물을 희사하였다. 이로 인해 성당의 토대가 마련되고 먼 지역의 교우들도 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되어 모든 이가 그 선한 공로를 칭찬한다고 평하였다.46)

 

황해도 은율군 장연 공소의 김 막달레나는 칠순을 넘긴 고령의 과부로, 슬하에 자녀나 다른 후손조차 없는 여인이었다. 열심히 봉교하며 자선심이 풍부한 그녀는 은율 성당과 주변 여러 공소에 금전만이 아니라 논과 밭 등의 토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산을 여러 해에 걸쳐 꾸준히 희사하였다. 교회는 “가히 본받을 것은 김 씨의 용맹한 호교심”이라며 그 활동을 누차 보도하였다. 그녀의 영향력은 확대되어 모든 교우가 그 열심과 선한 공로를 공경하며 감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47)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홀로 살아가는 여성도 모범적 선행을 베풀어 주목되었다.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의 김 데레사는 9살과 1살의 자녀를 둔 과부였다. 두 아이와 함께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열심히 봉교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기 밭 가운데 공소를 건축하고, 그 밭을 교회에 아주 봉헌하였다. 모든 교우가 이에 크게 감동하여 더 열심히 봉교한다는 소식이다.48)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의 김 비비아나는 슬하에 자녀도 하나 없는 ‘청년 과부’였다. 천주교를 믿은 이래 열심히 봉교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그녀가 많은 외교인을 개종시킨 일이다.49) 여성이고 더욱이 과부였지만 외교인을 천주교로 인도하는 교리 지식과 적극성을 갖춘 여성이었다. 고아를 위해 기부금을 보내온 부인도 있었다.50)

 

활발한 전교와 자선을 실천하여 이름을 남긴 여성도 있다. 황해도 평산군 용산면의 연 가타리나는 60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영세한 지 불과 4년 된 신자였다. 그녀는 기도와 권면으로 전교에 매우 힘써 주변에 세례받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열심을 찬송하였다. 노년의 여성이었지만 잡지에 소개된 일화는 그녀가 주변에 일으킨 반향을 보여준다. 그녀는 같은 마을의 교우 임 안드레아가 몹시 가난함을 긍휼히 여겨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어려운 사정을 딱히 여겨 돌려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부, 회장 그리고 모든 교우들 앞에서 “취대 계약서”(차용증)를 불살라 버렸다. 이러한 행동을 목격한 모든 교우들은 그녀에게 공경과 감탄을 표했다고 한다.51)

 

위와 같은 여성신자의 동향이 소개된 『경향잡지』의 「교회 소식」은 대개 성직자와 교회의 주요 인사들의 동향을 전하는 곳이다. 교회의 모두에게 알리는 주요한 소식을 전하는 곳에 여성신자들의 모범적 활동이 소개되었다. 더욱이 그 활동은 교회 공동체를 넘어 지역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활동이었다.

 

다음으로 여성신자의 활동으로 매우 주목되는 현상은 여성이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한 일이다. 전통 시대에 교육은 지배계층에 속한 남성의 분야였다. 하지만 박해기 이래 이미 교회 안에서는 여성이 교육자로 활동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이 여성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교와 교육을 위한 활동을 펴나갔으며, 불우한 여성을 돕고 입교로 인도하였다.52) 이 당시의 여성들은 전혀 새로운 천주교를 배우고 가르쳤으며, 그 내용을 실천하였다. 시대적 한계는 있었지만, 이미 교회의 여성 안에는 근대적인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게 뿌려진 씨앗의 싹이 트임은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목격되었다. 여성신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임을 맡아 공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황해도 은율군 장연 공소에 김 바르바라 여회장은 입교한 지 21년째인데, 외교인 어린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에 가장 힘을 기울였다. 대세를 준 사람이 21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화목하게 이끌고, 냉담한 사람을 돌아오게 하며 사랑과 긍휼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까지 변화시켜 함께 세례를 받고 열심 교우가 되었다.53)

 

그런데 김 바르바라 회장이 입교한 동기는 어떤 여성신자가 가르쳐 준 ‘교리를 배워서’였다. ‘어떤 여성신자’의 정체를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한 평범한 여성신자의 교리 지식과 교육 활동이 외교인을 입교까지 이끌었다. 이처럼 교사 역할을 한 여성의 존재는 자주 확인된다. 수원군 장안 공소의 김 아가타는 아예 「천주교회보」에 “경문 가르치기에 열심한 여교우”로 소개될 정도였다. 그녀는 “남녀를 막론하고 외교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열심과 지성으로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인도”한 여성이었다.54)

 

한편 여성신자가 교육 활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근대 이후 여성 교육기관이 출발한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55) 여성이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교육의 기회를 부여받았고, 문화적 활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교육적 능력을 갖추었기에 또 다른 교육 활동의 주역으로 나설 수 있었다고 헤아려진다.

 

이러한 여성신자의 활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여성들의 ‘근대성’이다. 여성신자는 천주교에 담긴 근대적 사상을 수용하여 실천했고 확산시켜 나갔다. 평안북도 의주부에 살던 중년의 여성인 정 마리아의 경우는 신분의 구별을 두지 않는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였다. 그녀는 “천주교는 귀천의 분별이 없으며, 천주교 안에서 교우로 한 지체가 될 뿐이다.”라고 공언하였다. 이에 종을 불러서 “너나 나나 같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나를 참 어미와 같이 종신토록 섬기어라. 나도 너를 친자식과 같이 여겨 이후에 모든 살림을 네게 주리라.”고 하며 종 문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이 일은 널리 알려져 마침내 『경향잡지』에 모범 교우로 보도되기에 이르렀다.56) 의주에 천주교가 날로 일어나고 매일 성사 받는 교우가 끊어지지 않음은 모두 정 마리아의 신덕과 열심이 있어서라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57)

 

여주에 사는 이 마리아(39세)는 부귀한 양반집 부인이지만 자신의 식모와 한마음으로 열심히 수계한 여성이다. 아들과 온 집안의 회두를 위해 항상 기구하고 집 안에서는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매일 열심이었다.58)

 

정 마리아의 경우는 1911년이었으며, 이 마리아는 1914년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주-종의 분변은 강하게 남아있었다. 정 마리아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공언하였다. 귀천의 구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주-종의 관계를 친어미-자식의 관계로 삼는 획기적인 인식을 드러내었다. 살림마저 물려줄 것을 여러 사람 앞에서 공언하였다. 여주의 이 마리아도 집에서 부리는 식모와 신앙 안에서 함께 하였다. 이처럼 여성신자는 천주교에 담긴 근대적 가치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며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교회의 순교자들은 이미 수평적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이를 실천하는 움직임을 확산시키고 있었다.59)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이 뿌리를 내려 확산되어 갔음이 근대 사회진입 초기 여성신자에게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근대사와 근대 여성사 연구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 안에서 여성신자가 남편, 아들, 아버지 등 남성 가족원을 비롯해 형제와 친인척을 권면하여 입교시킨 사례도 기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확인된다.60) 이와 관련해 조금 뒤의 기록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 선교사가 본국에 보고한 일화가 참고된다. 그는 어린 소녀(제르트루다[Gertrude])가 ‘사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였다. 어린 소녀가 스스로 성당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은 뒤, 완강하게 거부하던 부모까지 마침내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성장하여서 그녀는 결혼할 남성에게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는 한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였고, 마침내 남편과 시댁의 시할머니 · 시부모 · 시누이 모두가 세례를 받게 하였다. 선교사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그 소녀가 그녀 가정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61)

 

제르트루다라는 소녀의 경우처럼 나이 어린 딸이 부모를, 여성이 남편과 시댁의 온 가족을, 아내가 남편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은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일이었다.62) 비록 시대적으로는 근대사회에 진입했지만 오랜 전통이 남아있는 가정에서 여성이 남성 가족에게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르치고 권면하는 영역은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성이 적극적으로 가족 모두를 신앙으로 이끄는 생활을 이어가고, 가족 안에서 여성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지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63)

 

가족 구성원 가운데 여성, 그것도 어린 딸이나 아내가 자신이 선택한 신앙으로 남성 가족원을 인도하는 일은 실로 천주교인이 보여준 획기적인 근대성이다. 천주교와 조선 여성의 만남에 대해 이미 박해기에 강완숙과 그 동료에게서 근대 지향적 전환점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지적이 이루어졌다.64) 천주교의 수용을 여성의 관점에서 근대 지향적 전환점으로 이해하지만, 그 ‘전환’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그 내재되어 있던 지향점의 포문이 열리고 확산되어 나갔다. 선행 연구가 분석한 것처럼 근대를 지향하는 씨앗이 뿌려져 싹이 트고 있었음이다. 이 점에서 근대 천주교회에 목격되는 여성의 동향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뿌려진 근대적 씨앗이 거둔 실제의 열매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여성신자의 활동과 여성의 공적 영역 확대

 

신앙의 자유 이전 천주교 신자는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로 천주교를 선택하여 그 믿음을 지켜나간 사람들이었다. 이 점은 종래 국가의 이념으로 모두가 받아들였던 불교나 유교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를 갖는다. 국가의 허용 여부를 초월하여 천주교 신자는 자신이 선택한 신앙을 지키고 그에 따라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정치구조와 궤를 같이하는 유교 이념과 전혀 다른 천주교를 자신의 신념으로 선택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데 교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상인이나 천인과 신앙 안에서 교유를 나눈 일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65) 천주교 신자는 신분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 여성이 동등한 지체임을 강조하는 교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 남녀의 다름이 있을 수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여성’의 활동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박해기는 미사, 성사, 공동체 등 신앙생활을 위한 별도의 건물이 없던 시절이며, 개인의 집이 종교집회를 여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강완숙과 같은 선구적 여성은 신앙을 매개로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집을 종교 활동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였다. 초기 여성신자들은 한 채의 집을 공동으로 구매하여 살기도 하였다.66) 이처럼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공동체에서 여성신자의 참여와 활동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고, 시대의 변화를 예고하는 공동체도 형성하였다. 제한적 상황에서지만 여성은 신앙공동체라는 공적 영역을 열어갔다.

 

하지만 대개의 여성은 집에서 나와 일정한 장소로 이동해 미사 참례의 기회를 얻기 어려웠고, 성사를 보기도 힘들었다. 교회에서 권장하는 신심행위를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67) 개항 이후에 여성신자가 공소 설립과 선교에 열심히 참여하였음은 구전으로도 많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활동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잘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68)

 

그러나 근대 이후 교회는 여성의 신앙 활동을 언론과 출판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 조명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교회가 『경향잡지』를 통해 여성신자의 행적을 모범 교우의 사례로 보도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경향잡지』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던 잡지였다. 여기에 실린 여성신자의 활동이 교회 안팎에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교육과 전교를 위한 언론과 출판 사업은 교회가 무엇보다 역점을 두고 추진한 분야였다. 교회의 언론·출판 활동은 주로 신자가 대상이었지만, 일반인에게도 다가가 선교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69) 『경향잡지』를 필두로 한 출판물에서 교회는 교우들에게 신분, 직업은 물론 성별에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함을 크게 강조하였다.70) 역설적으로 교회가 남녀 구분이 없음을 강조함은 사회적으로는 물론 교회 안에도 성별의 구분이 여전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교회와 여성은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함께 경주해 나갔다. 모범 교우로 선정되어 보도된 여성신자의 활동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평안북도 의주부에 살던 정 마리아는 아직 전통의 영향이 강한 사회를 살아가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가치에 눈을 뜨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여성이었다. 더욱이 개인적 실행에 머문 차원을 넘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한 활동이었다.71) 정 마리아의 활동은 지역사회에 사뭇 근대적 가치를 확산한 공적 영역에서의 일이었다.

 

대구 본당의 김절마(제르마나, 1858~1933)는 성당 종탑에 설치할 두 개의 종 가운데 하나의 비용을 봉헌하였다. 축복식에서 그녀의 봉헌을 기려 종의 이름을 ‘제르마나’로 지었다.72) 성당의 종은 미사와 기도시간을 알리는 등 주요한 기능을 지녔으며, 따로 축복을 받아 모두가 바라보는 종탑에 걸어두고 사용하는 매우 상징적인 시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는 지역 공동체 안에서 시계의 기능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 종이 그녀의 세례명으로 이름 지어진 것은 공공에 주는 의미가 매우 크다. 정 마리아나 김절마의 경우는 여성신자의 활동이 교회를 통해 지역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쳐 나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휼, 봉사, 교육 등 교회를 매개로 한 여성의 활동은 개인의 신앙을 통해 사회 공적 영역에서 전개된 ‘사회적 활동’이었다.73)

 

근대사회에서 교회는 신자를 구성원으로 하는 고립된 종교 단체로만 머물지 않고 일반 사회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을 갖는다. 어느 사회이든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이고,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적 영역에서의 기능이 중시되는 기관이며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 활동이어도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 활동은 상당히 공공성을 갖게 된다.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신자까지 포함한 교회 구성원의 활동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여성신자의 활동은 교회를 통해 가족이나 신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이었다.

 

근대 이후 여성은 문밖을 나와 학교에 다니고, 일터에 출근하며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렇게 열린 여성의 공적 영역에 교회는 매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신분, 지위, 재산, 성별의 다름을 배제하는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여성은 근대사회에서 성장해 나갔다. 여성은 교회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활동을 전개하며 공적 영역을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끝으로 짚고 넘어갈 문제는 교회가 ‘여성신자’로서가 아니라 ‘모범 교우’로 여성의 활동을 공인하고 칭송한 점이다. 여성신자의 활동을 교회가 모범 교우로 적극 조명한 것은 여성의 위상을 교회 안팎으로 올려주었다. 성에 따른 역할 구분이나 신분, 재산, 지위 등에 따른 불평등과 차별이 없는 공동체는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실체라기보다 언제나 추구하는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천주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하더라도, 근대 이전에 남녀 구별의 벽은 아직 높았다. 그러나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 드러난 여성신자의 활동은 여성과 교회 모두 그러한 지향을 향해 큰 발걸음을 옮겨갔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근대 이후 교회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활동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완벽하지 않았어도 그 이전보다 한 단계 더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는 과정을 걸어갔고, 공적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고 평할 수 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여성의 교회 활동을 적극 수용하면서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여러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교회 문헌에 따른 가르침은 여성의 공적 활동을 인정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소명이 상이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적잖은 모임과 의논을 거듭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여성 문제에 더 융통성을 보이며 접근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이 신앙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74)

 

근대 이후 천주교 여성사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교회는 여성에게 주요한 사회활동의 장이었다. 특히 천주교 여성에게 교회는 말할 수 없는 희생과 노력을 통해 확대해 온 주요한 공적 영역이다. 이러한 역사적 바탕 위에서 교회는 여성이 사회로의 연결을 확대하고 개인적인 믿음과 자아실현을 이루어가는 공적 영역으로 온전히 기능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이후 여성 성인과 순교자 공경에 자극받아 모범적 활동을 전개해 온 천주교 여성이 지향하는 궁극적 방향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근대 한국천주교회에서 시행한 여성 성인·순교자 현양이 여성신자의 인식과 활동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검토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근대 한국천주교회는 여러 강좌와 교육, 출판 활동을 통해 한국 교회사는 물론 세계 교회사에 보이는 치명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며 순교신심을 촉구하였다. 이 과정에 한국과 세계 교회사에 남은 여성성인과 순교자의 삶과 신앙도 자주 다루었으며, 이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천주교의 교리와 역사를 배우는 일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듯이, 공경해야 할 순교자도 성별이나 빈부귀천을 논하지 말 것을 힘주어 말했다. 심히 혹독한 형벌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치명한 순교자에는 귀족 부인도 있지만 남의 집 종살이하는 천한 여인, 나이가 어린 여인 등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신앙과 형벌을 감내한 인내를 배울 것을 가르치며, 신덕을 온전히 지킴을 공경하는 일에 남녀나 신분, 나이 등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공히 공경의 대상으로 여성이 세워졌다. 이 점은 한국천주교회가 일으킨 획기적인 변화였다.

 

여성신자들은 세계와 한국에 신앙의 모범이 된 여성의 삶과 신앙을 상세히 접하며 천주교 여성으로 살아갔다. 역사에 존재한 성녀의 삶과 신앙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이는 여성신자들이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이 지니고 살아가도록 독려해 주는 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신자들의 활동도 활발해지고 보다 전문화되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여성신자를 널리 알리며 모두의 신앙을 독려하였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재산을 희사하였고, 교회와 지역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여성이 사도로 평가될 정도로 어린 딸이나 아내가 나서서 부모와 시부모 · 남편 등의 가족을 개종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전문적인 역할도 수행하였다. 교회는 언론을 통해 여성신자의 활동을 ‘여성신자’로 국한함이 아닌 모두를 향한 ‘모범 신자’로 널리 보도하였다.

 

천주교 여성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주체적으로 신앙을 지켜나간 사람들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와 지역사회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친 여성이었다. 신분 · 지위 · 재산 · 성별의 다름을 배제하는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천주교 여성은 근대사회에서 성장해 나갔다. 이 점에서 천주교 여성사는 한국사회의 근대로의 전환을 가장 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자료

 

『경향잡지』

『가톨릭연구』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가톨릭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DB.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의 ‘한국천주교회사’(https://cbck.or.kr/Catholic/Korea/History)

 

2.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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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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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Vol. 1,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3·1927.

 

……………………………………………………………………………………

 

1) 이 글에서 ‘근대 한국천주교회’라 함은 김정숙이 선행 연구에서 설정한 한국 가톨릭 여성사의 시대구분에 따라 “제2단계 : 신앙 자유의 획득부터 민족 해방에 이르기까지(1882~1945)”를 말한다(김정숙, 「총론 한국 여성은 어떻게 천주교와 만나고 있는가?」,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23~30쪽). 여기에서 김정숙은 ‘제2절 한국 가톨릭 여성사의 시대구분’으로 1784년 교회 창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3단계로 시대 구분하였다. 필자가 근대 천주교회라 함은 위의 시대구분에서 제2단계에 해당하는 1882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다만 이 글이 일제 강점기 전체를 검토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근대사회로 진입한 뒤 드러난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2) 한국교회의 순교자 신심과 순교자 현양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역사신학 박사학위논문, 2017. 특히 ‘제Ⅱ부 2장 근대 조선 천주교회 순교자 신심과 순교자 현양’ 참조. 순교자 현양운동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참고문헌은 조현범, 「제4장 순교 복자의 탄생과 교회의 변화」,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77~328쪽 참조.

 

3) 김옥희, 『한국 천주교 여성사』 Ⅰ·Ⅱ,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1983. 김옥희의 연구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 여성사의 연구 현황에 관한 총체적 정리는 김정숙, 「총론 - 한국 여성은 어떻게 천주교와 만나고 있는가?」,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0~17쪽 참조.

 

4) 김정숙, 「조선 후기 천주교 여성 신도의 사회적 특성」, 『교회사연구 - 한국 천주교회와 여성』 19, 2002 ; 방상근, 「병인박해기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존재 형태와 역할」, 위의 책, 2002 ; 신영숙, 「일제시기 천주교회의 여성 인식과 여성 교육」, 위의 책, 2002 ; 최혜영, 「현대 한국천주교회 여성 활동과 그 전망」, 위의 책, 2002.

 

5) 신영숙, 위의 논문, 2002, 특히 95쪽.

 

6) 신영숙, 위의 논문, 2002, 124쪽.

 

7) 김정숙 · 박주 · 손숙경 · 신영숙 · 금경숙 · 장정란 · 최혜영,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8) 손숙경, 「제3장 박해를 딛고 세상으로 나온 교회(1882~1911)」,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81쪽.

 

9) 신영숙, 앞의 주 4)에 보인 논문 ; 신영숙, 「제4장 겨레의 수난을 견뎌낸 교회여성(1911~1945)」, 위의 책, 2008, 238쪽.

 

10) 김정숙, 「총론 - 한국 여성은 어떻게 천주교와 만나고 있는가?」,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20~22쪽 참조 ; 신영숙, 위의 책, 2008, 221~224쪽.

 

11) 이러한 연구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와 참고할 글은 방상근 외,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참조.

이 글의 작성을 위해 한국 여성사에 관한 연구 성과도 참고하였다, 한국 여성사 연구의 본격적인 걸음은 1920년에 시작하였다. 이능화(1869~1943)는 “조선의 여속사가 없는 것을 조선인의 과오”라고 하면서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1927)를 펴냈으며, 기녀의 역사를 정리하여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도 발표하였다.

1920년대에 여성사 연구의 시원이 이루어진 것은 이 시기에 페미니즘이 등장한 것과도 일정한 궤를 같이한다. 이들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기독교 페미니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 계열 여성운동가로는 김활란·황신덕 등이 있었는데, 기독교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가부장적인 기독교 윤리를 수용하였다. 일부일처제를 강조하고 정절을 강조한 기독교는 축첩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유교적 가부장제의 정절론, 모성론과 뜻을 같이하였다(최규진, 『근대를 보는 창』 20, 서해문집, 2007, 260쪽). 한국 학계에서 아직 여성사에 관한 학문적 관심이나 업적은 상대적으로 낮은 실정이라고 하지만 그 관심과 업적은 날로 커지고 있다.

 

12) 강석진, 앞의 논문, 179쪽.

 

13) 한국 천주교 여성사의 연구 당위성에 관해서는 김정숙, 위의 책,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0~22쪽에 실린 ‘왜 가톨릭 여성사 연구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으로 풀어간 글 참고.

 

14) 이 글을 위해 중국 천주교회의 동향에 관한 연구도 참고하였다. 특히 당시 중국 천주교회의 여성 활동과 위치에 관한 서양 선교사의 보고서를 주목하였다(Jean-Paul Wiest, Maryknoll in China : A history, 1918-1955,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88, pp. 199-201 ; 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Vol. 1,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3 ; 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Vol. 1,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7 등).

같은 시기 미국 천주교회의 경향도 참고하였다. 미국 천주교회사에서 일정한 자리를 갖는 ‘천주교 사회운동(The Catholic social movement)’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목표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즉 개인 구원, 신앙, 믿음을 통해 사회에 정의를 이루려는 것이 목표인 사회적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여성들의 교육, 직업훈련, 복지 등에 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Aaron I. Abell,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 A Search for Social Justic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0).

특히 평신도 여성의 사목활동과 전문 활동에 주목하여 여성의 교육, 노동, 산아제한, 환자와 고아 등을 위한 활동 등의 사회적 문제만이 아니라 교리교사로의 양성과 활동, 여성의 평신도 직무 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여성이 사목회도 할 수 있고 단체장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도 커다란 변화였다(Jay P. Dolan, The American Catholic Exprience - A History from Colonial Times to the Present, Doubleday & Company, Inc., New York, 1985).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의 변화는 이러한 천주교회의 전체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5) 앞에 소개한 강석진의 연구는 여성 순교자에 대해 주목한 글은 아니지만 본 연구의 흐름을 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강석진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순교자 현양 운동사에 주목하여 개항 이후 순교자 신심을 본받으려는 운동이 전개되었고, 『가톨릭연구』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순교사 연구와 이를 알리려는 노력에 대해 주목하였다(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역사신학 박사학위논문, 2017).

 

16)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의 개설적인 흐름은 손숙경, 「제3장 박해를 딛고 세상으로 나온 교회(882~1911)」,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48~154쪽에 정리한 내용 참고. 신앙의 자유 이후 대성당의 설정과 발전, 그 뒤에 몰아닥친 급격한 변화 속에 천주교회가 전개한 선교 활동과 신자들에게 교육한 내용에 대한 이해는 장동하,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6, 2부와 3부 참조.

 

17) 순교자에 대한 신자들의 순교신심 확대와 순교자에 대한 교구장의 관심 및 시복 작업에 관해서는 강석진, 위의 논문, ‘Ⅱ부. 순교자에 대한 기억―순교자신심의 확산’ 참고.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된 이후부터 순교자 현양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온 한국 천주교회는 마침내 1924년 9월 29일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조선 순교자 시복 청원인 역할 담당 가르니에 신부)로부터 1925년 조선 순교자 시복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강석진, 위의 논문, 2017, 217쪽). 뮈텔 주교는 청원 대상자 82명 중 79명이 공식적으로 시복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어 「복자 되실 79위 치명자의 렬명(列名)」이 『경향잡지』 565호(1925년 5월호), 289쪽에 보도되었다.

 

18) 「예수슈난 - 십자가와 그 아래 여인들」, 『경향잡지』 251호(1912년 4월호), 160~161쪽 등.

 

19) 『경향잡지』 364호(1916년 12월호) ; 같은 책, 367호(1917년 2월호) ; 같은 책, 778호(1934년 3월호) 등.

 

20) 1934년 평양교구에서 천주교의 학술적 연구와 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톨릭연구강좌』를 창간하였다. 1934년 7월부터 『가톨릭연구』로 개칭하여 천주교의 학술잡지로 발전, 개편시켜 나갔다. 초기에는 성경 해설 · 교회사 · 전례 · 주일학교 교리 등을 주로 게재하였으며, 점차 문예란 · 독자란 · 아동란 등이 증설되는 등 편집 내용과 체제를 다양하게 구성하며 발전해 나갔다. 193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천주교의 학술과 문화를 대변하며, 오늘날 주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은 최석우, 「가톨릭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DB.

 

21) 『가톨릭연구』 제1권 제6호, 1934년, 50~51쪽.

 

22) 『가톨릭연구』 제1권 제6호에 「유명한 순교자」라는 제목으로 성녀 비르지타를 소개하였으며(50~51쪽), 제1권 제8호에는 성녀 아녜스를 소개하는 등 여러 성녀의 신앙과 행적을 교육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갔다.

 

23) 『가톨릭연구』 제1권 제9호, 1934년, 67~68쪽.

 

24) 『가톨릭연구』 제1권 제8호, 1934년, 31~32쪽 ; 『경향잡지』 775호(1934년 2월호) ; 같은 책, 778호(1934년 3월호) 등.

 

25) 김정숙 외 지음,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69쪽.

 

26) 김정숙 외, 위의 책, 2008, 62~63쪽.

 

27) 「논설 - 치명자의 지위와 형벌을 상고함이라」, 『경향잡지』 233호(1911년 7월호), 297~298쪽.

 

28) 「논설 - 치명자들이 무엇을 증거하였는가」, 『경향잡지』 238호(1911년 9월호), 456~457쪽.

 

29) 성녀 아녜스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아녜스」, 『한국가톨릭대사전』 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5612~5613쪽 참조.

 

30) 「유명한 순교자」, 『가톨릭연구』 제1권 제8호, 1934년, 31~32쪽.

 

31) 한국천주교회가 조선 순교자 시복을 위한 노력과 순교자 현양을 고취하는 가운데 ‘1839년 박해 100주년’을 기념한 강연회에서 여자 교우들에게는 시복된 4명의 여성 복자에 초점을 맞춘 강연을 개최하였다(강석진, 위의 논문, 2017, 285쪽 참조). 여성신자에게는 여성 성인과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열심과 신덕을 갖고 순교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각별한 동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32) 조광,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층과 수용논리」, 『역사비평』 25, 역사비평사, 1994, 282~293쪽 ; 김정숙, 「조선 후기 천주교 여성 신도의 사회적 특성」, 『교회사연구』 19. 2002, 9~10쪽.

 

33) 종교의 근대성에 관한 이러한 논의는 조현범, 「‘종교와 근대성’ 연구의 성과와 과제」, 『종교문화연구』 6, 한신인문학연구소, 2004 참조.

 

34) 장석만은 종교의 근대성을 다룬 연구에서 한국천주교의 근대적 변화를 읽어내려 노력하였다(장석만, 「개항기 천주교와 근대성」, 『교회사연구』 17, 2001).

장석만은 또한 동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은 개인의 중심성이 성립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왕실이나 국가 등이 서구 근대성의 수용의 주체이며, 개인이 수용 주체의 단위로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장석만, 「개항기 한국 사회의 ‘종교’ 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박사학위논문, 1992, 85~86쪽 참조).

한국에서 천주교의 수용 주체는 개인이며, 그 수용과 실천도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었다. 이 점에서 천주교가 지닌 근대성은 매우 깊이 천착할 문제이다.

 

35) 한국천주교회사 가운데 신교 자유 이후 천주교회의 동향과 여성의 신앙 활동에 초점을 맞춘 글은 손숙경, 「제3장 박해를 딛고 세상으로 나온 교회(1882~1911)」, 앞의 책, 2008가 참고된다. 특히 손숙경은 본당설립에 있어서 여성신자의 역할과 개항기 여성신자의 학교 교육에 관해 집중 검토하였다.

 

36) 김정숙, 「제2장 교회의 재건과 여성 교세의 신장(1831~1882)」, 앞의 책, 2008, 132~133쪽.

 

37)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된 이후 교회는 보다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사회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나갔다. 이 시기 사회사업은 수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평신도 여성신자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손숙경, 「제3장 박해를 딛고 세상으로 나온 교회」, 앞의 책, 2008, 161~166쪽 참조.

 

38) 신영숙, 「제4장 겨레의 수난을 견뎌낸 교회여성(1911~1945)」, 앞의 책, 2008, 238쪽. 이 글에서 신영숙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여성신자가 이루어 간 신앙생활과 교회를 통한 근대 여성 교육, 가톨릭 문화와 여성의 활동 등을 검토하였다.

 

39) 한불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의 자유가 인정되고 신자들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6년 교세는 14,039명이었다. 그 뒤 급격히 증가하여 1900년에는 42,441명, 1910년에는 73,517명으로 파악되었다. 1910년 성직자 수는 52명(프랑스인 40명, 한국인 12명)이었다. 이 통계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한국천주교회사’(https://cbck.or.kr/Catholic/Korea/History)의 「제2부 개항기 교회의 진로와 민족의 수난(1882-1911년)」에 게재된 “〈표 2〉 개항기의 조선 천주교회(단위: 명)” 참조.

 

40) 여성신자 단체의 보다 활발한 활동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백병근, 「일제시기 서울지역 천주교 신자 단체 연구」, 『교회사연구』 32, 2009, 133쪽·138쪽 참조. 신영숙은 여성신자의 단체 활동이 현재 교회 여성의 신앙생활과 천주교 교회를 떠받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하였다(신영숙, 앞의 책, 2008, 229~233쪽).

 

41) 「천주교회보 - 모범 될 만한 교우」, 『경향잡지』 245호(1912년 1월호), 4~5쪽.

 

42) 「천주교회보 - 모범 될 만한 교우」, 『경향잡지』 290호(1913년 11월호). 507쪽. 위의 주 42)에 보인 사례도 의주 본당의 ‘정 마리아’로 이름이 같다. 그런데 여기의 정 마리아와는 상세 주소와 활동내용, 희사한 금액 등이 다르다.

 

43) 『경향잡지』 302호(1914년 5월호), 221쪽.

 

44) 『경향잡지』 311호(1914년 10월호), 435쪽.

 

45) 「천주교회보 - 이 요안나의 아름다운 표양」, 『경향잡지』 807호(1935년 6월호), 345~346쪽.

 

46) 『경향잡지』 302호(1914년 5월호), 221쪽.

 

47) 「천주교회보 - 김 막다릐나 씨의 선공」, 『경향잡지』 311호(1914년 10월호), 435쪽 ; 『경향잡지』 446호(1920년 5월호), 230~231쪽. 이때 김 막달레나는 79세였다.

 

48) 『경향잡지』 341·342호(1916년 1월호), 3쪽·30쪽.

 

49) 『경향잡지』 433호(1919년 11월호), 483~484쪽.

 

50) 『경향잡지』 448호(1920년 6월호), 280쪽.

 

51) 「천주교회보 - 연 가다리나 씨의 열심애긍」, 『경향잡지』 324호(1915년 4월호), 170~171쪽.

 

52) 박주 · 김정숙, 「제1장 천주교와 조선 여성의 만남(1784~1831)」,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79~85쪽.

 

53) 「천주교회보 - 영해들의 은모」, 『경향잡지』 339호(1915년 12월호), 532쪽.

 

54) 『경향잡지』 417호(1919년 3월호), 101쪽.

 

55)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된 여성신자들의 학교 교육에 대한 이해는 다음에서 얻을 수 있다. 손숙경, 앞의 논문, 2008, 176~181쪽 ; 신영숙, 앞의 논문, 2008, 199~212쪽. 일제 강점기에 천주교회가 설립·운영한 주요 여성 교육기관 목록은 백병근, 「제6장 천주교의 교육 사회 문화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392~393쪽에 정리한 〈표3〉 참조.

 

56) 『경향잡지』 224호(1911년 2월호), 74~75쪽.

 

57) 『경향잡지』 290호(1913년 11월호), 507쪽.

 

58) 「리 마리아 씨의 열심」, 『경향잡지』 311호(1914년 10월호), 436쪽.

 

59) 천주교 여성사에서 박해기에 이미 여성신자들은 남녀 차별을 전제로 한 유교 사회의 틀을 깨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박주·김정숙, 「제1장 천주교와 조선 여성의 만남(1784~1831)」, 앞의 책, 2008, 63~65쪽). 순교자들의 고백을 통해서도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이미 수평적 인간관계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강석진, 위의 논문, 113~115쪽 참조).

 

60) 신영숙, 「제4장 겨레의 수난을 견뎌낸 교회여성(1911~1945)」,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94~198쪽.

 

61) 메리놀 문서 No. 8-R2, F4 2, 269~271(1950년 12월 이전 서울에서 캐롤 몬시뇰이 작성한 문서). 이 글에 주로 활용한 메리놀회 문서에 대한 소개는 최선혜,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361~369쪽 ; 위의 논문, 364쪽 각주 9) 참조.

 

62) 가족 안에서 여성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신영숙, 앞의 책, 2008, 195쪽 참조.

여성에 의한 가족 개종의 예는 미국 선교사의 눈에도 목격되어 아내의 믿음을 통해 고집스럽게 신앙생활을 방해하던 남편이 돌아서게 된 일화가 북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Fr. George M. Carroll, ‘Checkmate’, The Field Afar, 1941. 7-8, pp. 2-3 참조). 여기의 The Field Afar(『그 먼 땅에』)는 편집장이나 발행인 없이 보스톤 대교구의 전교회 책임자였던 월시(J.A. Walsh) 신부가 각 선교지로부터 받은 편지를 기사 형태로 간행한 것이 창간호였다(1907년 1월). 1918년에 잡지명이 ‘The Field Afar―Maryknoll’로 바뀌었고, 1939년에 ‘Maryknol - The Field Afar’로, 그리고 1957년 창간 50돌을 맞아 ‘Maryknoll’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국에 관해서는 창간 직후인 1909년 2월호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게재되었다.

 

63) 손숙경, 위의 책, 2008, 167쪽.

 

64) 김정숙은, “한국 여성사에서는 독립된 지위와 역할을 확보해 나가는 여성의 출현을 근대 지향적 전환점으로 해석한다. 이 전환점은 강완숙과 그 동료에게서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매우 의미 깊은 지적이다(박주·김정숙, 「제1장 천주교와 조선 여성의 만남(1784~1831)」,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 2008, 75쪽).

 

65) 가장 구체적인 사례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경우가 참고된다. 사대부 집안 출신이며 진사였던 황사영이 교류했던 인물들 가운데 양반의 비율은 26명으로 20.5%에 불과하며, 그 밖에는 모두 신분이 낮은 이들이었다. 특히 천인이 6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황사영이 도당, 동당이라고 진술한 사람의 신분도 붓, 갓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천민, 목수 등이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실천한 인물이었다(이장우 · 최선혜 · 조현범,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54쪽).

 

66) 박주 · 김정숙, 앞의 책, 2008, 73~75쪽 참조.

 

67) 김정숙, 앞의 책, 2008, 130~132쪽 참조.

 

68) 손숙경, 앞의 책, 2008, 167쪽 참조. 1902년의 경우 여성은 전체 영세자의 약 1/4이었으며, 여성에게 선교하는 사람은 남편들이었다고 한다. 여성신자의 활동은 남성의 뒷면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전으로 많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69) 교회의 언론·출판 활동을 통한 선교 사업이 여성에게 미친 영향과 여성의 문화적 역할에 관한 설명은 신영숙, 앞의 책, 2008, 특히 213~218쪽 참조.

 

70) 『경향잡지』(보감) 172호(1910년 1월 호가8일), 25~27쪽 참조.

 

71) 「우리의 모범 될 만한 교우」, 『경향잡지』 224호(1911년 2월호), 74~75쪽.

 

72) 대구(현 계산) 본당의 정규옥(바오로, 1852~1931)·김절마(제르마나, 1858~1933) 부부는 집 사랑채를 임시 성당으로까지 활용하는 등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의 사목 활동을 적극 보좌하였다. 특히 김절마는 집 사랑채가 성당으로 활용되는 동안 매우 세심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한 교우이다(손숙경, 위의 책,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2008, 173쪽 참조). 성녀 제르마나(Germana Cousin)는 프랑스 피브락에서 1579~1601년 무렵 활동한 동정녀이며 목동인 성녀이다.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73) 여기에서 1930~40년대 미국 천주교의 활동을 ‘사회적 활동’이라는 관점으로 연구한 Aaron의 글이 참고된다. 그는 천주교회의 활동은 개인의 신앙을 통해 사회에 이루려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구호, 교육, 의료, 노동 등의 활동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복지, 정의, 평등, 민주, 인권 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가톨릭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자신의 연구도 ‘사회적 정의를 위한 리서치’라고 규정하였다(Aaron Ignatius Abell, American Catholicism and Social Action, Hanover House, 1960, p. 306).

 

74) 천주교 여성사의 관점에서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는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 논의에 대해서는 최혜영, 「현대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 활동과 그 전망」, 『교회사연구』 19, 2002, 특히 136~139쪽 참조.

 

* 이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2018년 선정 시간강사연구지원으로 수행되었다(과제번호 018S1A5B5A07071821).

 

[교회사 연구 제59집, 2021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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