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두려움과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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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12 ㅣ No.811

[레지오 영성] 두려움과 게으름

 

 

“특히 자발적인 신심 단체에서, 항상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단체가 화석화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큰 문제이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악은 끊임없이 변화된 모습으로 공격해 오는데,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우리의 열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타성에 젖어 시들해지고, 결국 판에 박은 듯한 방법만을 쓰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런 퇴보가 계속되면 활동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치닫게 되어 마침내 그 단체는 가장 바람직한 회원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하고 붙잡아 두지도 못하게 되어, 결국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된다. 레지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평의회와 모든 쁘레시디움에서 열정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도록 만들어야 한다.”(교본 136쪽)

 

예전에 영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년 제작)라는 영화의 감독인 민병훈 감독을 만나 그 영화 전체를 감싸는 주제가 ‘두려움’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역시 한때 신학교를 지망한 적이 있었고 그 영화를 만들면서 많은 신부들과 신학생들을 만났고, 신학생들의 내면을 꿰뚫고 있는 어떤 감각 하나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리켜 ‘두려움’이라고 표현했다.

 

사제복을 입고도 온전히 죽지 못해 반만 죽고 반은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리고 온전히 죽지 못한 그 모진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한다.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아직도 두려워서 온전히 죽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제복을 입고도 반만 죽어 반은 살아있는 제 모습이 신기한지 한 번씩 되돌아보며 비웃고 지나간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에서부터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늘 괴롭힌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진화의 법칙에 반대되는 자연법칙 중의 하나로 ‘열역학 제2법칙’이란 것이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는 더욱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완전한 질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그리고 더욱 고차원적인 분화의 상태에서 덜 분화된 상태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주는 굽이쳐 내려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시냇물에 비유했었다.

 

그래서 마침내 가장 낮은 단계의 무정형의 상태, 완전성을 상실하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최 끝단의 상태를 ‘엔트로피(entropy)’라고 했다. 이 ‘엔트로피’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아래로 흘러가려는 힘을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화의 흐름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뒤집기 위해서는, 처음 상태로 다시 돌려놓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적 성장 원한다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용기 필요해

 

그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았다. 영적 성장에는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게으름’은 우리 모두의 삶에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생각해보았다. 영성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이 엔트로피의 힘, 곧 게으름에 대한 식별이다. 과거의 낡은 지도에 집착하여 옛날 방식대로, 또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피하고 좀 더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안일함과 게으름, 그리고 자기 방식대로의 고집스러운 길을 가려는 경향에 대한 식별이다.

 

그렇게 볼 때 ‘사랑’의 반대는 곧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어렸을 때 사랑의 반대가 ‘미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뒤집는 차이뿐이고 실제로 그 감정은 뿌리가 같다는 것을 나중에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으나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나타난 감정이 ‘미움과 증오’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는 오히려 마땅히 가졌어야 할 관심에서 멀어진 회피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쩌면 이 밑바닥에는 관계 회복의 과정에서 오는 불편함과 두려움이 깔려 있을 수 있다.

 

‘두려움’이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과 모험에서 새로운 현실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비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돌아보기를 두려워하여 피하기만 한 게으름과 무질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게으름과 무질서는 악의 본질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만일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느 정도 용기는 필요하다. 마냥 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정적이고 야심적이며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성찰하다 보면 우리 안에 어느 정도 이 게으름이 잠복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그래서 게으름은 악의 본질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는 이 게으름과 두려움에 맞서 반대로 치고 올라가는 저항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적 의지만으로는 힘이 들뿐더러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십상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겨나갈 뿐이다. 그리고 이 저항과 거슬러 올라가는 힘은 늘 ‘삼위일체와의 관계’ 안에 계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 무염시태 Se. 전담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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