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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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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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12 ㅣ No.812

[레지오 영성] 닮았네

 

 

발가락이 닮았네

 

내가 유아세례를 준 리사는 통일 대통령을 꿈꾸는 야무진 소녀입니다. 교수님들이신 엄마 아빠와 센스쟁이 할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벌써 이해와 상상력이 놀랍고 재치가 펄펄 넘치는 꿈나무입니다. 그런데 리사의 엄마는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리사가 커갈수록 엄지발가락이 엄마의 발가락을 닮아간다는 것이지요. 리사의 엄마는 유난히 크고 눈에 띄는 엄지발가락을 감추려 한 여름에도 샌들을 신지 않는데 귀여운 외동딸이 자신의 발가락을 닮았으니 신경이 쓰인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지사이거늘 발가락이 닮았다고 못마땅한 것은 너무나 행복한 푸념이 아닐까요?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나오는 아빠 M은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기에게서 닮은 모습을 찾다 찾다가 아기의 발가락을 붙들고 “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하고 외치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요. 자식은 부모를 닮고, 부부도 사랑이 깊어지면 오누이처럼 닮아갑니다. 우정이 깊은 친구도 그렇지요. 닮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이겠지요.

 

 

하느님을 닮았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짐승을 닮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도 꽤 있지요. 나는 누구를 닮아가고 있는지 가만히 저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제 안에 숨겨진 짐승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씌워주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고 천사들 다음가는 자리에(시편 8,6) 앉아있는 저를 보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처럼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할 줄 아는 것이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려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신 영적인 감각을 일깨우고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면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야가 열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느낄 줄 아는 영적 감성이 살아나며, 성령의 힘으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생깁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는 신앙은 특별한 기도나 신심행위를 통해서만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주교구 신자들이 바치는 ‘전주교구 기도문’에는 하느님을 닮아가는 신앙의 바람과 길이 담겨있습니다. 필립피서 2장 1-18절의 말씀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각 단락 끝에 다음과 같은 후렴을 바칩니다.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성령의 힘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인 감각은 일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자비로운 눈으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바라보십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마태 5,45) 분이십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나 사람들 때문에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꼴도 보기 싫고 말도 건네기 싫은 사람들도 있지요. 그럴 때 저는 ‘하느님은 어떻게 보실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여쭈어봅니다. “아버지, 저 웬수를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제 눈을 밝혀주시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창세 1,31)

 

자비로운 사람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압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 사람의 좋은 모습과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줄 알지요.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태도이기도 하지만 겸손의 길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함께 사는 사람들 중에는 ‘바보, 멍청이’(마태 5,22)들이 있지요. 눈치코치 없이 나대는 바보, 내 속을 뒤집어 놓는 멍청이들은 내 인생에 걸림돌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지요. ‘바보, 멍청이’들 때문에 화가 나면 저는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한바탕합니다. “예수님, 바보들이 제 속을 뒤집어 놓고, 멍청이들 때문에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바보 멍청이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와서 쉬어라.”(마태 11장) 바보들과 함께 살며 고생하고 멍청이들 때문에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 때 예수님께 가십시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나약함을 예수님께 맡겨 드리면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바보, 멍청이들과 함께 평안히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들의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바보가 되었고, 세상에서는 어리석음의 길을 걸어가셨지요.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갈라 1,4)

 

 

성령의 힘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악령의 공격을 이겨낼 무기를 갖추고 살아갑니다.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세력입니다. 악령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이타적인 사랑보다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하느님을 내 생각이나 기준에 맞추어 이해하려 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욕망을 앞세우게 됩니다. 그런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도구로 삼는 미성숙한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하도록 기도합니다.(사도 8,15;17) ‘성령이 충만하다’는 뜻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을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바꾸어갑니다. 자신의 기대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로마 15,13)

 

성화의 길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그분의 품위와 거룩함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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