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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60: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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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19 ㅣ No.1413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0)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 신유박해 이후에도 암흑기 조선 교회 유지한 밑바탕

 

 

- 교우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인 이경언이 한 과부에게 권면하고 있다. 이경언은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이나 상본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그림=탁희성 화백.

 

 

풀뿌리 교회의 든든한 토대

 

명도회는 일개 신심 단체가 아니었다. 주문모 신부에 의한 명도회 도입은 당시 조선 교회가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었다. 기존의 전교 방식과 신자 교육 및 신앙 활동 전반에 걸친 혁신이 명도회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의 출범 직후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는 예상치 않게 명도회의 대성공을 도와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박해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뿌려진 명도회의 사랑방 공동체 모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 순교 이후 세례와 성사를 줄 신부도 부재한 캄캄한 암흑의 상황에서도 명도회는 초기 교회 이래로 이어져 내려온 평신도에 의한 풀뿌리 교회의 전통을 굳건하게 이어갔다. 제대로 된 교리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새 신자들은 박해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명도회 출신 회원에 의해 교리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고, 조선 교회는 이들의 헌신 위에서 재건의 토대를 다시 쌓아 나갔다.

 

명도회는 초기 교회에서 중간 지도자층을 길러내는 엘리트 신자 양성소의 역할을 했다. 그 기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명도회의 훈련 과정을 거쳐 수많은 추수하는 일꾼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주문모 신부가 중국 명도회의 시스템을 조선 교회에 도입하고 1년 만에 순교의 길을 떠났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주 신부는 처음부터 미구에 닥쳐올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 조선 교회에 자생의 방도를 마련해 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때 극적으로 불타올랐던 신앙의 행동과 기억들이 이후 조선의 지하 교회가 극악한 탄압을 버텨내게 만든 힘이 되었고, 당시에 습득한 방법들이 교회의 재건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 복자 이경언 바오로.

 

 

명도회와 「주교요지」

 

명도회는 입회 과정과 절차 및 회원 관리가 대단히 엄격했고, 교육의 시스템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간과치 못할 점은 대부분의 회원이 여성이고 하층민이었던 만큼 명도회 회원들에 대한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장착했느냐의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초대 명도회장 정약종과 그가 집필한 교리서 「주교요지」에 눈길이 간다. 정약종은 이 책의 원고를 언제 탈고했을까? 정약종은 아버지 정재원과 신앙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1791년 마재를 떠나 광주 분원 쪽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정약종의 분원 집은 1798년과 1799년 서울을 벗어나 지내던 주문모 신부가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1799년 정약종이 서울 문영인의 집에 두 달간 머물러 있을 때에도 명도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것이다.

 

일반 신자나 비신자를 대상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전하려면, 기준으로 삼을만한 쉽게 쓴 한글 교리서가 무엇보다 요긴했다. 「주교요지」는 아주 쉬운 문답체의 한글 저술이어서 주문모 신부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 같다. 「황사영 백서」에서는, “일찍이 교우 중의 어리석은 자를 위해 동국의 한글로 「주교요지」 2권을 지었다. 성교(聖敎)의 여러 책에서 널리 채록하여 자기의 견해를 보태 지극히 명백하게 하기에 힘썼다.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이 또한 능히 책을 펴면 분명하게 알아서 하나도 의심을 품을 곳이 없었다. 본국 실정에 꼭 맞기가 「성세추요(盛世芻)」 보다 더 나았으므로, 신부가 이를 인가하였다”고 썼다.

 

책을 지은 때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명도회가 설립되던 시점에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보고 중국 선교사 풍병정(馮秉正, 1669∼1748)이 쓴 교리서 「성세추요」보다 더 낫다고 인가했고, 이를 토대로 정약종을 명도회 회장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에 고무된 정약종은 이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김건순 요사팟과 함께 서학서의 요점을 종합적으로 간추린 「성교전서(聖敎全書)」의 대기획을 야심 차게 진행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 작업은 절반이 채 못 끝난 상태에서 신유박해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바람에 미완의 기획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는 형제인 정약전, 정약용과 이승훈 등 초기 교회의 핵심 집행부들이 속속 이탈한 상황이었다. 당시 총회장으로 교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최창현이 가장 높여 우러르는 사람으로 정약종을 꼽았으리만치 그는 교계 내부의 신망이 높았다. 정약종은 1799년 교회를 대표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직접 작성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정약종이 작성한 편지는 이존창의 지시에 따라 김유산을 통해 북경 교회에 전달되었고, 답장까지 받았다.

 

 

이경언이 명도회원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1801년의 신유박해는 명도회 회장단과 각처 지회를 이끌던 열성 회원 그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그래도 명도회의 명맥과 전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경언(1792∼1827) 바오로는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막냇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에는 고작 9세의 어린이였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1827년 정해 박해 당시 복자 이경언이 옥중에서 명도회 회원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사형당해 죽기 며칠 전인 5월 25일 옥중에서 쓴 편지다. 달레는 이 편지를 소개하면서, “죽기 며칠 전 이경언 바오로가 명도회 회원들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는데, 이 명도회라는 것은 천주교 활동을 위한 단체로서 그 중요한 회원 중의 하나였고, 어쩌면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편지의 서두에서 이경언은 “36년이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중죄인인 나는 천주와 동정 성모 마리아께 버림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한 큰 은혜로 부름을 받았으니 이것은 나를 우리 회에 받아들이신 다음 가장 큰 은총을 쏟아주시는 우리 대주보, 죄 없이 모태에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은혜임을 의심치 않습니다”로 시작된다.

 

이어 그는 명도회 모든 회원들의 열성과 공로를 말하며, 자신이 명도회 회원으로 입회하고 활동했던 시간들을 성모 마리아의 은총으로 돌렸다. 천주의 섭리로 조선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어 몇몇 식구를 겨우 모아 놓았는데, 모진 비바람에 그 집이 다 쓰러지게 된 현재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이 집이 잘 보존되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경언은 또 두 회장과 각지의 회장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또 자기 집에 가면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당시 이경언이 명도회에서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회원의 보명단이나 각처의 활동 상황에 대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두 회장이라 함은 본부 육회의 회장 중 두 사람을 지칭한 것일 테고, 각 지역별로도 따로 분회 회장이 있었음도 보여준다.

 

또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에는 “북경 주교가 교리를 지도할 남녀 몇 명을 뽑으라는 지시에, 이경언은 그들을 양성하고자 매달 첫 번째 주일, 집에 모이게 한 뒤 그들에게 묵상 자료를 나눠주며 참된 신심을 기르도록 격려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대목은 이경언 바오로가 당시 명도회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매달 첫 번째 주일은 앞서 살핀 대로 명도회의 정기 집회일이었다. 1827년 당시 이경언은 명도회 총추회장의 직분을 맡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경언은 성인 현석문 가롤로와의 깊은 우정에 대해서도 편지에서 특별히 언급했다. 그는 황사영이 말한 명도회 육회 중 한 곳을 맡았던 현계흠의 아들이었다. 현석문 또한 아버지를 이어 명도회의 핵심에서 이경언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레는 이경언을 조선 천주교회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한 사람으로 기렸다.

 

 

여성이 주축이 된 명도회 활동

 

마지막으로 명도회 활동과 관련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황사영은 당시 명도회 회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고 썼다. 그러고 보면 앞서 본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 등 사학 매파 3인방이 다녔던 여러 집들은 모두 명도회의 활동과 관련된 모임 때문이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한신애가 자기 집 여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려고 이합규 등을 초청해 자리를 마련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조선 교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특별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들로 입교한 사람이 자못 많았다. 국법에 역적이 아닐 경우 형벌이 사족(士族)의 부녀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금지하는 명령을 염려하지 않았다. 신부 또한 여기에 기대어 널리 포교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해서 이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래서 교우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에게로 돌아갔다.”

 

양반의 부녀자에게는 대역부도의 죄가 아니고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 국법이 사대부가 여성들이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었고, 주문모 신부도 이 점을 적극 활용해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어 교회에서 여성 신자의 확산세가 특별히 명도회 창립 이후로 가파른 상승세를 띠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명도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명도회는 1800년 4월에 설립되어 1년도 안 되는 기간 활동하다가 신유박해로 궤멸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이후로도 활동이 이어져서 신부가 없는 조선 교회가 그 빛을 유지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명도회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때 존재했던 신심 단체의 하나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명도회는 신부가 없었던 암흑기 조선 천주교회 그 자체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7월 18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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