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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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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07 ㅣ No.671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 (상)


예수 강생의 신비 세상에서 실현

 

 

- 아이들과 함께한 성가 소비녀회 설립자 성재덕 신부(가운데). 성가 소비녀회 제공.

 

 

예수 강생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여종들이 있다. 성가 소비녀회의 시작은 하느님의 내려오심, 그분의 강생에서 비롯한다.

 

사람들 한가운데 천막을 치신 하느님, 그 삶을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느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부서지고 상처 난 당신 백성의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자 하신다. 그 하느님의 강생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는 것이 성가 소비녀회의 존재 이유이다.

 

성가 소비녀회는 1943년 12월 25일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성재덕 신부(Singer Pierre)에 의해 설립됐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1935년 사제품을 받은 성 신부는 같은 해에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어 1939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한국도 일제강점 하에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성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할 수도회가 너무 적은 현실에도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여성들을 불러 “여러분이 혼자 지내면 위험하기도 하고 어렵게 일을 해도 큰 결과를 거두기 어려우니 함께 뭉치면 많은 공로를 얻을 수 있고 완전한 수도생활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를 받아들인 두 명의 여성이 성재덕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혜화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순명을 약속했다. 1943년 12월 25일, 주님 강생의 밤이었다. 성가 소비녀회는 이렇게 설립됐다.

 

설립자는 성가 소비녀회를 세우면서 기존 수도회와 다른 ‘전문화된 수도회’라는 표현을 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온갖 형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할 수도회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본당 안에 머물면서 교우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아닌 직접 전선에 나설 수 있는 일꾼, 가장 불행한 사태를 맞이한 사람들, 생사를 다투는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초창기에 오늘날의 사도직 형태로 첫 공식 파견된 곳은 1947년 충남 합덕성당의 보육원과 수원 북수동성당이었다. 이때 성 신부는 소비녀들을 파견하면서 생활비는 스스로 벌도록 했다. 실제로 소비녀들은 본당의 가장 뒷자리를 지키면서 교회의 발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먼 길을 걸어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불편한 상황일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의 사도직은 2개월 만에 철수했다.

 

그 후에 정식으로 서울의 몇몇 본당에 전교 수녀로 소비녀들이 파견됐다. 이들의 정신은 분명했다. 본당 사도직은 2차적인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도록 하고 본당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도록 했다. 때문에 본당 사도직 수녀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을 함께 해야만 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 성가 소비녀회 회원들 안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성가 소비녀는 설립자 성 신부처럼 벼랑 끝에 서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여종이다. 이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맞닿아 있는 강생의 소명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7월 4일, 박민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 (중)


더욱 낮고 절박한 곳으로 내려가다

 

 

- 필리핀 빠라나케(Paranaque-공동묘지 지역) 공동체로 파견된 성가소비녀회 수녀가 가정방문을 하고 있다. 성가 소비녀회 제공.

 

 

성가 소비녀회는 강생의 길 위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43년 2명의 소비녀가 시작했던 공동생활은 차츰 회원이 늘어나면서 현 교리신학원 자리인 혜화동 36-1번지로 집을 옮기고 1945년에 본격 수련이 시작됐다. 1949년 수도회 회칙서가 교황청 인가를 받음으로써 정식 수도회로 자리를 잡았다. 작고 가난한 소비녀들의 삶을 축복하듯 입회자 수는 늘어나 1968년 정릉동 10번지에 본원 건물을 신축하고 지금까지 성가 소비녀의 모태가 되고 있다.

 

시대의 절박함과 인간의 고통을 읽고, 특별히 가장 가난하고 긴박한 사람들의 현장 속으로 뛰어내리시는 하느님의 강생을 이어가기 위해 성가 소비녀회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한다.

 

남이 싫어하는 일, 하지 않는 일, 힘들고 궂은일을 찾아서 할 것을 독려한 설립자 성재덕 신부를 따라 사도직 우선순위의 명확한 기준을 세칙에 명시하기도 했다. 소비녀들의 사도직 우선순위는 언제나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돌봄과 헌신이다.

 

소비녀들은 설립 당시부터 좁은 집에 무의무탁한 노인들, 버려진 아기들을 보살피며 함께 살았다. 1950년대에는 6·25전쟁 여파로 발생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보육원과 전쟁미망인들의 자립과 여성 자활을 위한 기술학원, 양재소 등을 세우고 부상병을 간호했다. 피란으로 대구, 부산, 제주 등에 흩어져서도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고아와 부상병, 포로들을 보살폈다.

 

이후 교회의 요청에 따라 본당 사도직 파견이 점차 늘어났고, 수도회가 직접 경영, 관리하는 제도화된 사도직 신설도 가속화됐다. 기관과 시설을 운영하더라도 정신만큼은 초창기의 소비녀들이 지녔던 사도직 방식과 태도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특히 가난한 가정 방문, 거리의 빈자들에 대한 돌봄과 전교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수도원 안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방식을 유지하고자 본원에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모시는 안나의 집을 설립했다.

 

1980년대부터 강생의 길은 해외로 나아갔다. 미국 필라델피아, 아르헨티나 한인 성당의 교포 사목에서 시작된 해외 사도직은 보다 더 절박한 곳, 더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 직접적인 선교 활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선교지의 현실 한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며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또다시 더 절박한 곳을 찾아 내려가는 강생의 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수도회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식별로 대형 기관 사도직을 탈피하고 기존의 사업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서울성가병원의 성가복지병원으로의 전환과 소명여중고와 부천성가병원 무상양도가 이뤄졌다.

 

주님의 영이 다그치는 절박한 곳으로의 움직임은 서울의 대형 본당 사도직 식별과 철수로 이어졌다. 본당에서 무조건 철수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교구 내 신자 비율이 가장 낮고 이주민과 조손 가족이 많은 지역이라든지 물질적, 정신적 빈곤이 있는 곳에 수도자들을 우선 파견해 본당을 거점으로 신자 생활 돌봄과 지역민 돌봄을 병행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7월 11일, 박민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하)


시대 아픔 읽고 그 속에서 활동

 

 

-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하느님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종신서약을 하고 있다. 성가 소비녀회 제공.

 

 

창립 이후 절대적인 가난에 대한 긴급한 요청에 응답해온 성가 소비녀회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대적인 가난과 정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시대적, 사회적 요청이 높아진 이주민과 북한이탈주민 사도직에 손을 내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공부방 개설, 가난한 지역 안으로 들어가 공동체 삶을 증거하는 등 현장성이 강화된 사도직을 수행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동참했으며,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기 시작했다. 새만금 갯벌, 4대강 사업,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등 다양한 시대 현안을 마주하면서 개인과 공동체가 생명을 살리고 정의를 구현하는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연평도 평화지킴이, 제주 강정 평화지킴이로 파견돼 치열한 현장과 함께하기도 했고,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안산 지역민들과 함께 살며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원에도 나섰다.

 

21세기의 성가 소비녀회는 많은 도전과 변화 앞에 서 있다. 성가 소비녀회는 제17차 총회에서 ‘부서지고 상처 난 내 백성을 회복하여라’를 주제로 시대의 아픔을 읽고 이 아픔 속으로 어떻게 강생해야 할지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 결과 ‘통합생태적 삶으로 대전환한다’고 결의했다. 통합생태는 공동의 원천을 가지고 서로 연결돼있는 모든 생명, 모든 사물을 포괄하는 생태로서, 우주에 존재하는 어느 한 생명도 소외됨 없이 창조의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활동이다. 이를 위해 개인의 회심, 자연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경제·정치 등 이 세계 모든 영역의 회복을 촉구한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땅의 회복과 생명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자연농법으로 농사짓기, 토종씨앗 지키기, 생태적 삶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 공동체를 꾸려 생명의 가치와 지속가능성, 하느님 창조보전에 투신하고 있다. 시흥, 양주, 배론, 용문 등에 생태공동체 터를 잡고 있다. 성가 소비녀회는 도시 안에서도 생태공동체의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모든 공동체 삶의 양식에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어느 특정 사도직을 생태사도직으로 떼어놓기보다 교육, 의료, 복지, 선교 등 각 영역에서 강생이라는 설립 정신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오늘날 확장된 통합생태론적 관점에서 구현해 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 한복판에서 급박하게 들려오는 온 우주의 울부짖음에 설립자의 마음으로 귀 기울이며 소비녀들은 새로운 강생을 시작하고 있다. 가난이 더 깊은 가난으로 몰려가고 소외됨이 더 큰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이 시대에 각자도생이 아닌 모두가 함께 생명을 회복시키는 길에 합류하도록 초대하는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가 소비녀회는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을 한 어버이의 한 가족으로 품고 살리는 우주적 성가정을 꿈꾸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연대의 그물망을 넓혀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7월 18일, 박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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