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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4: 김대건 부제, 돌우물골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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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1-17 ㅣ No.2053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34) 김대건 부제, 돌우물골에 머물다


김대건 부제, 한양 중심지에 머물며 집 한 채 따로 마련

 

 

-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4월 30일까지 소공동 돌우물골(石井洞)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에서 생활했다. 만 106일이라는 꽤 긴 시간을 김대건 부제는 이 집에 기거했다. 사진은 오늘날 환구단과 조선호텔 전경.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4월 30일까지 소공동 돌우물골(石井洞)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에서 생활했다. 만 106일이라는 꽤 긴 시간을 김대건 부제는 이 집에 기거했다.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한성지도 「수선전도」는 남별궁 옆을 돌우물골로 표시하고 있다. 남별궁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 공주가 시집가서 살던 집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불렀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을 쫓아내고 이곳에 살면서 ‘남별궁’(南別宮)이라 했다. 고종은 1897년 이곳에 환구단을 짓고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했다.

 

 

김대건 부제가 기거한 초가

 

소공동 남별궁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는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이다. 교회사학자 차기진(루카) 박사가 2005년 고증한 바 있다. 이 집은 19세기 말까지 42년간 조선 교회의 재산으로 유지됐다. 뮈텔 신부는 이 집에서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5년 1월부터 1886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기해(1839년)ㆍ병오(1846년)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재판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유서 깊은 소공동 돌우물골 김대건 신부의 집은 1887년 종현성당(현 주교좌 명동대성당) 대지 매입 때 자금난으로 팔렸다.

 

그럼, 소공동 돌우물골 이 집은 누가 무슨 이유로 매입했을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3월 27일 한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양에 도착해 신자들이 마련해 둔 집에 들어갔습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가롤로(현석문)를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 한 채와 배 한 척을 샀는데, 그 값이 은 146냥이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김대건은 또 체포된 후 포도청 6번째 공초에서 “계묘년(1843년) 11월에 몰래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해 서울 사는 이가(이의창)를 탄막에서 만나 길동무 삼아 상경했습니다. 그런데 이가가 본래 집이 없었으므로 제가 가지고 있던 은자로 석정동(돌우물골)에 집을 샀으며, 저 또한 그곳에 거처하면서 입고 먹은 지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일성록」 병오 5월 30일 <1846년 6월 23일>)

 

이를 근거로 두 가지 경우를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조선 신자들이 선교 자금을 미리 받아 김대건 부제가 오기 전에 돌우물골 집을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김대건이 신학생 시절 1842년 12월 말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때, 또는 1844년 3월 8일 경원에서 조선 신자와 만났을 때, 이것도 아니면 페레올 주교가 1844년 1월 20일 심양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때 집을 매입할 선교 자금을 줬을 것이다. 이 주장에 무게를 둔다면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김 프란치스코에게 자신의 거처를 한양에 미리 마련해 두라고 주택 매입 자금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이 만남에서 김 프란치스코는 페레올 주교에게 1844년 12월에 조선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 김대건 부제가 생활했던 소공동 돌우물골 남별궁 인근. 그림은 18세기 한양 지도.

 

 

둘째,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 도착한 후 현석문이 충청도 해안가에 집을 매입하지 못한 돈으로 돌우물골에 집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따르면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한 후 신자들 집에서 생활하다 자신이 가져온 은자로 돌우물골 집을 매입하고, 이의창(베난시오)에게 주인 행세를 하게 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한국천주교회사」 3권은 두 번째 경우를 따른다. “페레올 주교와 선교사들을 영입할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하였다. 그(김대건)는 서울 석정동(돌우물골)에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을 마련하였고, 상해에 있는 자신을 맞이하러 오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배 한 척도 구입하였다.”(123쪽) 차기진 박사도 “김대건 부제는 우선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거처하면서 가지고 온 은화로 돌우물골에 새로 집을 매입하여 복사 이의창에게 살면서 돌보도록 하였다”(「최양업 김대건 신부 연구」 378쪽)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맞다고 보면 어떨까.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김대건 신부의 글과 진술에 근거한다. 행간을 읽어보자.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해 신자들이 ‘마련해둔’ 돌우물골 집에 갔다. 특정 신자의 집이 아니라 신자들이 마련해둔 집이다. 그다음은 충청도 해안가에 집을 마련하지 못해 ‘그 돈으로’ 서울에 집 한 채를 샀다. 현석문은 왜 충청도 해안까지 내려가서 집을 구하지 못했을까? 김대건 부제는 이를 “실패했다”고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했지만, 현석문이 판단했을 때 굳이 많은 돈을 쓰면서 해안가에 집을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현석문은 은진(강경)에 사는 객주 구순오를 잘 알고 있었다. 신자인 그는 중국 은전을 녹여 조선 은전으로 만드는 기술도 갖고 있었다. 제법 부자여서 여러 명이 거주할 수 있을 만큼 집도 넓었다. 김대건 부제도 한양에 거처하면서 교류해 구순오를 잘 알고 있었다. 훗날 김대건 일행이 라파엘호를 타고 강경에 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비밀 통로로 연결된 집의 비밀

 

김대건 부제의 글과 진술의 행간을 유추한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먼저,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가 1844년 1월 20일 심양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선교 자금을 받고 귀국해 한양 돌우물골에 주교 거처로 집 한 채를 매입해 이의창이 관리했다. 이의창은 이기양의 손자이며 이방억의 차남이자 정약용의 삼촌 정학원의 사위다. 믿을만한 신자 집안 양반 자손에게 주교의 집을 맡긴 것이다.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한 후 돌우물골 이의창의 집에 곧바로 기거한다. 그러면서 충청도 해안가에 마련하기로 한 집을 사지 않고 남은 돈으로 돌우물골에 또 한 채의 집을 사서 페레올 주교의 거처를 마련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첫째, 김대건 신부는 이 집에 이의창뿐 아니라 현석문과 이재의(토마스)가 항상 머물렀다. 현석문은 당시 교회 최고 평신도 지도자였다. 이재의는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경험으로 페레올 주교를 곁에서 도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선주 임성룡은 이 집에서 백동 이가, 남대문에 사는 남경문(세바스티아노), 서강의 심사민, 덕산 사람 김순여 등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돌우물골 집에 서울과 지방의 지도자급 신자들이 모여든 것을 보면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페레올 주교가 거처했을 정황이 높다.

 

둘째, 돌우물골 이의창 집에는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 오 바르바라 등 다섯 명의 여교우들이 상주했다. 김 신부 혼자 이 집에 살았다면 이렇게 많은 여교우들이 상주할 이유가 없다. 가까이에 페레올 주교가 함께 거주했기에 그를 수발할 식복사와 여교우들과 연락을 취할 다수의 여성 신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집에 전례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는 점이다. 임성룡은 “김대건 신부가 불러 내실에 들어가니 벽면에 4~5개 인물 족자가 걸려 있는데 모두 당화(중국 그림)였고, 기묘한 모양을 한 이상한 돌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성인화와 성상을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넷째, 한양 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페레올 주교는 1845년 12월 27일 자 편지에서 “서울에 사는 신자들은 대부분 신자가 아닌 친척이나 친구들과 섞여서 살기 때문에 사제는 그들이 사는 집에 출입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따라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한 집이 아니면 출입이 자유로운 아주 가까이에 거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김대건 신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신자들은 모두 이의창의 집을 “신부댁”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페레올 주교 집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여섯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선교 자금으로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항덕 신부에게 한양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라고 선교자금을 줬고, 여 신부는 후동에 집을 마련했다. 이 집에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가 생활했다.

 

일곱째, 박해 시기 신자들, 특히 인구가 밀접한 한양의 신자들은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담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 집, 또는 옆집에 연이어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몇 집을 얼려 한 구역을 차지해 외부 시선을 피했고, 서로 연결된 비밀 통로를 만들어 비상시 급히 피신했다.

 

페레올 주교의 선교 자금으로 마련한 돌우물골 집과 김대건 부제가 산 또 한 채의 집은 서로 연결된 집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순전히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음 호에는 김대건 부제가 돌우물골 집에서 100일 넘게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월 1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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