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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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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18 ㅣ No.299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8) 고해성사 ①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에페 2,1)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은 하느님 안에서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지닌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를 통해서 받은 그 은총의 상태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살아가기에 인간은 여전히 죄의 유혹 앞에 흔들리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성사를 통해 좀 더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리라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순간을 모면하고자 하는 마음에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따라서 세례성사를 통해 주어진 새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간직하고 충실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살피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회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회개의 노력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매우 중요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해성사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호소와 죄 때문에 떠나 있던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옴을 성사적으로 실현하므로 회개의 성사라고 불립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23항)

 

회개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믿고 생활을 바꾸겠다는 의향과 결심을 포함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31항) 그러나 고해성사가 지니는 이러한 “회개”의 의미를 어렵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회개를 받아들이기에 스스로 지닌 부족함과 나약함이 너무 크다는 것이 그 어려움과 부담스러움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회개”한다는 것, 곧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서 세례성사 때 받은 은총을 잃어버리고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아버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따라서, 회개는 자신의 능력과 결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디고 완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회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32항)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회개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마음 아파하는 어려움도 겪겠지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으로 복된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 2,5) [2019년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29) 고해성사 ②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 20)

 

 

고해성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 또한 고해성사의 의미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고해성사를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적인 이해는 고해성사에 대한 불편함과 부담감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죄를 성찰하거나 반성하려는 노력을 외면하는 경우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통해 얻게 되는 용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을 알게 됨으로써 죄의 두려움과 무게 때문에 떨게 되고, 죄를 지어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32항)

 

따라서 고해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용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또 다른 ‘마음의 빚’을 남겨두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온전한 화해와 죄로 인해 단절된 당신과의 친교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화해와 친교를 이루는 주체가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아나서는 목자의 마음으로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보이신 것 또한 바로 그러한 적극적인 용서와 친교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죄를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이 용서의 결과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 때문에 멀어졌거나 추방되었던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명백한 표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시고, 더구나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용서와,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돌아오는 복귀를 동시에 표현하는 놀라운 행위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43항)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19~20)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0) 고해성사 ③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 21)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 관계가 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질 수 없고, 그 회복을 위한 간절함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를 위해 필요한 몸과 마음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죄인은 회개하기 위하여 기꺼이 다음과 같은 참회의 행위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통회가, 입에는 고백이, 행위에는 온전한 겸손과 유효한 보속이 있어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50항)

 

고해성사를 위한 준비단계에서 먼저 요구되는 것은 “양심성찰”과 “통회”입니다. 양심성찰을 통해서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자신이 죄로 인해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는가를 깨닫는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그 ‘참회의 시작점’에조차 서지 못한다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은 시작될 수도 없습니다.

 

“통회는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51항)

 

죄로 인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면 이제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굳은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 결심의 단계를 “정개(定改)”라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들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죄의 고백”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고백을 통해 자신의 죄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결심을 되새기는 매우 책임감 있는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끊어버리기로 한 굳은 결심이야말로 죄를 고백하는데 있어서 큰 용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로써 마침내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합니다. (…) 이러한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부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59항)

 

보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희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의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속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닮도록 도와주며,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화해하는 고해성사는 참된 영적 부활과 하느님 자녀로서 지니는 품위와 삶의 선익을 회복시켜 주며,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인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8항) [2019년 4월 2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1) 고해성사 ④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8)

 

 

사제 역시 별다를 것이 없는 인간인데도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고해성사에 있어서 신자들이 갖는 의문 혹은 의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고해성사의 집전자인 사제는 자신의 능력으로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해사제는 하느님의 용서를 마음대로 다루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이 성사의 집전자는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에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해사제는 진리를 사랑하고 교회의 교도권에 충실해야 하며, 고백하는 사람을 치유와 완전한 성숙으로 인내로이 인도해야 합니다. 그는 고백자를 자비로우신 주님께 맡겨 드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6항)

 

신자들의 죄를 듣는 것은 특별한 권한이나 권리라기보다는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아파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고 회개의 길에 동행하며 신자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도록 이끄는 복된 멍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복된 이유는 하느님께서 전하는 용서의 은총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멍에인 이유는 죄인으로서 겪는 인간적인 후회와 아픔을 함께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라는 말씀으로 맡기신 그 열쇠의 권한은 스스로 용서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충실하고 성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행할 때 사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상처를 싸매 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탕자를 기다리다 맞아들이는 아버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고 자비로운 판결을 내리는 의로운 재판관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사제는 죄인에 대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도구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5항)

 

그러므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는 사제의 사죄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시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이며, 이를 전해 듣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7~18) [2019년 5월 5일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32) 고해성사 ⑤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 때문에 멀어졌거나 추방되었던 그들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명백한 표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하시고, 더구나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셨다는 사실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43항)

 

예수님께 용서 받은 죄인들이 다시 돌아간 곳은 바로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회개하고 돌아온 이를 받아들여주는 공동체였고, 그가 받은 용서의 기쁨과 감사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죄의 속박에서 풀려난 이들은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잃었던 하느님과의 친교, 그리고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하였음을 몸소 체험하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용서받은 이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은 그가 속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의 은총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여야 하고, 회개하여 돌아온 이를 사랑과 용서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마음은 다시 닫히고 굳어져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게 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840항)

 

고해성사의 은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야말로 그 은총을 세상에 증거하고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용서 받은 체험은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지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를 용서하기에 이릅니다. 기도하는 제자는 변화되어 스승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844항)

 

이처럼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서함으로써 그 은총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성사적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용기와 용서와 사랑을 통해 세상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2019년 5월 1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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