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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18: 최양업 신부 가족들이 살았던 수리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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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5-10 ㅣ No.2080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8) 최양업 신부 가족들이 살았던 수리산성지


복음적 희망으로 살았던 교우촌이자 성소 못자리

 

 

- 수리산성지에 있는 최경환 성인의 묘.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수리산성지. 이곳은 최양업의 부친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일가가 이주함으로써 교우촌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곳에서 최양업의 가족들은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복음적 희망을 잃지 않았다. 최경환은 확고한 신앙과 복음 정신으로 수리산 교우촌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다 참혹한 옥중생활 끝에 순교했다. 그의 아내 복자 이성례(마리아)도 남편과 함께 죽음에 맞서는 신앙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수리산성지에서 선조들의 신앙심을 느껴본다.

 

 

복음의 기쁨과 희망이 숨 쉬는 교우촌

 

최경환 일가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고향을 떠나 1837~1838년경 이곳에 이주하게 된다. 최경환은 교우촌 회장으로서 신자들과 함께 담배를 재배하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담배촌’이라고도 불린다. 최경환은 열렬한 선교 활동으로 교우촌 공동체를 이끌며 신앙의 터전을 이뤘다.

 

특히 최경환의 이웃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참 본보기가 되고 있다. 최양업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는 최경환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 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최경환은 신자들과 함께 상경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했으며 다시 수리산으로 내려와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7월 31일 최경환 일가와 이 에메렌시오 등 40여 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당시 수리산에는 60여 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깊은 신앙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체포되는 순간에도 복음적 기쁨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최경환은 포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최양업은 같은 서한에서 “이를 본 포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며 ‘이런 사람들이 달아날 염려는 조금도 없다’며 포승줄도 묶지 않고 잠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동안 신자들은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했고, 최경환은 모든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이성례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리기도 했다.

 

수리산성지 성당 앞 최경환·이성례 비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순교로 증거한 신앙

 

이들은 체포돼 투옥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았다. 최경환은 아들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유학 갔다는 이유만으로 더 극심한 형벌을 받았다. 최경환은 40일 이상의 참혹한 고문 속에 110여 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했다. 굳건한 태도에 외교인들조차 천주 신앙을 찬미하게 했던 그는 9월 12일 포청옥에서 순교했다.

 

이성례도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6명의 신자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최경환의 유해는 순교 후 여러 번 장소가 옮겨지는 어려움 끝에 둘째 형 최영겸 부자가 수리산에 안장했다. 묘역에는 후손들이 기증한 손뼈 5기가 봉안돼 있으며 묘역 십자가 중앙에 손마디가 안치돼 있다. 순례자성당과 최경환 성인 생가 성당에도 유해가 모셔졌다. 1984년 성인의 시성식에 즈음해 묘역에 순교기념비가 건립됐다.

 

 

성가정의 모범, 성소의 못자리

 

수리산성지는 최경환의 가족과 이웃들이 복음적 기쁨과 희망으로 살았던 교우촌이자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사제의 길을 시작한 한국교회 성소의 요람이기도 하다.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모두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잡혀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뜨거운 믿음의 산실이다.

 

이러한 최경환 가족의 영성을 본받아 수리산성지는 특별히 성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아울러 개인 성화 및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 못자리였던 것을 되새겨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지로 가꿔지고 있다. 또한 성인기념경당과 순교자박물관, 짜임새 있는 홍보관을 통해 누구라도 성지를 방문해 신앙적 가치의 고귀함을 접할 수 있는 문화사적지 역할을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8일, 박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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