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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칼럼: 크루엘라 - 복수는 더 큰 악을 낳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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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23 ㅣ No.1268

[영화 칼럼] 영화 ‘크루엘라’ - 2021년 감독 크레이그 질레피


복수는 더 큰 악을 낳을 뿐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많고,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용서’란 말을 되뇝니다. 기도 중에도 빼놓지 않지요. 용서는 주님의 소중한 가르침이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죽음 앞에서도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일흔 번은 고사하고, 일곱 번도 말입니다.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상처와 억울함,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있곤 합니다. 용서가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조건을 붙입니다. “당신이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그러니 어떻게 조금의 죄의식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는 사람까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복수가 훨씬 강렬하고 효과적이고 후련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당한 만큼의 상처와 고통을 되돌려줌으로써 후회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복수심은 참회의 간절한 갈구의 표현이다.’라고까지 합리화 할 수도 있죠.

 

<크루엘라>에서 크루엘라(엠마 스톤 분)는 그래서 복수에 당당합니다. 악을 응징하기 위해 악을 거리낌 없이 저지릅니다. 그 대상이 친모(親母)여도 조금의 갈등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양모(養母)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고는 “나는 착한 크루엘라가 될 수 없다. 주님의 계획이 그렇다.”고 외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끝내고는 더 강력하고 당당한 악녀로 남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악은 대부분 섬뜩하고 흉측하고 우울하고 어둡습니다. 악에 대한 두려움, 배타성, 부정적 심리를 반영한 것이지요. 이 영화에서 크루엘라의 친모인 남작 부인의 오만하고, 괴팍하고, 악랄한 모습이나 <배트맨>에서 캣우먼의 기괴하고 사악한 이미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루엘라는 다릅니다. 빼어난 미모에 패션 디자이너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매력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 이미지가 그녀의 악에 너그러움을 갖게 만듭니다. 게다가 영화의 화려한 시청각적 연출, 매끄러운 이야기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유머 감각이 그녀의 복수에 대한 쾌감을 크게 합니다.

 

원작인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한 크루엘라의 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면서 <크루엘라>는 그녀의 악이 ‘태생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악을 억누르고 살려 했지만, 세상이 폭발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어둠 속에 숨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지죠. 그리하여 악이 마치 선인 양 행동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상처가 원인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악이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복수와 선을 위한 악도 악이며, 더 큰 악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착한 사람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주님의 계획에 “나는 착한 크루엘라가 될 수 없다.” 역시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음에 만나는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악과 세상의 다른 악을 용서하고 치유하는 ‘에스텔라’이면 좋겠습니다. 머리 색깔이 전부 검은색으로 섬뜩하게 변하지 않기를 빕니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나올 테니까요.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용서 역시 진화된 인간의 본성”이라고까지 했습니다.

 

[2021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서울주보 4면,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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