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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내 마음속의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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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17 ㅣ No.1846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내 마음속의 대나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피조물들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을 더 잘 이해하면 관상이 더 완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들을 잘 알고 만날수록 하느님을 더 깊게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찬미받으소서』 233항)

 

몇 년 전 한 대학교에서 통합생태론을 강의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화분 식물을 준비해서 동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가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도 화분을 마련하지 않은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학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식물을 동반해 보라는 과제만 주고 그 과정에서 겪은 체험을 나누지 않으면 일회성 행사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식물을 동반해 보자고 하지 키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키우라 하면 식물이 죽을 경우 실패한 것이 되지만 동반할 경우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과정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 학생이 체험한 것은 잘 자라게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의미와는 또 다른 형태로 깊은 깨달음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워 줄 가능성이 큽니다.

 

통합생태론 강의를 해 가는 동안 학생들이 식물을 동반하면서 체험한 일을 함께 나눌 기회를 마련하고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학생은 자기는 아직 식물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대나무를 키우고 싶은데, 화분에는 키우기 어렵고, 성당 마당에 키우고 싶은데 신부님의 허락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학기 중반이 넘어서 중간 리포트로 자기가 동반하는 식물에 대해서 체험한 것을 쓰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기간이 훨씬 지나도록 쓰지 못하였습니다. 학기 4분의 3이 지났을 때 쯤 하루는 이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화분 식물을 동반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써 보세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 다음 다음 주 수업 때 쉬는 시간에 이 학생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써서 보냈다고요. 늦게 보내서 죄송하다고요.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괜찮으니까요. 학생이 선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을 위해서 있는 거니까요.

 

이 학생이 나가고 쉬는 시간 동안 얼른 메일을 열어서 보낸 글을 보았습니다. 보면서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수업을 시작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식물을 동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선생님께로부터 식물동반의 과제가 주어졌을 때 솔직히 키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키워 봤던 식물이 모두 저의 무관심으로 인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식물

 

이 죽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른 생명체를 위해 자신이 훌륭한 양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식물 그 자체로서의 생이 제 부주의와 냉혈한 태도로 인해 끝나게 될 것이라는 부분이 고려되어 식물을 동반한다는 것은 저의 작은 방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학생이 식물을 동반하지 못한 데에는 이렇게 큰 이유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한 명으로서” 교사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자세로 식물과 동반하는 삶을 감행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이 학생은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식물과 함께 삶을 여행해 볼지 고민했습니다. 인터넷에 간단하게 키울 수 있는 꽃을 검색하고 산책을 하며 풍광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 밖 산책로에 위치한 작은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나무 숲은 저에게 작고 아름다운 섬처럼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초록빛깔의 대나무를 유심히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대나무를 키우겠노라고.”

 

그리고는 인터넷에서 “대나무”를 검색해서 “대나무의 특징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찾아봤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우는 방법이 복잡하고 종류도 꽤 여럿이어서 여러 블로그를 보고 또 봤습니다. 그 중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대나무를 키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었습니다. 대개의 식물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환경에 적응을 해서 생을 연장합니다. 이에 반해 대나무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나무를 키우고자 하는 사람이 대나무의 절개와 기개에 순응하여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사람에 의해 키워지는 대나무의 생명의 주권은 대나무를 키우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나무를 다스릴 수 있는 인간이 대나무에게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인내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학생은 대나무의 특성상 이렇게 키우기가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다가 이 학생의 표현대로 “문득”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대나무를 위하여 자신과 그 환경을 바꾸고 사랑으로 양육”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낮춤과 비움으로 사람이 되시어 나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랑과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대나무를 매개로 하느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신 이 강생의 신비를 해독하여 체화하는 기회를 선물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제 마음 속에 굳게 자리한 대나무에 대한 생각은 다른 식물을 키우고자 하는 다짐을 할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대나무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깊어져서 다른 식물을 선택할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대나무를 키워 보려는 생각으로 키울 방법을 알아보고 또 알아보는 과정에서 화분에서는 혹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학생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나무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재독하다보니 제가 대나무를 키울 수 있다는 희망보다 키울 수 없다는 절망이 우후죽순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래도 이 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시도를 해보게 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미를 들고 대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괜한 생명을 해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관두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지켜 주는 거잖아요. 그리하여 이 학생은 자기의 마음속에 대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음속에서만 대나무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대나무가 이번 학기까지 제 마음속에만 자리할 것 같아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죄송한 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대나무를 알게 해주셔서, 보이는 하느님의 선물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선물을알게 해주셔서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나뭇잎, 길, 이슬, 가난한 이의 얼굴에 신비가 담겨 있다.”(『찬미받으소서』 233 항)고 하셨는데요, 교황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으로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다리 역할을 해줍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렇게 아름답고 깊은 마음을 가진 학생이 키우고 있는 저 “마음속 대나무”가 보이시는지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자연물로 천둥과 불을 선택하셨던 자매님 이야기 기억하시는지요? 자매님은 처음에는 천둥과 불이 꺼려지고 싫었지만 성찰을 계속해 가면서 이것들이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작용하는 밝은 면을 발견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에게 하느님의 자연이 갖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깨달으면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의 존재의 충만을 새롭게 회복해 가는 축복을 체험하십니다.

 

이 자매님은 어릴 때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일을 기억하셨습니다. 어른들이 “장작을 때며 시골집에 온기를 더하는데” 자매님은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그 불을 보는 것이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자매님은 “불은 참으로 따스한 느낌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은 “따스하고” “정화의 느낌으로 다가온다.”면서 “나의 아픔을 불에 넣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다 태우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서 불과 관련된 일들을 떠올려 가십니다. 마당 한쪽에서 “어릴 때 귀한 편지 같이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버리지 않고 태웠던 일”, 일기장이나 잘못 나온 사진 등”을 소중하게 태웠던 일, “커서는 자신의 잘잘못을 적어서” 기도하며 태우면서 정화의 기회를 마련했던 일 등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면서 “불이 타고 나면 뭔가 생명이 다한 듯 재만 남아서 뒤에 정리할 때면 뭔가 힘이 빠졌던 느낌”을 기억하기도 하십니다. “중고등학생 때는 캠핑 가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친구들과 밤늦도록 노래하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불은 신비롭고 일치시키며 안정된 느낌을 준다.”고 표현하십니다. 또한 여덟 가지 자연물 가운데 가깝게 느끼는 것과 꺼려지는 것을 찾아보는 시도를 통해서 이렇게 풍요롭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기억들을 정화하고 새롭게 관계들을 정화할 기회를 선물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요. 자매님은 “천등과 불을 통해서 창조주께서 자연 안에서 함께하시며” 이루시는 “대자연의 신비 놀라운 신비”를 체험합니다. 그런 가운데 대자연이 “인간을 살리”는 어머니로서 “없어서는 살수 없음을 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큰 지구의 집에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창조된 작은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정말 깊이 사랑하시기에” 자신에게 “영과 육을 주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자매님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대자연 안에서 신비하게 생명을 허락하신 그분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찬미와 감사로 생명을 살아내야 함을 되돌아본다.”고 하셨습니다.

 

불은 옮겨 붙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태가 커지고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불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생명을 돌볼 가능성이 커지고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의 불을 간직할수록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가 만나는 존재를 역동적으로 돌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둥과 불이 만날 때의 괘사는 풍(豊)인데요, 천둥과 불이 만나면 괘는 이렇습니다.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존재들과 이들에게 신음하는 존재들에게 천둥과 번갯불처럼 하느님의 소리와 빛으로 하느님의 소리를 전하고 그들의 불의를 정화하는 하느님의 존재로 산다면,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하느님의 살림을 보다 더 풍요롭게 매개하는 축복을 선물받게 될 것입니다.

 

어떠신지요, 독자 여러분도 여덟 가지 자연물을 매개로 해서 하느님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과 사회 여러 현상을 새롭게 성찰하여 그것들이 하느님의 창조와 생명의 질서 안에서 갖는 의미를 다시 정리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보시면 어떨까요?

 

[월간빛, 2021년 8월호,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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