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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10: 김대건 · 최양업 기도하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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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24 ㅣ No.1980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0) 김대건 · 최양업 기도하다 (하)


하느님 자비 간구하며 순교 고난 기꺼이 받아들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처럼 “교회는 하느님 자비를 외치는 기도를 한시도 잊지 않는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이고,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지만, 위태로운 시기에는 그 기도가 더욱 간절하기 마련이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에게도 그랬다. 하느님 자비를 간절히 바라던 두 신부의 기도를 만나보자.

 

-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죽림굴(울산시 울주군 소재)에서 지난 2006년 11월 8일 ‘죽림굴 발견 20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하느님 자비를 청하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의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의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저희의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저희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옛 자비를 기억하시어, 저희와 당신의 모든 성인들의 기도를 어여삐 들어 허락하소서.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저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저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최양업은 1860년 선종하기 전 마지막으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절절한 기도를 담았다.

 

포졸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포졸들은 신자들이 살던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고,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을 잡기위해 추적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최양업 신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하느님 자비를 청했다. 그러나 그가 자비를 청한 것은 비단 죽음을 목전에 뒀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서한들을 살펴보면 그는 편지 중 기도를 쓰곤 했다. 그 모든 기도에서 하느님 자비를 청했다.

 

1844년 하루라도 빨리 조선에 입국해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간절함을 담아 기도할 때도, 1847년 조선 입국에 실패한 좌절 속에서도, 1849년 조선 선교에 프랑스가 도움이 되길 희망하면서도 “자비하신 주님”을 찾았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해달라”고 기도했다. 조선에 입국해 사목하면서도, 1851년과 1859년에 쓴 편지에서도, 박해 중에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이 받는 고통을 기억하면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한다.

 

이렇듯 하느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하는 모습은 김대건 신부의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 신부처럼 편지글 가운데 기도를 자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며 베르뇌 신부, 메스트르 신부, 리브와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기도를 남긴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의 이 기도는 시편 중 ‘순례의 노래’에서도 특별히 하느님 자비를 간구하며 앞으로 다가올 순교의 고난을 준비했다.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매 순간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며 기도했던 것은 무엇보다 두 신부가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하느님 본성 자체의 진정한 계시임을 아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온 삶으로 체험하고 살아갔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기도할 때 하느님 자비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편지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다. 최양업 신부의 이런 하느님관은 그가 1847년 4월 20일 홍콩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밖에 (소원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던 중국 차쿠에 머물고 있는 이태종 신부(청주교구)는 지난 3월 ‘최양업 신부님 영성배우기’ 강의 중 “최양업 신부의 하느님관(觀)은 자비”라고 강조하면서 “사실 최양업 신부가 처한 상황은 무자비한 현실이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더 좋게 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죽림굴은 최양업 신부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작성한 곳으로 추정된다. 죽림굴 입구에 있는 안내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대건 신부 역시 하느님을 부족한 처지의 자신을 너그럽게 자비로 감싸 안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42년 2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길이 비록 험난할 줄을 압니다마는 천주께서 저희들을 보호하시어 무사하게 해주실 줄 바라고 있다”며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한 길에 오른다. 또 그는 1842년 말 조선 국경을 통과할 때 발각될 위험에 처했지만 하느님 자비에 의탁해 위기를 모면했다. 김대건 신부는 후에 편지를 통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당시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 기록했다.

 

조규식 신부(대전교구 원로사목)는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에서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을 매우 가깝고도 친밀한 대상으로 인식했다”며 “전체적인 그의 삶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하고 도움을 청함으로써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부산교구 죽림굴

 

죽림굴(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억새벌길 220-78)은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들이 살던 곳으로 ‘한국의 카타콤(Catacomb)’이라고도 불리는 장소다. 이곳은 샤스탕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사목했던 곳이고, 최양업 신부가 3개월가량 은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교회사학자들은 최양업 신부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작성한 ‘죽림’이 죽림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5월 23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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