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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6: 모방 신부는 왜 그리 서둘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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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25 ㅣ No.1981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6) 모방 신부는 왜 그리 서둘렀나


박해 예감한 모방 신부, 하루라도 더 빨리 신학생 양성하려 해

 

 

왜 15세 신학생 후보인가

 

모방 신부는 왜 15세 세 소년을 조선의 신학생 후보로 선발했나? 아니, 평신도 지도자들은 왜 이들을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나? 오늘날 중2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들에게 어떻게 이 무거움 짐을 지었을까?

 

유추하면, 조선 사회의 관례 풍습에 따라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 소년을 성인(成人)으로 인정해 충분히 교회를 위해 자신들의 성소와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을 것이다. 유교의 관혼상제가 뿌리내린 조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 가정도 자녀가 15세가 되면 어른 대접을 해 아들의 머리에 상투를 틀고 관을 씌워주고, 딸의 머리에는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아 주었다. 이를 ‘관례’(冠禮)와 ‘계례’(禮)라 한다. 관례를 치른 남자는 이때부터 아명을 버리고 ‘관명’(官名)이나 ‘자’(字)를 지어 부른다.

 

아울러 조선 사회에서 15세가 넘으면 형법에서도 어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15세 이하는 ‘소년범’으로 살인이나 강도를 저질러도 불구속 수사를 하도록 규정돼 있다. 따라서 대역죄인이 아닌 이상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15세가 넘으면 성인에 따르는 무거운 형벌에 취해졌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15세는 지금처럼 어린 소년이 아니라 ‘어른’이다.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3일 자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소년의 이름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으로 소개한다. 최양업의 아명은 ‘양업’, 관명은 ‘정구’이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 관명은 ‘대건’이다. 최방제의 경우 교회사학자들 사이에 아명은 ‘과출’, 관명은 ‘방제’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모방 신부가 쓴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는 최방제의 이름이 ‘과출이’(Kouatchouri)로 나타나며, 정하상의 포도청 진술에는 ‘방제’(方濟)로 나타난다”면서 “‘과철’은 아명이고, ‘방제’는 신학생 선발 이후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를 근거로 김대건은 확실히 관례를 치렀고, 최방제는 관례를 치렀거나 그렇지 않고 방지거와 비슷한 방제라는 교회 이름으로 불렀으며, 최양업은 신학생 후보로 선발돼 모방 신부의 사제관에 기거할 때까지, 아니면 그 후로도 관례를 치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지금도 “최양업” 신부라고 그의 아명을 부르고 있다.

 

모방 신부는 이 편지에서 신학생 후보 서약서를 첨부하면서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 순으로 서약자들을 밝히고 있다. 연장자순으로 호명되고 기록하는 교회의 관례를 따르면 세 신학생 후보 가운데 최방제가 가장 나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교회사학자들은 최방제가 최양업, 김대건보다 한 살 많은 1820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방제는 누구인가

 

이참에 최방제에 관해서도 살짝 언급하고 넘어가자.

 

사실, 최방제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 병인박해 순교자로 성인품에 오른 그의 둘째 형 최형(베드로)을 통해, 또 마카오 유학시절 그의 스승 신부들의 글에서 최방제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최방제는 최양업과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최한지 야고보이고, 어머니는 황안나이다. 경주 최씨 가문의 양반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최양업도 홍주 다락골 새터 출신이다. 최방제는 4남매 중 막내이다. 누나는 동정녀로 살았고, 큰형과 둘째 형 최형(최치장이라고도 불림)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최방제는 남양 교우촌에서 살 때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그의 둘째 형인 최형이 모방 신부의 복사로 활동했고,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으러 상해로 갈 때 동행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도와 전교에 헌신하고, 베르뇌 주교의 명을 받아 교회 서적을 펴내는 데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집안 내력으로 보아 최방제는 신심 깊은 신자 가정에서 성장했음이 분명하다.

 

 

신학생 후보 선발, 한 명이라도 더

 

모방 신부는 1836년 12월 3일 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부님께 2명의 조선 소년을 보내기로 약속해 드린 일이 있지만, 앞으로 보낼 기회가 없을까 걱정되어, 저와 함께 4, 5개월밖에 보내지 않았지만 한 명을 더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신학생 후보를 한 명이라도 더 보내고 싶은 그의 절박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방 신부는 몇 년 이내에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대대적인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조선인들의 성격으로 보아, 우리 선교사들은 조정 모르게 교우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조선에 잠입한 외국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외국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이라는 사실을 여러 달 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조선을 통치하는 이들 가운데 적어도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1836년 12월 3일 자 편지 중에서)

 

그러면서 모방 신부는 “만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저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를 앞으로도 그대로 주시면, 저는 아마 내년이나 그다음 해에 몇 명의 신학생 후보를 선발해 또 보낼 수 있을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기대했다.(같은 편지에서)

 

하지만 기대와 달리 모방 신부의 예견대로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하고, 수많은 신자가 순교하며 조선 교회는 또 한 번 쑥대밭이 된다.

 

세 신학생에 대한 모방 신부의 기대와 애정은 자못 크고 깊었다. 사실 모방 신부가 입국하기 전 중국인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가 1834년 1월 3일 조선에 입국해 사목하면서 2명의 신학생 후보를 선발했다. 모방 신부는 그들을 면접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모방 신부의 눈에 차지 않았다. 유방제 신부가 선발한 신학생 후보 가운데 한 명은 결혼한 경험이 있는 홀아비였다. 다른 한 명은 정혼자가 있는 청년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제가 유방제 신부에게 ‘길러준다고 한 2명의 예비 신학생이 얼마나 배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유 신부는 2명의 청년을 다른 집에 데리고 있었습니다. 2명의 청년 가운데 하나는 홀아비인데, 유 신부가 말한 대로 유달리 게으르고 공부를 할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청년은 저에게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고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청년은 이미 받은 학대를 피하고자 부모의 집에서 도망해 온 청년인데 약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사방에 아들을 찾고 있을 때에 저는 (누구를 시켜) 그 청년의 성소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이 청년은 수도 없이 많은 이유를 내세우면서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하다가 자기의 참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신자가 아닌 여자와 (억지로) 약혼을 하게 했는데, 제가 그 청년에게 그 약혼에 대한 무효 조처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어 보이고 만족해 보였습니다.”(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 한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방 신부는 유방제 신부가 선발한 신학생 후보들에 실망한 나머지 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이 직접 신학생 후보를 선발했다. 그래서 뽑힌 이들이 바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이다.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들 셋 모두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들을 양성할 지도자들에게 순명하기로 했다”고 자랑했다. 모방 신부는 자신의 눈에 쏙 들 만큼 마음에 드는 신학생 후보들을 선발했다고 추천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방 신부는 “제가 보내는 조선 소년들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신 곳에 신학교를 세워주시고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 신학생에 대한 그의 기대와 애정이 듬뿍 담긴 추천 글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2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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