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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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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22 ㅣ No.392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내에게 여전히 처음처럼 설렌다는 연예계 대표 사랑꾼 최수종 씨.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결’에는 어떤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막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그때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로 30년을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일상의 영위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요.

 

 

벚꽃이 1년 내내 피어 있다 해도 지금처럼 좋을까

 

벚꽃을 ‘정말, 진짜, 완전’ 좋아한다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1년 365일 계속 피어 있어도 그렇겠냐고 물었더니 ‘당연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친구의 말도 믿습니다. 하지만 벚꽃을 애타게 기다리는 일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 그 친구 말을 100퍼센트 믿는다 해도, 마음결의 변화까지 없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위의 두 사람과 달리 저는, 아니 저뿐 아니라 아마도 많은 사람이, 쉽게 무뎌질 겁니다. 사람에도, 사물에도, 자연에도…. 그런데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겠는지요. 오늘도 내일도 볼 수 있는 풍경이 오늘밖에 볼 수 없는 풍경보다 애틋하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우리 마음이 최수종 씨 같지 않다고 해서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설렘, 애틋함, 소중함, 감사함 모두 우리가 쉽게 잊게 되는 감정입니다. 새해가 되면 해마다 작심삼일을 하고, 달이 바뀌면 또다시 작심삼일을 하는, 우리는 그런 장삼이사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해도 바뀌고 계절도 바뀌는 것 아닐까요?

 

 

삶의 유한함에 대한 인지, 삶의 유한함에 대한 망각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다행히(?) 유한하고 또한 우리는 이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끝을 미리 내다보며 그것을 아쉬워하고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물론 우리는 삶의 유한함을 자주 잊고 삽니다. 그 또한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예전보다 아주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유한한 삶을 산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데 따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암에도 한 번쯤?

 

죽음에 이르지만 않는다면 암에 한번 걸려 볼 만하다고, 어떤 분이 말했다더군요. 암 투병을 했던 분이라 합니다. 진담은 아니셨을 테지만, 무슨 의미였는지 곱씹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아마 그분은 투병하며 당신 인생 마지막 순간에 관하여 성찰하셨고, 그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꼭 중병에 걸려서가 아니라도 우리는 해가 저물 때, 가을이 도둑처럼 들이닥칠 때, 12월이 시작될 때, 이처럼 ‘마지막 미리 보기’를 하는 기분이 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에 그림자 한 자락이 길게 드리우다 가곤 합니다.

 

 

‘삶 미리 보기’로서의 여행

 

저는 여행을 ‘작은 삶’이라 표현하곤 합니다. 작은 삶으로서의 여행은 길든 짧든 처음과 끝이 분명하고 그 안에 온전한 기쁨과 슬픔, 성취와 좌절, 희망과 절망이 존재합니다. 마치 삶의 압축판 같지요. 여행을 하면 할수록, 왜 사람들이 인생을 그렇게도 자주 길에 비유하는지,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오래된 노랫말이 왜 아직도 그리 공감되는지, 왜 인생을 여정이라 하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특히 여행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아, 삶도 언젠가는 끝나겠구나. 그 마지막은 어떠하려나, 어떠해야 하려나…’ 자연스레 생각하게 됩니다.

 

여행 마지막 날 숙소와 짐을 정리합니다. 마지막 식사, 마지막 석양…. 그리고 정해진 이별. 그 아쉬움을 어찌할까요. ‘내 인생도 언젠가는 이렇게, 별일인 듯 별일 아닌 듯 정리해야겠지. 그런데 또 잊고 그리 아등바등 살았구나, 그리 못나게 살았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스스로가 짠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래서 그나마 어떻게든 잘 살아 보려고 여행한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여행을 통해 인생 또한 언젠가 마쳐야 하는 여행임을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매번 새로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을 기억한다는 것은

 

박항서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지금 63세인데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70? 내 감독 수명이 7년밖에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라고 말했더군요.

 

아직(?)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이고, 인간 수명 또한 유한합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한부 삶을 살아갑니다. 100세 시대가 현실이다 보니 영원무궁 살 것 같다는 착각(?)을 쉽게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였을 겁니다, 위에서 말한 분이 생명이 위태로워지지 않을 정도의 암에 한번 걸려 볼 만하다 했던 까닭은. 죽다 살아난 이들이 종종 간증처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하루하루 밝은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내일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고요. 그러니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은 내일로 미루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일상의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자칫, 언제 죽을지 모르니 오늘을 탕진하자는 결론이 날 수도 있어 항상 권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 역사는 죽음을 기억했던 이들이 더 많은 ‘의미’를 만들어 냈음을 보여 줍니다.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인식이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인 인간에게 전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마지막을 조금은 가깝게 두고 볼 일입니다. 일상 속의 ‘작은 유한성’에 깨어나는 겁니다. 저물녘 석양에 마음이 일렁이셨나요? 때맞춰 내리는 봄비에 쉬이 떨어져 버리는 봄꽃이 안쓰러우셨나요? 그러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초월성’에 마음이 열려 있는지도 살펴볼 일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무사히(!) 눈을 뜬 것을 ‘기억’하셨나요? 내 능력 밖의 어떤 일들이 그럭저럭 해결되는 데 ‘감사’하셨나요? 그러면 그것으로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너무 멀게도 가깝게도, 자주도 가끔도, 무겁게도 가볍게도 말고, 그저 나의 삶 안에 마지막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일상 속에서 가끔씩 삶의 끝에 대한 상상과 온전히 홀로 마주 설 수 있는 순간이 찾아 오거든 놓치지 마시기를 빕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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