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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7: 세 신학생, 먼 길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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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01 ㅣ No.1983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7) 세 신학생, 먼 길 떠나다


세 소년, 매서운 한파 대비해 목화솜옷 입고 유학길에 올라

 

 

신학생 서약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12월 2일 한양 후동의 모방 신부 사제관에서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서약을 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다. 세 소년은 이 서약으로 더는 예비 신학생이 아니라 조선 교회의 엄연한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세 신학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라틴말로 서약했다. 서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와 조선 선교지 교회 장상들에게 순종하고 순명하기로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나와 조선 선교지 장상들에게, 곧 교회 장상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또 장상이 정한 거주지를 이탈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모방 신부는 이 서약서를 1836년 12월 3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

 

세 신학생이 마카오 유학을 위해 한양에서 출발한 날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세 신학생이 모방 신부에게 서약한 날이 12월 2일이고, 이미 출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여서 그동안 1836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에 세 신학생이 유학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9일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에 조선 교회 상황과 자신의 사목 활동을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는 점, 그리고 샤스탕 신부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땅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난 것(1836년 12월 30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 참조)을 고려할 때 12월 3일보다 더 늦은 9일에서 13일 사이에 세 신학생이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세 신학생의 유학길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출발일 전날 저녁 후동의 모방 신부 사제관에서 모방 신부와 세 신학생, 길 안내자들-한국 교회에서는 이들을 ‘밀사’(密使)라고 표현한다-이 모여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여행 준비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신자 한 명이 갑자기 찾아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관차(官差)들이 반란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행인들을 붙잡아 심문하고 소지품은 물론 말안장까지 뒤져보고 있다”고 알렸다. 이 말을 들은 길 안내자 모두는 당황하며 모방 신부에게 “신부님이 내년에 오면 좋겠습니다”라며 이번 일을 접자고 청했다.

 

- 한양에서 의주를 가려면 반드시 돈의문을 빠져나가야 한다. 20세기 초반 돈의문 풍경.

 

 

모방 신부는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셔서 내일 국경으로 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했다. 모방 신부는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세 신학생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유방제 신부에게 “상황이 이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 신부는 웃으면서 “겁나지 않습니다. 저는 내일 떠납니다”라며 모방 신부에게 힘을 실어줬다.

 

모방 신부에게 있어 이번 여행길은 세 가지 중대한 목적이 있었다. 모방 신부는 1837년 11월 26일 자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돌아가려는 여 신부를 출국시키는 일이었고, 둘째는 소년 세 명이 교육을 받으러 출국하는 일이었으며, 셋째는 샤스탕 신부의 입국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날마다 위험한 날들이 될 것이었습니다. 여 신부는 조선말을 못하기 때문에 조사를 받게 되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관차)를 만나기만 하면 즉시 체포될 것이며 일행도 체포될 터이니, 결국 전반적인 박해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습니다. 입국하려던 샤스탕 신부가 같은 위험에 처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세 신학생과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안전하게 출국시키고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이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모방 신부에게 검문검색이 엄해졌다는 소식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함께 모인 이들과 한동안 기도하면서 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얼마 동안 주님께 기도를 드린 다음에 저는 떠날 사람들이 어떤 사고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을 먹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공포감을 온전히 해소하지 못했어도 적어도 그들이 가진 공포감은 충분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이들의 위험한 여행이 아무 탈 없이 끝나고 모두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청하는 지향으로 날마다 미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모두가 예정대로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자의 반 타의 반이었습니다.”(위의 편지에서)

 

북한이 복원한 의주성 남문. ‘해동제일관’이라는 현판이 조선과 중국의 관문임을 알려준다.

 

 

험난한 여정 앞에  

 

우여곡절 끝에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과 유방제 신부,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현석문 등 10여 명은 1836년 12월 초, 중순께 중국 땅 변문을 향해 한양에서 출발했다. 영하 10~30℃의 혹한 속에 한양에서 중국 변문까지 450여㎞를 걸어가는 긴 여정이었다.

 

모방 신부는 선교 자금이 부족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맡긴 선교 자금 은전 500냥을 유방제 신부가 거의 탕진했기 때문이다. 가진 돈이 없던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과 길 안내자들이 변문까지 갈 수 있는 여비만 쥐여줬다. 세 신학생이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가는 여비는 변문에서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샤스탕 신부가 책임져야 했다.

 

목화솜 누비옷을 입고 겨울 한파를 막기 위해 짚으로 엮은 도롱이를 두르고 초라하게 유학길에 오르는 세 신학생을 지켜보던 모방 신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얼마 전 인기리에 시즌 1이 종영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막노동하는 아버지가 택배 일을 하다 쓰러져 망가진 심장 대신 인공심장 판막기를 달아야 하는 아들의 수술 집도의에게 한 대사이다. 집도의의 두 손을 꼭 쥔 아버지는 눈물을 쏟으며 “선생님! 우리 아들에게 제일 비싸고 최고로 좋은 인공 심장을 달아주십시오.”

 

모방 신부는 세 신학생에게 쥐여준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 자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신부님, 제가 보내는 조선 소년들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신 곳에 신학교를 세워주시고 신학 교육을 받도록 해 주십시오.”

 

이렇게 모방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과 다시는 볼 수 없는 작별을 했다.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3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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