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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홍유한의 가계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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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4 ㅣ No.1396

홍유한의 가계와 생애

 

 

국문초록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이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천주교와 관련해서이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연구는 천주교와의 관련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고, 그러면서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루어졌다.

 

이 글은 홍유한과 관련된 객관적인 사실들을 밝히고, 그것을 토대로 홍유한의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문혈록(抆血錄)》, 호구단자(戶口單子), 화회문기(和會文記) 등 문중의 자료들을 새롭게 활용하여 홍유한에게 미친 집안의 영향과 홍유한이 예산 · 순흥으로 이주한 배경, 그리고 각 지역에서의 활동과 인적 교류 등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증조인 홍만시가 ‘서변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망한 사실, 홍유한에 대한 조부 홍중명과 부친 홍창보의 영향, 홍유한의 한양 거주지, 소유 토지와 노비, 예산과 순흥으로의 이주 시점과 이유, 홍천 이주 계획 등에 대해 새롭게 밝힐 수 있었다.

 

 

Ⅰ. 머리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이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천주교와 관련해서이다. 즉 1845년에 작성된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62년에 작성된 다블뤼(Daveluy)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1874년에 간행된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신자처럼 하느님을 공경하고 교리를 실천한 인물’로 홍유한이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기록들을 토대로 홍유한의 삶을 천주교와 관련 짓는 연구들이 나오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후 홍유한과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대두하면서, 현재는 두 가지 설이 대립되어 있다.1)

 

홍유한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홍유한의 학문과 사상, 특히 천주교와의 관련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결과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루어진 측면이 있다. 즉 가계에 대한 내용은 윗대부터 홍유한 대까지의 계승관계와 선조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전부이고, 생애에 대해서도 ‘성호의 제자였다, 부친의 사망 이후 예산으로 이주했다, 예산에서 성호학파 학자들과 교유했다, 1775년에 순흥으로 이주했다, 유학과 서학을 공부했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 개인의 사상은 집안과 개인의 처지, 그리고 개인을 둘러싼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할 때, 홍유한의 사상에 대한 검토에 앞서 가계와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었다.2) 그러나 홍유한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점이 부족했다. 이에 필자는 홍유한의 직계인 지계공파(芝溪公派)를 중심으로 그의 가계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그의 생애를 한양, 예산, 순흥 등 거주지별로 나누어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홍유한에게 미친 집안의 영향과 홍유한이 예산 · 순흥으로 이주한 배경, 그리고 각 지역에서의 활동과 인적 교류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해 볼 것이다. 이를 위해 《문혈록》, 호구단자, 화회문기 등 문중의 자료들을 새롭게 활용했고, 1995년에 간행된 《농은 홍유한 선생 유고집》 등 기존의 자료들도 재검토하였다.

 

이 글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홍유한과 관련된 객관적인 사실들을 밝히고, 그것을 토대로 홍유한의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다. 홍유한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연구로서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Ⅱ. 홍유한의 가계

 

정조의 외가로 유명한 풍산 홍씨3)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홍지경은 고려시대 인물로 고려 고종(1213~1259 재위) 때인 1242년(고종 29)에 과거에 급제한 후 국학(國學)의 직학(直學) 벼슬을 지냈고, 안동 풍산에 세거하였다.

 

[표1] 홍유한의 세계도(지계공파)

 

①지경(之慶 + 순천 김씨) → ②간(侃 + 삼가 오씨) → ③유(侑 + 염주 이씨) → ④연(演 + 윤씨) → ⑤구(龜 + 상산 김씨) → ⑥숙(俶 + 죽산 김씨) → ⑦계종(繼宗 + 전주 최씨) → ⑧우전(禹甸 + 장수 이씨) → ⑨수(脩4) + 문경 백씨) → ⑩이상(履祥 + 안동 김씨) → ⑪방(霶 + 전주 이씨 · 여흥 민씨) → ⑫주일(柱一 + 청송 심씨) → ⑬만시(萬始 + 청주 한씨) → ⑭중명(重明 + 창령 조씨) → ⑮창보(昌輔 + 파평 윤씨 · 창령 성씨) → ⑯유한(儒漢 + 평강 채씨)

 

그러나 풍산 홍씨는 홍지경의 현손(玄孫)5)인 홍구(洪龜) 대에 세거지를 경기도 고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의 우령낭장(右領郞將)이었던 홍구가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던 중 고양의 고봉산(高峰山) 아래(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에 정착하면서 이후 후손들이 고양에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6)

 

홍유한(洪儒漢)은 풍산 홍씨 문경공계(文敬公系, 모당공계) 지계공파(芝溪公派)에 속한다.7) 문경공은 홍구의 내손(來孫)8)인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이며, 문경은 시호(諡號)이고, 모당(慕堂)은 호이다.

 

홍이상은 1573년(선조 6)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579년(선조 12)에 실시된 식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후 사헌부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고양에 세워진 문봉서원(文峯書院, 1688)에 배향되기도 했다.9)

 

홍이상은 홍방(洪霶, 지계공), 홍립(洪雴, 감사공), 홍집(洪集, 장령공), 홍영(洪霙, 추만공), 홍담(洪霮:改 𩅿, 판관공), 홍탁(洪𩆸, 남원공) 등 6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부터 넷째까지 문과에 급제하고, 막내인 홍탁은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문명(文名)이 높은 집안이었다. 이에 따라 6형제의 후손들은 분파를 형성하게 되는데, 홍유한은 첫째 홍방(洪霶, 1573~1638)계인 지계공파의 후손이다.

 

홍방은 관직이 대사헌에 이른 인물이고, 아들 홍주일(洪柱一, 1604~1662)은 163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두 부자는 1635년(인조 13) 6~7월에 아들은 홍문관 부수찬, 아버지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에 홍주일은 부자가 같은 관서에서 근무하는 것을 꺼려 체직(遞職)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0)

 

그러나 홍주일의 아들인 홍만시(洪萬始11), 1628~1656) 대에 홍유한 가문은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즉 홍만시가 ‘서변(徐忭)의 옥사’에 연루되어 1656년(효종 7)에 장폐(杖斃)되었기 때문이다. ‘서변의 옥사’란 홍만시가 진사 한전(韓戩)과 참군(叅軍) 윤세교(尹世喬)로부터 몇 사람이 이유형(李惟馨)의 집에 모여 변란을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천안군수 서변에게 전하자, 서변이 1656년 5월에 이 일을 관에 고발하면서 일어난 옥사이다. 그러나 효종은 이 일이 무고임을 알고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토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홍만시는 서변 · 한전 등과 함께 의금부에서 매를 맞다 5월 14일에 사망했던 것이다.12)

 

한편 홍주일은 1655년 1월 영광군수로 재직할 때 암행어사에게 불법이 적발되어 파면되었고, 1656년 3월에 도배(徒配)형에 처해졌다가 홍만시가 사망하기 전날일 5월 13일에 풀려났다.13) 홍주일은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종에 의해 1660년(현종 1) 5월 다시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앞서 파면된 일로 사헌부가 반대 의견을 제기하면서 6월에 교체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주일의 관직생활은 더 이상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62년(현종 3) 6월에 순청(巡廳)의 순장(巡將)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출근하지 않다가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홍만시는 한무(韓楙)의 딸인 청주 한씨와 결혼하여 홍중서(洪重敍, 1651~1712)와 홍중명(洪重明, 1654~1686)을 낳았다. 홍중서는 순교복자인 홍낙민(洪樂敏, 1751~1801)의 증조부이고, 동생인 홍중명이 홍유한의 조부이다.

 

홍중명은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성품이 어질었다. 3살 때인 1656년에 부친 홍만시가 사망하면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다가, 12~3세부터 외삼촌인 한태상(韓泰相)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약관을 넘기면서 병에 걸려 학업을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홍중명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것을 평생의 아픔으로 여겼고, 남편을 잃은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에는 밤낮으로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간호하느라 밥 먹을 겨를조차 없었고, 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피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릴 정도로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1680년 모친이 사망한 후에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예에 지나칠 정도로 하였고, 그 결과 오래된 질병이 더욱 깊어지면서 결국 1686년 2월에 사망하였다.14)

 

홍중명은 이후 효자로서 1724년(경종 4)에 정려(旌閭)를 하사 받았고, 1726년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이 증직(贈職)되었다. 1724년에 정려가 하사되었으나, 벼슬의 증직이 이루어지지 않자 아들인 홍창보가 1726년 2월 13일에 상언(上言)하여 증직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4월에 지평 벼슬이 내려지게 되었던 것이다.15)

 

어머니께 효도하는 홍중명의 마음은 노비들에게까지 미쳐, 종에게 매를 때리는 것을 보면 ‘이 사람도 남의 아들이다. 반드시 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라며 말렸다. 또한 어머니 곁을 지키느라 아내를 찾지 않는 것을 지적하면, “사람의 한 평생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니, 어찌 차마 모친의 곁을 떠나 다른 곳에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아울러 빈객의 경우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문까지 나가 기쁘게 맞이했는데, 이에 대해 과공(過恭)을 경계하면 “나는 객(客)을 공경해야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사람을 업신여기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응수하였다.16) 이러한 행동은 권철신과 홍낙민이 묘사한 홍유한의 모습과 비슷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조부의 행실과 가르침이 그의 아버지를 통해 홍유한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홍중명은 1671년에 조헌경(曺憲卿)의 딸인 창령 조씨(曺氏, 1654~1725)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이 홍유한의 아버지인 홍창보(洪昌輔, 1679~1757)이며, 1녀는 이단교(李端敎)와 결혼했다가 일찍 과부가 된 남원 고모이다.

 

홍창보는 8세(1686년) 때 부친을 잃었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할머니 한씨의 동생인 한태상에게 10년 정도 가르침을 받았다.17) 그는 이익(李瀷, 1681~1763)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는데, 40여년을 교유한 이익은 홍창보를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느긋하여, 비속하고 패려궂은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천한 노비들에게도 화를 내어 꾸짖은 적이 없었다. 벗과 친척들을 성심으로 즐겁게 맞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자기 몸을 돌보듯 하였다.”고 평하였다.18) 홍창보의 이러한 행동, 즉 노비와 같은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부친인 홍중명과 아들인 홍유한이 보여준 모습이기도 하다.

 

홍창보는 윤사성(尹師聖)의 딸인 파평 윤씨와 결혼하여 2녀를 두었고, 1715년 윤씨가 사망하자 이듬해 창령 성씨인 성훤(成翧)의 딸을 후취로 들여 홍유한(1726~1785)을 낳았다. 그러나 성씨도 홍유한이 4살이 되던 1729년에 사망했다. 이후 홍유한을 돌본 사람은 과부가 된 고모와 서모(광주 이씨)였다.

 

홍창보의 첫째 딸19)은 의령 남씨인 남계(南堦)와 결혼하여 필대(必大) · 필문(必聞) · 필용(必容) 3형제를 낳았다. 그중 셋째 아들 필용이 남계의 6촌인 남돈(南墩)의 양자로 가면서,20) 남돈의 사위인 권철신과 처남 매부 사이가 되었다. 권철신은 홍유한의 매형인 남계의 7촌 조카사위가 됨으로 홍유한과 권철신은 인척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권철신의 아버지인 권암과도 교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창보는 독지역행(篤志力行), 즉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행했기 때문에 독행군자(篤行君子)라고 일컬어졌는데,21) 홍유한 또한 영남에서 ‘독행군자’라고 칭해졌다.22) 홍유한의 행동이 부친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유한의 직계 가문은 고조 때까지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로서 활동했지만, 증조인 홍만시 이후에는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1656년에 홍만시가 연루된 ‘서변의 옥’이 가문의 세(勢)를 위축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 이형상이 지은 홍중명의 〈묘갈명〉에는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어, 세상사는 마음에 번뇌가 많았으니, 뜻이 어찌 과거를 탐탁하게 여겼겠으며, 예에 따라 일찍 결혼하겠는가? 육적이 귤을 품고, 왕부(王裒)가 독서를 그만둔 것과 같이 하였다.”23)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홍중명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었고, 이에 ‘부친이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애통하게 여겨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던’ 왕부24)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삶은 8세 때 아버지를 잃은 홍창보에게로 이어졌고, 홍유한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홍중명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것은 약관을 넘기면서 얻은 병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홍유한 역시 질병 때문에 도학(道學)에 매진할 수 없었다.25) 그렇더라도 홍만시 대를 경계로 이전의 조상들이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했다면, 이후는 학문 연구와 수신(修身)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풍이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다.26)

 

홍유한은 자제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우리 가문은 본디 덕을 세웠다고 칭송을 받아, 조부께서는 평생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길 기뻐하셨고, 선고께서도 이를 준수하여 실추함이 없었으나, 나에게 이르러 곧 전복 실추하고 말았다.”고 했는데,27) 홍만시 대 이후의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홍유한은 조부 이후로 덕(德)을 세우는 것이 가문의 일임을 강조하면서, ‘교만과 사치를 경계하고, 독서와 수신, 겸양, 의리와 선행의 실천’ 및 ‘노복을 후하게 대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휼할 것’을 유훈으로 남기고 있다.28) 조부와 부친의 행동을 자신이 실천함은 물론, 후손들도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는 점에서, 홍유한의 삶에 미친 집안 특히 조(祖)와 부(父)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Ⅲ. 생애

 

1. 한양 거주기(1726~1760)

 

홍유한은 1726년(영조 2)에 한양의 아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집안은 홍구 때부터 경기도 고양(高陽)에 정착했고, 이후 조부 대까지 묘소가 모두 고양에 있었다. 그런데 홍이상과 홍방30), 홍주일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했는데, 과거에 합격할 당시의 거주지는 한양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홍유한의 직계 가족은 관직 생활로 인해 한양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증조인 홍만시 대부터 관직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계속 한양에 거주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홍유한 가문의 자료31)에 의하면, 이들은 반송방(盤松坊)의 미전상계(米廛上契)에서 권정승계(權政丞契)로, 그리고 다시 차자리계(車子里契)로 이사했다가, 이곳에서 예산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이 1684년에 발급받은 호패에 따르면, 홍중명은 서부 반송방 미전상계에 거주하고 있었다. 미전상계는 오늘날 서울 중구 의주로1가와 서대문구 합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686년 홍중명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은 반송방 권정승계로 이사한 듯하다. 즉 홍중명의 부인인 조씨의 1693년 호구단자를 보면, 거주지가 ‘권정승계 박생원 댁 시입(時入)’이라고 되어 있다. 권정승계는 오늘날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 · 3가와 마포구 아현동 각 일부에 해당한다. 아마도 1686~1693년 사이 어느 때 거처를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시입(時入)이라는 용어의 용례를 보면, ‘전에 살던 계에서 새로운 계로 거처를 옮긴 상황에서만 나타나고,’ 또 ‘이사 후 처음 발급된 준호구나 처음 신고한 호구단자에만 기재되었다’고 한다.32) 따라서 1693년의 호구단자에 ‘시입’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은, 호적이 3년마다 개편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1690~1693년 사이에 이들이 미전상계에서 권정승계로 이사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호구단자의 ‘박 생원’은 집주인을 말하는데, 조모인 조씨가 박 생원의 집을 매득(買得)했는지 빌렸는지는 알 수 없다.

 

홍유한의 집안이 권정승계에 살았던 기록은 1708년의 호구단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1714년의 호구단자에는 차자리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1708년에서 1714년 사이에 권정승계에서 차자리계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14년 자료에는 ‘시입’이라는 표현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1711년 이전에 이사했다고 할 수 있다.33) 차자리계는 오늘날 서울 중구 중림동, 서대문구 충정로3가동, 마포구 아현동 각 일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차자리계의 주택은 홍창보 남매의 화회문기(和會文記, 1728)에 상속 재산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득한 집임을 알 수 있다.

 

홍창보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56년의 호구단자에도 이들의 거주지는 차자리계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홍유한은 차자리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부친의 사망 이후 예산으로 이주했다고 하겠다.

 

홍유한은 어려서 몇 년 간 예산에서 거주하였다.34) 책을 읽고 글 짓는 것을 좋아한 그는, 8~9세 때 이미 여러 경서를 읽고 백가서를 모두 통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세가 되는 1741년에 다시 한양 집으로 돌아왔 고35), 그 즈음 부친의 권유에 따라 성호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채응검(蔡膺儉)의 딸인 평강 채씨와 결혼하여 1754년에 아들 홍낙질(洪樂質)을 낳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757년 12월 18일 부친이 사망했고, 이후 한양의 가산을 정리하여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로 내려갔다. 재종질 홍낙민은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정축년(1757) 이후 말하기 어려운 시사(時事)가 있기에 드디어 한양의 집을 팔고 예산의 여촌으로 이사했다”고 하였다.36)

 

홍낙민이 언급한 ‘말하기 어려운 시사’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1762년(영조 38) 나경언의 상소를 계기로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와 반대하는 벽파 간의 당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세자의 처가인 홍씨 문중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집안이 불안했는데, 이것 때문에 시사가 날로 어지러웠다’고 설명되기도 한다.37) 즉 당시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당쟁을 피해 예산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757년 당시는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이전 시대와 같이 격렬한 당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파와 벽파의 구분은 이 시기가 아니라 정조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아울러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은 세손(정조)의 즉위 문제로 배척하는 관계가 되었지,38) 사도세자 때문에 분열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에도 정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세력(扶洪派)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면서 이들을 견제하는 반대 세력(攻洪派)이 존재했고, 공홍파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자의 비행을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1757년 당시 부홍파와 공홍파의 대립이, 홍유한이 위협을 느끼고 예산으로 거처를 옮길 사안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1757~1758년은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이다.39) 영조는 1757년 11월 11일에 신하들이 입시한 가운데 세자를 책망하고 전위(傳位)하겠다고 하여 세자로 하여금 기절하게 만들었고, 1758년 6월에는 대리청정과 전위 소동으로 얻은 화병을 세자가 표출하자 세자를 폐위한다는 비망기를 내리기도 했다.40) 따라서 ‘말하기 어려운 시사’란 바로 ‘영조와 세자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은 1762년 윤5월 21일 세자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조와 세자의 대립 · 갈등이 홍유한의 이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친이 사망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한양을 떠나 조용히 살고자 하는 바람이 예산 이주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그가 어려서부터 앓던 병도 한양을 떠나기로 결정하는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 듯하다. 성호는 홍유한이 24세가 되던 1752년까지 그의 병을 염려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고, 홍유한 자신도 부친의 행장(行狀)에서 ‘자신은 1748년부터 1752년까지 병으로 사경(死境)에 있었다’고 했다. 그의 병은 27세 이후에 약간 나은 듯하였으나, 3년 후인 1755년에 다시 재발하여 이후 내내 고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757년에 부친마저 사망했던 것이다.41)

 

세속의 분주함을 싫어하는 홍유한의 생각은 ‘혹인(或人)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수에 노니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고, 속진에 분주함은 나의 두려움입니다. 즐거움을 잃었기 때문에 뜻이 막히고, 두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기운이 맺혔으니, 만약 고요한 지역에서 쉬고 속진의 굴레 밖에서 한가로이 노닌다면 곧 정신이 완전하고 골격이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 자리에 엎드려 매양 유거(幽居)를 생각하니 파탕(波蕩)한 세상에서 벗어나고 안화(安和)한 세계 속에 고요하여, … 한가한 때에 정신이 권태로우면 빈객을 불러 소요하며, 청송백석(靑松白石)의 사이에 바람을 쏘이고, 연하수죽(煙霞水竹)의 마을로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정경입니다. 이에 일찍이 나의 정신이 향하고 마음이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42)

 

파탕한 세상에서 벗어나 안화한 세계를 꿈꾸던 홍유한의 입장에서 볼 때, 요양이 필요한 병이 있고 부친이 사망한 시점에서, 당시 한양의 분위기는 충분히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유한은 언제 한양에서 예산으로 이주했을까? 지금까지는 앞서 제시한 홍낙민의 ‘정축년 이후에 예산으로 이거했다’는 언급에 따라 1757년으로 보았다. 그런데 ‘정축년 이후’라는 말은 1757년에 있었던 부친의 사망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부친이 사망한 이후에 예산으로 이거했다는 뜻이지, 1757년에 예산으로 이주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 홍창보는 1757년 12월 18일에 사망했고, 이듬해 봄에 경기도 양근에 장사를 지냈다.43) 그러므로 부친이 사망한 그 달에, 장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예산으로 이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장례를 치른 다음에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홍유한의 이주 시점은 1758년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하겠다.

 

홍유한의 예산 이주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인물이 6촌인 홍양한(洪亮漢, 1719~1763, 홍낙민의 부친)이다. 홍낙민은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했다는 말에 이어, “당시에 우리 선친께서도 또한 일찍이 시종관을 지내고 홍양의 화성에 물러나 지내셨으니, 또한 선생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돌아가자는 약속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44)

 

홍양한은 1759년(영조 35) 6월 29일에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에서 파직되고, 1762년(영조 38) 윤5월에 외방에 거주하며 정언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나오지 않아 삭직되었다. 그리고 1763년 3월 3일에 전라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고, 호남지역을 염찰(廉察)하던 중 태인현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45)

 

홍양한의 호구단자(1762년)를 보면, 1762년 1월 당시 홍양한은 가족과 함께 홍주 화성면 화산리(현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 홍양한은 파직된 후인 1759년 7월부터 1761년 사이에 화산리로 이주했고, 이곳에 살면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낙민에 따르면, 홍유한과 홍양한은 비슷한 시기에 충청도로 낙향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홍양한의 이주 시기가 1759년 7월부터 1761년 사이라면, 홍유한도 부친의 장례를 치른 1758년 봄부터 1761년 이전에 예산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홍유한이 탈상(脫喪) 후에 이주했다면, 상한(上限)은 1758년 봄보다 늦어질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1780년 홍유한이 김영천(金榮川)46)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료1] “유호(儒浩)47)는 전에 한양에서 지내던 중 정축(1757)에 상을 당하고 무인(1758) 봄에 여주 땅에 장사를 지내려 하였더니 뜻밖의 우환으로 능히 장사를 지내지 못한 채 널을 받들고 양근에 닿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공의 생가 선대인(先大人)48)께서 맡아 다스리는 고을이어서 실로 저의 형편을 보살피고 도와주어 흙이라도 덮을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은혜가 생사에 사무쳐 죽도록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상을 겨우 마치고 일찍이 명함을 가지고 근동(芹洞)49)의 옛 집으로 찾아가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로 자주 찾아가 안부를 살피고자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수십 년 전부터 이미 호중(湖中)으로 옮겨 집을 얻어 살았고, 또 질병을 앓느라 십 수 년 동안 생사의 관문에 출몰하였으니 한양에 이르기가 드물었습니다.”50)

 

[자료1]에 따르면, 홍유한이 부친상을 마친 다음 근동에 있는 김영천의 아버지(김광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은, ‘이후 충청도로 이주하면서 안부를 살피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한양에 거주할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홍창보의 대상(大祥)이 1759년 12월, 담사(禫祀)가 1760년 봄에 있었으므로, 홍유한이 부친상을 완전히 마친 것은 1760년 봄인데, 이즈음 차자리계에 있던 집에서 근동의 김광수를 방문했음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시기는 1760년 봄부터 1761년 사이로 좁혀질 수 있다. 다만 두 연도 중에 한양을 떠나고자 했던 홍유한의 마음을 고려한다면, 1761년보다는 1760년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추정에 불과하며 앞으로 좀 더 확실한 자료가 나오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51)

 

 

2. 예산 거주기(1760~1775)

 

1765년에 작성된 홍유한의 호구단자를 보면, 두촌면 호동리(현 예산군 신암면 두곡리)에서 부인 채씨와 아들 팔희(12세), 재종 형수 이씨(63세), 재종질(再從姪, 7촌) 홍낙수(29세)52) 부부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53)

 

그렇다면 홍유한은 왜 예산으로 이주한 것일까? 예산 지역과 무슨 연고가 있는 것인가? 기존에는 막연히 ‘친척들이 살고 있는 예산 여사울로 내려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54) 홍씨 문중에 남아 있는 1728년의 화회문기(和會文記)를 보면,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이유가 설명된다. 이화회문기는 홍유한의 부친인 홍창보 남매의 재산 분할 문서로 1725년 모친인 조씨가 사망하자, 관례에 따라 3년 상을 마친 후 재산을 나눈 문서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1728년 당시 홍창보 남매가 상속받은 재산은 [표2], [표3]과 같다.

 

 

 

 

 

 

 

[표2]에 따르면 1728년 당시 홍유한 집안은 충청도의 천안과 덕산, 경기도의 김포와 장단에 전답 10석 83두락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 충청도에 5석 57두락지, 경기도에 5석 26두락지가 있어 양 지방에 비슷한 크기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천안의 신종면은 오늘날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와 신택리 두 마을이고, 덕흥면은 아산시 선장면 돈포리 지역이다. 그리고 덕산의 비방곶면은 오늘날 당진시 합덕읍 도리 · 신흥리 · 점원리 · 합덕리와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에 해당한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역으로, 홍유한이 이주했던 예산의 여사울(두곡리)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그림 1] 참조).

 

홍창보는 화회문기에서 “세전(世傳)하는 전토는 모두가 바닷가에 있어, 태반이 조수(潮水)에 침식되는 바”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홍유한 가문의 토지는 삽교천변에 조성된 간석지였다고 생각된다. 실제 덕흥면의 복중언이나, 비방곶면의 중언처럼 제언(堤堰)을 뜻하는 ‘언’자가 들어가는 지명과 덕흥면의 도랑포와 신종면의 복면포, 비방곶면의 외포처럼 포구를 의미하는 ‘포’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토지가 간석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결국 이 지역에 집안의 토지가 있었던 것이 홍유한이 여사울에 정착한 직접적인 이유라고 하겠다. 그리고 홍유한이 어려서 몇 년간 생활한 예산 지역도 이 전장(田莊 - 湖西庄)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전장은 집안에서 필요할 때 머물던 별저(別邸)였다가, 홍유한 대에 와서 주거지가 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것은 ‘친척들이 살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집안의 별장과 소유 노비’가 있었던 것이 좀 더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하겠다.

 

한편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것은 이익의 조카인 정산 이병휴(1710~1776)가 1757년에 고향인 덕산 장천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로 귀향56)한 것과도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이병휴는 《문혈록》에 발문을 썼고, 그 발문에서 “(홍창보 집안과) 通家骨肉之義”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할 때 송서(送序)를 주기도 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홍유한은 이병휴와도 잘 아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이병휴는 윤동규, 신후담, 안정복 등과 함께 성호학파를 이끌어 나가던 인물이었다. 특히 1763년 성호가 타계한 이후 성호로부터 수업 받은 집안사람들이 대부분 예산 지역에 살고 있었고, 또 이병휴가 학파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상황에서 성호학파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예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이병휴의 장천리 거주와 학문 활동은 호서지방 성호학통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57)

 

성호학파 내에서 이병휴가 갖는 위상을 고려할 때, 홍유한의 이주 시점이 이병휴의 낙향 시기와 가까웠던 점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시사(時事)가 여의치 않던 상황에서, 이병휴의 귀향이 홍유한의 예산 이주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사울로 이주한 홍유한은 이병휴를 비롯하여 예산을 찾는 성호학파 사람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생활을 하였다. 성호학파의 젊은 학자들은 이병휴를 자주 찾아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는데, 권철신(1736~1801), 이기양(1744~1802) 등이 이병휴를 가까이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58)

 

경기도 인천에 살던 이기양은 1763년 무렵부터 이병휴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다가, 1765~1766년 무렵에는 스승을 따라 덕산으로 이거했고, 1768년 무렵에는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이 이병휴에게 처음으로 서한을 보내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병휴의 권고에 따라 이기양과 권철신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벽도 1774년에 이병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59) 이병휴를 방문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여사울의 홍유한도 찾아 교유했을 것이다.

 

현재 천진암 성지와 홍씨 종손가에는 권철신, 이병휴, 권제신, 이기양, 이총억 등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들이 소장되어 있는데,60) 이것은 홍유한이 여사울에 머물면서 성호학파의 학자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이벽의 장인인 권엄(權)이 홍유한을 ‘벗 겸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이벽 역시 장인을 통해 홍유한과 알고 지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겠다.61)

 

홍유한은 스승을 비롯한 다른 성호학파 학자들처럼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예(禮) 등 유학에 대한 공부를 했고,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도 갖고 있었다. 홍유한이 윤동규에게 《가례질서》를 빌려 보았고, 이익이 지은 《사칠신편(四七新編)》에 대해 권철신과 논의한 사실,62) 그리말디(Grimaldi, 閔明我)가 작성한 천문도[方星圖]를 보았다거나, 알레니(Aleni, 艾儒略)가 쓴 세계지리서인 《職方外紀》의 서문을 베껴 쓴 사실63) 등은 홍유한의 관심 분야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이병휴가 1775년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에, “서방 성인의 일을 내가 아는데, 또한 이와 같이 될까 염려합니다(西方聖人之事, 我知之矣, 恐亦如是).”라는 구절이 있다.64) 여기서 ‘서방 성인의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양의 과학이든 종교 등 서학과 관련된 내용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홍유한이 경상도 순흥으로 이주하기 직전까지 서학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홍유한은 학문 연구와 함께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에도 힘을 썼다. 홍유한의 재종질인 홍낙민이 지은 제문(祭文)을 보면, ‘1763년 선친이 사망했을 때, 자신은 성인이 되기에 2살이 부족했는데, 오직 선생이 사랑으로 길러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65)

 

실제 당시의 호구단자를 보면, 1762년 당시 홍낙민은 부모와 형인 홍낙교 부부, 그리고 고종사촌인 조덕림 부부와 함께 홍주 화성면 화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1765년의 호구단자에는 형 부부 · 모친과 함께 ‘두촌면 호동리’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보아 홍낙민 형제는 제문의 내용대로, 1763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홍유한이 거주하던 두촌면 호동리로 이사한 듯하다.

 

호동리에 거주한 홍낙민 형제는 충주로 이주하는 1776년까지 이곳에서 홍유한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웃 마을(신종면 호동리)에 사는 이존창도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66) 홍낙민과 이존창은 이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801년에 순교하게 된다. 두 사람은 특히 내포 지역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했다는 점에서, 천주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물론 이 시기 홍낙민 형제와 이존창은 과거 준비를 위한 공부를 위주로 했지만, 홍유한이 서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만큼, 서학과 관련된 내용도 언급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홍유한의 교육 활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경상도로 이주한 이후 여러 명의 제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산에서도 더 많은 문하생이 존재했을 개연성은 있다고 하겠다.

 

 

3. 순흥 거주기(1775~1785)

 

1760년경에 예산으로 낙향한 홍유한은 이곳에서 16년을 생활한 후 1775년67)에 경상도 순흥으로 이주하였다. 1780년의 호구단자를 보면, 홍유한 부부와 아들 홍낙운 부부가 거주한 곳은 순흥부 동원면(東園面) 구고리(九皐里)였다.68)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기존에 언급된 내용은 3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69), 먼저 “퇴계의 학문을 사모했기 때문에 영남행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병휴의 〈영남으로 가는 홍유한에게 보낸 송서(送序)〉를 토대로 하는데,70) 송서에는 “퇴계를 존중하고 사모한 성호는 평소에 영남에 살 집을 얻으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홍유한을 통해 성호 선생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했고, 아울러 홍유한을 통해 선생의 도(道) 역시 영남의 선비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물론 홍유한도 스승인 이익처럼 퇴계의 학문을 사모했고, 동문들과 영남에서 살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영남행을 결정지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자료상 홍유한의 영남행을 퇴계와 연결시킨 견해는, 이병휴의 평가이자 바람이었다.

 

다음으로 하성래 교수와 차기진 선생은 “권암, 이병휴, 이기양, 권철신 등이 1773년 이래로 논의해 온 ‘入山之計’, ‘南計’를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은 이들 사이에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는데, 단순히 은둔을 위한 것이나 시회(詩會)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뜻을 같이 하고 그 연구나 토론을 위한 강학 내지 학회를 구성하려는 목적”에 있었다고 보았다.71) 권철신은 제문(祭文)에서 “십 수 년 동안 한 구역의 땅을 정하여 몇 사람이 함께 돌아갈 뜻을 품었으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중도에 해산되고, 오직 홍유한만 영남에 남겨두고 한 사람도 따르는 이가 없었다.”고 술회하였다.72)

 

그런데 홍유한의 사돈인 권준의 만사(輓詞)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상 밖 깊고 깊은 태백산에, 풍속이 순박한 동천(洞天)이 한가롭네. 공이 와서 집터를 보고 내가 집을 지어서, 함께 수죽간(水竹間)에 깃들길 약속했었지. 공이 먼저 이사하고 내가 조금 늦었던 것은, 감히 머뭇거리며 뒤처지고자 함이 아니라. 학발(鶴髮)의 노친이 당상에 계셨기에, 반의(班衣)로 멀리 떠날 수 없었음일세.”73) 권준은 제문(祭文)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쓰고 있다. 즉 ‘함께 은거하자는 약속이 있었으나, 자신은 집에 어버이가 계셨으므로 멀리 떠날 수 없었고, 이에 홍유한으로 하여금 홀로 대령(大嶺) 밖으로 외로이 떠나게 했다’는 것이다.74)

 

권준이 권철신 등이 계획한 남계(南計)의 일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내용을 보면 함께 살고자했던 것은 둘 사이의 약속인 듯하다. 그렇다면 홍유한은 여러 사람과 이러한 약속을 했다고 추정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홍유한의 영남행을 반드시 권철신과의 약속을 실행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세 번째는 신앙과 관련해서 영남으로 이주했다는 설이다. 즉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백산(白山)에 들어가 13년 동안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75) 그러나 이 내용도 아직까지는 교회 기록 이외의 자료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에서 소개한 ‘이주 이유’는 홍유한 자신이 언급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홍유한은 자신의 영남 이주에 대해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먼저 홍유한이 예산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은 1775년 훨씬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홍유한의 유고집에는 자손들에게 남긴 4개의 유훈(遺訓)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유훈은 1765년(12. 14)에 작성된 것이고, 나머지 3개는 작성한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첫 번째 유훈의 첫 머리에 “이 땅은 이미 자손을 양육하고 분묘를 쓸 장소가 아닌 까닭으로 부득이 공산(公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공산은 산세가 비록 기걸(奇傑)하나 좁아서 관평(寬平)한 뜻이 없고, 이 땅에 사는 이는 마땅히 강한 힘만을 서로 숭상하니 역시 자손들이 그 뿌리를 내리고 살 곳이 못된다. 집안 형편이 조금 움직일 수 있거나 기회가 있기를 기다려 영남[嶺中]에 가서 살 것이로되, 혹 그곳의 좌(左)나 우(右), 중(中)이나 하(下) 어느 곳도 좋으니, 그 가운데서[嶺中] 떠나지 마라.”는 내용이 있다.76)

 

위의 유훈에서 우리는 홍유한이 지닌 3가지 정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첫째는 1760년경에 이주한 예산의 여사울을 사대부가 뿌리내리고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사울의 대안으로써 공산[공주]으로 이주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 역시 인심이 좋지 않아 대대로 정착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형편과 기회가 되면 영남으로 이주하여 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용상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하고자 했던 것은 학문적인 측면 보다는 풍수(風水)의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지세가 자손을 양육하고, 집안의 분묘를 쓸 수 있으며, 인심이 좋은 장소를 찾아 그곳에 뿌리내리고자 했는데, 경상도가 바로 그러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홍유한의 이러한 생각은 비록 작성 연월일은 알 수 없지만, 네 번째 유훈에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즉 “공자가 남용(南容 : 제자)을 두고, ‘나라에 도가 있음에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형벌에서 면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항상 영좌(嶺左)의 산수가 거의 이 말씀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나의 자손들은 삼가 다른 곳을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에 깃들어 살도록 해라. … 안동, 영주, 풍기, 순흥, 봉화, 예안, 예천은 모두 땅을 택하여 살만한 곳이고, 청송, 영양도 또한 살만한 곳이다. 비록 일시에 우거할지라도 삼가 강릉 이북을 넘어서지는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77)

 

영남 중에서도 영좌, 즉 경상좌도 지역의 산수가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며, 안동, 영주, 풍기, 순흥, 봉화, 예안, 예천, 청송, 영양 등 구체적인 지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홍유한이 선택해서 이주한 지역이 바로 순흥이었다.

 

따라서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데에는, 그가 지니고 있던 주거관(住居觀) 또는 풍수관(風水觀)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하겠다.78) 홍낙민도 제문에서 “선생은 성품이 요란한 것을 기뻐하지 않아 매양 별구(別區)를 마련하여 화죽(花竹)을 가꾸고 금서(琴書)를 즐기면서 한가로이 천년을 다하고자 했다.”고 했고, 홍유한 자신도 한양에 거주할 때, “사람이 거처가 고요하면 마음이 전일하고, 마음이 전일하면 정신이 상쾌하고, 정신이 상쾌하면 식견이 밝고 행실이 고상하게 되는 법”이라고 밝힌 바 있다.79) 그렇더라도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하게 된 데에는 홍낙민이 지적했듯이 그곳이 ‘동방의 추로의 땅(吾東方鄒魯之地)’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작용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80)

 

이러한 주거관을 갖고 있던 홍유한에게 예산 호동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거처는 아니었다.81) 이에 1765년 이전부터 영남의 소백산 아래로 이주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1775년에 이주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홍유한은 예산을 떠나고자 했지만, 곧바로 영남으로 가기보다는 먼저 홍천으로 가서 우거(寓居)할 생각이었다. 서창재가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홍천 계획은 전에 이미 들었는데, 중간에 그만 두겠다는 말씀(의 편지)을 지금에 받게 되니, 현재 노형의 계획이 홍천에 있음을 알겠습니다”라고 했다.82) 이것으로 보아 홍유한은 서창재가 사는 영남으로 이주하기로 약속했으나, 중간에 계획을 수정하여 먼저 홍천에 우거했다가 나중에 영남으로 갈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서창재는 ‘예산에서 홍천까지는 수백리 길이고, 홍천에서 영남까지도 수백리 길인데, 한 번도 어려운 수백리 길을 두 번이나 움직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영남을 제일(第一)로 여기고 홍천을 제이(第二)로 생각한다면, 제이를 앞세우고 제일을 뒤로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형의 남천지계(南遷之計)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겠다.’는 내용을 홍유한에게 보내고 있다.83)

 

그러나 이후 홍유한은 홍천이 아니라 서창재와의 약속대로 영남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창재의 편지는 1773년에 쓴 것이므로 2년 사이에 홍유한의 생각이 바뀌었고, 이에는 서창재의 설득이 주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서창재의 편지에 따르면, 홍유한은 1773년 이전에 예산을 떠날 계획을 세운 듯하다. 그러나 홍천과 영남 등 이주 지역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가 1775년에 드디어 영남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홍유한은 왜 1770년대 초에 예산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일까? 이에 대해 홍유한 자신이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런데 홍유한이 1785년에 사망하자 여러 지인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이들은 여기에서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이유를 “피진(避塵)”, “피효진(避囂塵)”, “피세효훤(避世囂喧)”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84) 즉 “속세 또는 속세의 시끄러움을 피해” 영남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홍유한은 산이 깊고 물이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고, 세상의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산속에 거처하는 것을 즐겼다는 점에서,85) “피진”은 당연한 이주 이유라고 하겠다.

 

그런데 권사호의 만사에는 “하늘이 이미 이 어른을 곤궁하게 한 탓에 영남에 사는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天旣窮此老 吾嶺幸相遭)”86)는 내용이 있다. 즉 당시 홍유한이 겪던 곤궁으로 인해 그가 영남으로 이주했고, 그 덕분에 홍유한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남으로 이주할 즈음 홍유한이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홍유한이 예산을 떠난 직접적인 계기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홍유한은 1772년에 함께 살던 족질(族姪) 홍낙수를 병으로 잃었다. 그리고 홍낙수를 7달 동안 치료하느라 가산이 물에 씻겨가듯 탕진(蕩盡)되었다고 한다.87) 이 시기 홍유한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은 [표4]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표4]를 보면 1765년에 66명이었던 소유 노비가 1780년에 47명으로 감소하였다. 이것은 예산에서 순흥으로 이주할 즈음 집안 형편이 나빠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집안 형편은 순흥으로 이주한 이후 더욱 나빠져, 1786년에는 소유 노비가 19명으로 급감하고 있다.

 

순흥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은 홍유한 자신도 토로한 바 있다. 즉 순흥으로 이주한 이듬해에 수재로 인해 흉년이 들었을 때,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극심한 흉년을 만나 10식구가 살아갈 계책이 거의 없으니 시름과 번민을 형용하기 어렵다.”고 심경을 내비친 바 있다.89) 그리고 1783년 겨울에 방문한 권준은 살림이 영락(零落)하고 생계가 냉박(冷薄)했으며,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표현하였다.90) 그리고 1784년에는 며느리 장씨가 사망했는데, ‘집안 형편이 궁패(窮敗)하여 초종(初終)의 여러 예를 모두 간단히 처리하고, 기한이 지나서 치룬 장례는 단지 흙만 덮었을 뿐이라고’ 하였다.91)

 

이처럼 홍유한의 집안 형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졌는데, 그 시발점이 1772년에 사망한 홍낙수의 치료 비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즈음 예산을 떠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권사호가 만사에서 언급했듯이 ‘곤궁함’이 영남으로 이주한 이유 중의 하나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경제적인 문제와 함께 홍유한이 앓던 병도 이주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92) 홍유한은 한양에 거주할 때부터 병을 앓았고, 이후 평생을 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785년 1월 30일에 묵은 병이 도져 사망하였다.

 

홍유한의 사돈인 권준은 홍유한의 병과 관련하여 “일생토록 빠져있던 바는 기질(奇疾)이었고, 종신토록 겪었던 것은 액궁(阨窮)이었다. 일찍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 질병이 궁격(窮格)에 방해가 되어 도학(道學)에 힘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평생의 공부가 오로지 극기(克己)에 있었다.”고 했다.93)

 

홍유한이 평생 안고 살았던 것이 기질(奇疾)이라던 권준의 표현처럼, 《유고집》에 수록된 홍유한의 서한에는 자신의 병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영남으로 이주하기 직전과 이주한 직후에도 그러한 표현이 나타나는데, 1775년 서창재에게 보낸 서한에는 “진질(疹疾)을 앓고 있다.”고 했고, 1777년경 조(趙)에게 보낸 서한에는 “숙담(宿痰)으로 한결같이 신음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1778년 홍양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날씨가 차가워지자 천질(賤疾)이 다시 발동하여 문을 닫고 엎드려 지내는 형편”이라고 하였다.94) 물론 앓고 있던 병이 1775년에 악화된 것은 아니지만, 집안 조카가 죽고, 가세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숙병(宿病)도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산거(山居)를 실행하는데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컨대 홍유한은 영남 지방이 갖는 학문적 위상을 전제로, 풍수지리적인 요소와 산거(山居)라는 자신의 주거관, 그리고 집안 형편의 위축과 숙환 등을 고려하여 영남으로 이주했다고 하겠다.

 

홍유한은 예산을 떠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서창재와 의논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홍천 우거설 등 여러 과정을 거친 다음, 소백산 아래에 있는 순흥부 동원면 구고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홍유한이 이주했을 때 서창재와 남양 홍씨인 홍득전(홍거의 부친), 홍거의 종형이 도움을 주었고 이들과 같은 리(里)에 살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홍거의 종형 집을 얻어서 거처했다고 하며,95) 남양 홍씨인 홍필전도 문하생으로 10년 가까이 홍유한을 모시고 따랐다고 한다.96)

 

그런데 순흥의 남양 홍씨는 홍유한과 인연이 있는 집안이었다. 즉 홍유한의 6대조인 홍이상과 홍득전 · 홍필전의 6대조인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교분이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이다.97) 이러한 인연으로 홍득전 가족은 홍유한의 순흥 거주를 도왔고, 홍유한은 홍필전과 홍거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아마도 구고리 정착은 서창재를 비롯하여 주인(主人) 역할을 해 줄 사람들의 존재가 고려된 결과였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봉화 금씨인 금흥옥(琴興玉)과 금흥운(琴興運)도 이웃에 살았는데, 이들의 선조인 금복고(琴復古, 1549~1632)도 홍이상과 세의(世誼)가 두터웠다고 한다.98)

 

홍유한의 순흥 생활은 예산 때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지역 선비들과의 교류, 독서와 학문 연구, 후학 양성이 순흥에서도 이루어졌다. 홍유한이 사망한 후 권사호(權思浩) 등 안동 권씨, 김상겸(金相謙) 등 함창 김씨, 김희직(金熙稷) 등 의성 김씨, 서창경(徐昌鏡) 등 서창재의 일족인 달성 서씨, 안순(安恂)과 같은 죽계 안씨 등이 만사와 제문을 지었는데, 이들이 바로 홍유한이 영남에 거주하며 교류했던 인사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울러 홍유한의 영남 이주를 주선했던 서창재는 1777년에 봉화에 있던 단계서원(丹溪書院,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의 훈장, 1780년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의 훈장이 되었는데, 홍유한은 서원을 통해 여러 선비들을 소개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하생인 홍거는 “선생이 남쪽으로 이사 온 지 겨우 10년 남짓에 숙환을 앓느라 크게 상기(上氣)가 되어 영남의 인사들과 교유함이 많지 못한 까닭으로 영남의 인사들이 선생의 덕행과 문장을 아는 이가 대개 드물었다.”고 평가했다.99) 병 때문에 외부 활동이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홍유한은 《중용》을 날마다 한 번씩 읽는다고 했고, 김상겸은 “홍유한이 깊이 잠심하여 고서를 연구하고, 단정히 앉아서 《주역》을 살펴봤다.”고 했다. 그리고 서창렬은 “경적 가운데 심성편[性心門]에 전념했다.”고 하였고, 문하생 서간유는 “성리(性理)에 침잠하여 깊은 경지에 나아갔고, 경전을 고찰하여 실천으로 징험했다.”고 하였다.100) 이러한 평가들을 통해 볼 때, 홍유한은 순흥에서 유학 경전들을 연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홍유한은 순흥에서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서학(西學)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었다. 1781년 8월 17일 이익의 손자요 이병휴의 조카인 이구환(李九煥)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서태(西泰)의 책 두 권을 그대께서 아직 돌려주지 않아서 내가 물어보려 했더니, 아드님의 말이, 근자에도 여전히 되풀이해 살펴보고 계신다더군요. 그렇다면 감히 독촉해서 찾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천리 밖의 편지는 늘 전하기 어려운 것이 염려되니, 다 보신 뒤에는 믿을만한 인편을 찾아 속히 돌려보내 주심이 어떠실런지요? 천 번 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있다.101)

 

정민 교수는 2권의 책을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이십오언》으로 추정하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2권은 종교 서적일 수 있지만, 천문, 지리 분야의 서적일 가능성도 있다. 이 책들은 예산에 있을 때 빌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구환의 서한은 서학에 대한 홍유한의 관심이 순흥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홍유한은 독서와 학문 연구 외에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시간을 할애하였다. 만사나 제문을 지은 사람 중에 문하생(김만직, 김경직, 홍거, 홍필전, 서간유)과 시교생(이한기)이 있는데, 이들이 홍유한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유한은 ‘현우(賢愚)에 간격을 두지 않고 물으면 반드시 답해 주었기 때문에, 교화에 훈도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공경하고 본받고자 했다.’고 한다.102)

 

한편 1777년에 경상도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정부에서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피해가 고을 마다 다른 상황에서, 홍유한은 순흥의 굶주린 경색(景色)이 다른 고을의 10배도 넘는다는 이유를 들어, 특별히 진휼을 더해 줄 것을 관찰사에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03) 백성들의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홍유한의 적극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권준은 홍유한의 영남 생활에 대해 “공의 집은 영남으로 옮겨간 이후에 우환이 연이었고, 상사(喪事)가 거듭했던 탓에 생계가 조락하여 지금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표현하였다.104) 실제 2명의 며느리가 1777년과 1784년(4. 19)에 사망하였고, [표4]와 같이 집안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숙환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런 가운데 1784년 7월 2일 세자 책봉이 있었고, 이를 기념하여 산림(山林)의 숙덕(宿德)들이 천거되었는데, 홍유한도 재신에 의해 천거되었으나 낙점받지는 못하였다.105)

 

그 후 1785년 1월 24일에 홍유한은 권준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 중에 ‘유행하는 독감을 앓는데 묵은 병이 도졌다.’는 내용이 있다.106) 그리고 그로부터 6일 뒤인 1월 30일 홍유한은 사망했고, 4월 19일에 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장되었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홍유한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가계의 경우는 지계공파를 중심으로 홍유한 대까지 정리하였고, 생애는 홍유한이 거주했던 거주지별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정리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홍유한의 가문은 그의 증조인 홍만시 대를 경계로 이전에는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을 이룬 반면, 이후에는 독서와 수신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바뀌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홍만시가 ‘서변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후 홍중명과 홍창보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리의 실천과 선행을 베품으로써 가문의 덕(德)을 세우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이러한 집안의 가르침은 홍유한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그의 평생의 실천 내용이 되었고,107) 후손들에게도 유훈으로 전해졌다. 그 결과 홍중명 · 홍창보와 비슷한 행적이 홍유한에게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은 홍유한에게 미친 조와 부의 영향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이들의 건강 문제도 크게 작용하였다.

 

둘째, 생애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활동을 살펴보고자 했으나,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기존의 내용을 보완하는 정도에 머물렀고, 분량도 ‘이주 이유’를 밝힌 부분에 비해 상당히 소략했다. 다만 호구단자와 화회문기를 통해 한양의 거주지와 소유 토지 및 노비의 분포 상황 등 구체적인 사실들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성과라고 하겠다.

 

특히 호구단자를 통해 홍유한의 출생지가 아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차자리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고, ‘예산에 살고 있었다’는 달레의 기록이 출생지가 아니라 어릴 때 몇 년간 살았던 곳을 의미하는 표현임을 밝혔다. 아울러 홍유한의 순흥 거주와 관련해서, 서창재 뿐만 아니라 세의(世誼)가 있던 남양 홍씨와 봉화 금씨와의 관계도 새롭게 주목했다.

 

셋째, 한양에서 예산, 예산에서 순흥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서는, 홍유한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그 결과 한양에서 예산으로의 이주는 “부친의 사망,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으로 시사(時事)가 여의치 않았던 정치 상황, 본인의 병, 이병휴의 낙향” 등과 함께 예산에 있던 “소유 토지와 노비의 존재”가 직접적인 배경임을 살폈다.

 

예산에서 순흥으로의 이주는, “영남 지방이 갖는 학문적 위상을 전제로, 홍유한의 풍수관과 주거관, 그리고 1772년 이후 집안 형편의 위축과 자신의 숙환” 등이 고려된 결정이며, 홍유한이 예산을 떠나려고 한 것은 1765년 이전이고, 영남에 앞서 홍천에 우거하려한 사실도 새롭게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홍유한의 예산 이주 시기를, 기존에는 1757년으로 보았으나, 부친의 사망일과 장례일, 그리고 탈상 시기를 고려하여 1760년으로 수정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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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 홍유한을 주제로 다룬 논고는 다음과 같다. 홍승경, 〈농은 홍유한 선생의 생애[家狀]〉(1918), 《농은 홍유한 선생 유고집》(김홍영 역, 마백락 편), 학민출판사, 1995; 김구정, 《영남순교사》, 대건출판사, 1966; 하성래, 〈농은 홍유한, 그 생애와 사상〉, 《울뜨레야》 30~33, 1981; 차기진, 〈조선후기 천주교의 영남전파와 그 성격〉, 《교회사연구》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마백락, 〈홍유한 선생의 천주교 수덕 생활과 사상〉, 《농은 홍유한 선생 유고집》, 학민출판사, 1995; 서종태, 〈홍유한의 유교사상과 그 영향〉, 《부산교회사보》 13, 부산교회사연구소, 1997;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윤민구, 〈홍유한은 한국 최초의 신자인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제설의 검토〉,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속)》,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신대원, 〈복음의 토착화 문제, 그 원류를 찾아서〉, 《농은 홍유한선생 연구》(마백락 역·편저), 영남교회사연구소, 영주시 청문화관광과, 2009; 방상근, 〈박해시대 풍산 홍씨와 천주교〉, 《발로 쓰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 – 마백락 선생 교회사연구 50주년 기념논총》, 분도출판사, 2011; 신대원, 〈홍유한의 천주신앙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관한 유감〉, 《홍유한과 풍산 홍씨 가문의 천주신앙》, 안동교회사연구소, 2015; 마백락, 〈한국천주교회의 첫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천주교 수덕 생활과 사상〉, 《홍유한과 풍산 홍씨 가문의 천주신앙》, 안동교회사연구소, 2015;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 홍유한의 남인 인맥과 서학 공부, 〈가톨릭평화신문〉 1573호, 2020. 7. 19 발행.

 

2) 하성래 교수도 사상을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가계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 아래 홍유한의 가계를 소개한 바 있다. 그리하여 조부 홍중명에 대해서는 이형상이 쓴 제문(祭文) 등을 활용하고, 부친 홍창보에 대해서는 홍유한이 쓴 행장(行狀)과 이익이 쓴 묘지명(墓誌銘)을 활용하여 홍유한의 가계를 서술했다. 그런 가운데 증조와 조부의 병약한 체질이 홍유한에게 유전되었고, 조부의 효행사상이 홍유한의 천성과 덕행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했다(하성래, 앞의 논문(30호), 16, 13쪽). 

 

3)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외에, 왕실과 혼인을 맺은 풍산 홍씨로는 정명공주(선조의 장녀)의 부마인 홍주원, 정조의 후궁인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 숙선옹주(정조의 서차녀)의 부마인 홍현주 등이 있다.

 

4) 아들이 없었던 홍우전이 재종제(再從弟, 6촌 아우)인 홍세경(洪世敬)의 자식(홍수)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이준(李埈),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行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洪公墓誌銘〉, 《蒼石集》(1631/ 한국고전번역원 편, “한국문집총간64~65집”, 1991), 권16, 墓誌.

 

5) 손자의 손자.

6) 홍창보 엮음, 윤호진 옮김, 《문혈록》, 풍산홍씨모당공파종회, 2016, 61, 78쪽.

7) ‘풍산홍씨대종회 사이트’에 게재된 ‘풍산홍씨 세계도’ 참조.

8) 현손의 아들. 

9) 《문혈록》, 62쪽.

10) 《승정원일기》 인조 13년(1635) 6월 21일, 7월 8일; 《인조실록》 인조 13년(1635) 7월 8일.

11) 《실록》 등 관변 자료에는 홍만시(洪萬時)로 되어 있다.

12) 《효종실록》 효종 7년(1656) 5월 12일, 5월 14일.

13) 《승정원일기》 효종 6년(1655) 1월 18일; 효종 7년(1656) 3월 8일, 5월 13일.

14) 《문혈록》, 80, 117~118, 144~145, 169쪽. 

15) 《문혈록》, 149~151, 154쪽.

16) 《문혈록》, 95~96쪽.

 

17) 한태상은 1639년에 한무(韓楙)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한보(韓保)가 아들이 없어 그의 후사를 이었다. 1685년 1월에 사직참봉에 임명된 이후 1686년 12월에 제용봉사, 1692년 1월에 의금부도사, 6월에 사간, 1693년 5월에 개령현감, 1704년 2월 조지별제, 3월에 사의(司議), 8월에 전부(典簿), 9월에 연산현감(부임 전에 교체), 1705년 7월에 사도주부(司䆃主簿), 12월에 청암찰방에 임명되는 등 개령현감과 청암찰방으로 근무하던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12년 한태상의 호구단자에 거주지가 한성부 남부 회현방 장흥고동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홍창보는 한양에 있는 한태상의 집에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 《문혈록》, 36~37쪽

19) 둘째 딸은 한산 이씨 이해년(李海年)과 혼인하였다(《문혈록》, 37, 183쪽).

20) 마백락, 앞의 논문, 245쪽. 남필용(남이관 성인의 부친)은 1801년에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 가서 사망했다.

21)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쪽.

22)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02쪽.

23) 《문혈록》, 109쪽.

 

24) 서진(西晉) 성양(城陽) 영릉(營陵) 사람. 자는 위원(偉元)이다. 어릴 때부터 절조를 숭상했고, 박학다능(博學多能)했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해 나가지 않고 여막(廬幕)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묘소 곁의 측백나무를 붙잡고 울자, 흐르는 눈물에 젖어 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한다. 은거하여 학생을 가르쳤는데, 집안이 가난해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임종욱 편저,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2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6쪽.

26) 홍중서의 후손들도 홍양한 대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하였다.

27)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87쪽.

28) 홍유한이 극기 공부에 전념하고 겸(謙)을 중시한 것에 대해, 양명학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서종태, 앞의 논문, 27~28쪽).

 

29) 홍유한의 출생지와 관련해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홍유한이 ‘예산에 살고 있었다’고 했고(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296쪽), 김구정 선생은 이를 토대로 ‘예산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김구정, 앞의 책, 82쪽). 이에 대해 하성래 교수는 ‘예산 탄생설’을 부정하고, 홍유한이 아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논증하였다(하성래, 앞의 논문(31), 15~16쪽).

 

30) 홍방은 거주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부친과 형제들이 한양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홍방도 한양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31) 이 장을 작성함에 있어, 홍유한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호패, 호구단자, 화회문기를 활용했는데, 이 자료들은 종손인 홍기홍 선생께서 제공해 주셨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32) 임학성, 〈조선후기 한성부민의 호적자료에 보이는 時入의 성격〉, 《고문서연구》 24, 한국고문서학회, 2004, 318~319, 327쪽.

 

33) 호적은 3년마다 개편됨으로, 1714년 호구단자에 시입이라는 표현이 없다면, 3년 전인 1711년 이전에 이주했다고 하겠다.

 

34) 각주 29의 ‘예산에 살고 있었다’는 달레의 기록은, ‘예산 탄생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 일정 기간 예산에서 거주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3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75~176쪽.

 

36) 丁丑以後時事有難言者遂賣京第移居于禮山之餘村(《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44쪽). 그런데 홍승경이 작성한 〈家狀〉에는 이 부분을 “정축년 이후 시사(時事)가 날로 그르게 되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 드디어 한양의 집을 팔고 예산의 여촌으로 이사했다(丁丑以後時事日非有難言者遂賣京第移居于禮山之餘村)”라고 하여, 홍낙민의 말에 “日非” 2자를 추가하였다(《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4쪽).

 

37) 마백락, 앞의 논문, 23~24쪽; 신대원, 앞의 논문(2009), 70쪽.

38) 김영민, 〈영·정시대 풍산 홍봉한 가문의 부흥과 분열〉, 《사학연구》 100, 한국사학회, 2010, 149쪽.

 

39)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757) · 무인년(1758)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영조실록》 영조38년(1762) 윤5월 13일).

 

40) 최옥환, 〈사도세자의 죄와 벌〉, 《전북사학》 24, 전북사학회, 2001, 114쪽.

 

41) 하성래 교수는 ‘말하기 어려운 일’을 ‘유학자인 홍유한이 이단인 천주교를 신앙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이유를, ‘천주교를 신앙하고, 병을 치료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단정하였다(하성래, 앞의 논문(32), 15~16쪽).

 

42)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1쪽.

43)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35쪽.

44) 時吾先君亦以曾經侍從官亦退居於洪陽之花城亦與先生同志而有同歸約也(《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44쪽).

45) 《영조실록》 영조 35년(1759) 6월 29일; 영조 38년(1762) 윤5월 29일; 영조 39년(1763) 3월 3일, 4월 9일.

 

46) 김영천은 1778년 9월 24일에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779년 12월 25일 홍대용으로 교체된 김재악(金載岳)을 말한다(《승정원일기》 정조 2년(1778) 9월 24일; 정조 3년(1779) 12월 25일).

 

47) 홍유한은 순흥 이주 이후 홍유호로 개명했다.

 

48) 김재악의 부친은 상고당 김광수(金光遂, 1699~1770)이며, 김재악은 김광수의 장남이다(오상욱,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민족문화》 46, 한국고전번역원, 2015, 150~151쪽), 김광수는 1757년 12월 28일 양근군수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8월 2일에도 양근군수직에 있었다. 그러다가 1759년 7월 19일에 이헌진으로 교체된 듯하다(《승정원일기》 영조33년(1757) 12월 28일; 영조34년(1758) 8월 2일; 영조35년(1759) 7월 19일).

 

49)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 합동 · 의주로1가동 · 충정로2가동 · 충정로3가동에 있던 마을.

50)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35쪽.

 

51) 필자는 처음 홍유한의 예산 이주 시기를 1758년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서종태 선생님이 홍유한이 여묘살이를 했다면, 그의 예산 이주는 1758년보다 더 늦어질 수 있다는 지적을 해 주셨다. 현재 홍유한이 그의 조부인 홍중명처럼 3년의 여묘살이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묘살이는 16~17세기를 거치면서 《주자가례》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쇠퇴해 갔고,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안정복(安鼎福) 가의 상장례에서도 여묘살이가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거나, 17~18세기를 거치면서 분묘 곁에 설치한 여막을 상가로 옮겨오는 가내여소(家內廬所)가 확립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즉 성리학적 예법에 대한 이해의 심화 과정에서 예법에 없는 절차로 폐지의 대상이었던 여묘살이가 분묘를 중시하는 시속(時俗)과 후례(厚禮)를 추구하는 효자의 입장이 반영되어 완전히 폐지되지 않고 가내여소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金景淑, 〈18세기말 順菴 安鼎福家의 喪葬禮와 居喪生活〉, 《古文書硏究》 제50호, 한국고문서학회, 2017, 236~238쪽). 이것으로 보아 홍창보가 사망한 18세기 중엽에 양반가에서 조선전기와 같은 여묘살이를 반드시 실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홍유한 역시 가내여소를 설치하고 3년 상을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여묘살이의 여부를 떠나 필자는, 서 선생님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상주(喪主)인 홍유한이 굳이 상중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해 보았다. 그러면서 ‘김영천에게 보내는 서한’을 다시 한 번 검토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홍유한의 예산 이주가 탈상(脫喪) 후에 이루졌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홍유한의 이주 시기를 대상(大祥)과 담사(禫祀)를 마친 1760년 봄 이후로 수정하게 된 것이다.

 

52) 낙수의 계보는 “만시 → 중서 → 덕보 → 범한 → 낙수”로 이어지며, 홍유한은 중서의 동생인 중명 계열이다(《문혈록》, 96쪽).

 

53) 충청감사 박종악의 《수기》에는 홍낙민이 ‘무자년(1768)과 기축년(1769) 무렵에 낙향하여 예산 두촌면(豆村面) 호동리(狐洞里)에 터전을 잡았다.’는 내용이 있고, 홍낙민이 쓴 제문에는 ‘선생과 한 마을에서 10년을 살았다’고 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홍유한의 거주지를 홍낙민과 같은 두촌면 호동리로 추정한 바 있다(방상근, 〈충남지역 천주교회의 형성과 특징〉, ‘충남지역 천주교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위한 제1차 학술회의 ‘충남지역 천주교 유산과 특징’ 발표문, 2016. 12, 4쪽).

 

54) 마백락, 앞의 논문(2015), 13쪽. 

55) 원문에는 4소생으로 되어 있으나, 1714년 호구단자에는 5소생으로 나온다.

56)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사회와 천주교》, 흐름, 2007, 53쪽.

57) 강세구, 〈호서지방 성호학통의 전개〉, 《경기사학》 5, 경기사학회, 2001, 279~281쪽.

58) 강세구, 앞의 논문, 281쪽.

59) 차기진, 앞의 논문(2007), 53~54쪽.

 

60)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 홍유한의 남인 인맥과 서학 공부, 〈가톨릭평화신문〉 1573호, 2020. 7. 19 발행.

 

61)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9) - 광암 이벽,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가톨릭평화신문〉 1571호, 2020. 7. 5 발행.

 

62)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93쪽; 《순암집》권2, 上星湖先生書, 壬午.

 

63)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79~80쪽;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64)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6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44, 146쪽.

 

66) 장유승, 〈수기 수록 교회사 관련 기록 번역〉,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199쪽; 차기진, 앞의 논문(2007), 56쪽.

 

67) 홍유한의 영남 이주 시기는 1775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홍낙민의 제문(祭文)과 홍유한이 김영천에게 보낸 편지에 1775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병휴가 영남으로 내려가는 홍유한을 위해 송서(送序)를 작성한 것은 1776년 1월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영남 이주는 1775년에 결정되어 준비가 이루어졌고, 준비가 끝난 1776년부터 실제 거주하며 생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진소 신부도 이병휴의 송서를 근거로 홍유한의 영남 이사 시기를 1776년 음력 정월로 간주한 바 있다(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77쪽).

 

68) 1807년의 호구단자에는 홍낙운의 주소지가 동원면 등앙리(登央里)로, 1816년 호구단자에는 등영리(登瀛里)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홍낙운은 19세기 초에 구고리에서 등영리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69) 홍유한의 영남 이주에 대해서는 신대원 신부도 〈복음의 토착화 문제, 그 원류를 찾아서〉(69~74쪽)에서 언급한 바 있다.

70)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78~181쪽.

71) 차기진, 앞의 책, 106쪽, 하성래, 앞의 논문(33), 15~16쪽.

72)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71쪽. 

73)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23쪽.

74)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7~138쪽.

 

75) 《한국천주교회사》 상, 297쪽. 하성래 교수는 홍유한이 ‘권철신 등과 함께 천주교 신앙의 요람지를 건설하려는 뜻을 지니지 않았나’ 추정하였다(하성래, 앞의 논문(33), 16쪽).

 

76)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77쪽.

77)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86쪽.

 

78) 하성래 교수도 유훈을 인용하며 홍유한의 영남 이주를 설명하였다. 즉 홍유한이 영주로 옮겨간 것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을 찾는 순전한 택리 사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과 교화와 도를 행하기 위한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외면상으로는 병을 치료하고, 안으로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았다(하성래, 앞의 논문(33), 15~17쪽).

 

79)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2쪽.

80)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45쪽.

 

81)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을 내포라 한다. …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까운 곳은 학질과 염병이 많으며,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넓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구릉과 원습(原隰)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천석(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고 하였다(이익성 역, 《택리지》, 을유문화사, 1990(15판), 109쪽). 《택리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여사울은 홍유한이 거주하고 싶은 지역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82) 洪川之計 已聞於前 而中頓之敎 又承於今 可知老兄目下定計 在於洪庄也(《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98쪽).

83)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98~199쪽.

84)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97, 104, 108쪽.

8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23, 137쪽.

86)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04쪽.

87)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8~29쪽.

88) 각 시기의 호구단자에 수록된 노비들을 통계화한 것이다. 

89)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4쪽.

90)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8쪽.

91)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33쪽.

 

92) 이원순 교수도 홍유한의 이주 이유와 관련해서, “서울에서 예산으로의 낙향, 그리고 다시 순흥 땅 깊숙한 오지로의 이거는 홍유한 집안의 경제적 사정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병으로 고생하다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건강상의 이유도 관계지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이원순, 앞의 논문, 100쪽).

 

93) 一生之所沈淹者奇疾也 終身之所閱歷者阨窮也 未嘗有一日之安 … 常以疾病妨於窮格 不得盡力於道學爲恨 而平生用工專在克己(《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6쪽).

 

94)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23, 31, 34쪽.

9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51쪽.

96)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63쪽.

97)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63쪽.

98)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14쪽. 

99)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51쪽.

100)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64, 113, 109, 166쪽.

 

101) 西泰書兩種, 自尊所未還. 故業欲奉叩矣. 胤君言近猶閱, 若爾則不敢督索, 而千里外書緘, 常患難傳. 幸乞卒業之後, 討信便, 還如何? 千萬切仰[“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1)].

 

102)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67쪽.

103)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75~76쪽.

104)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9쪽.

105)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46쪽.

106) 《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8쪽. 

 

107) 권준은 ‘홍유한의 마음은 사람에게 인자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고[仁民愛物], 도는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도[博施濟衆]’라고 했고, 문하생인 서간유도 홍유한의 심(心)은 인민애물(仁民愛物)이며, 덕(德)은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고 규정했다(《농은 홍유한선생 유고집》, 134, 166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17, 202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87374&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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