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33: 나환우 통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닫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16 ㅣ No.1555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3) 나환우 통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닫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달았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스도로부터 오상을 받고 있는 장면.

 

 

‘인격(personhood)’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 ‘인격’은 ‘개인의 특질 혹은 특성, 개인의 인간성’이다. 하지만 본래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사용하던 말로, 가면을 쓴 배우들이 소리로써 통교하던 것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런 연유로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성삼위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데 실제로 오랫동안(적어도 18세기까지는) 사용됐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단어는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로 탈바꿈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이 관계성을 그 핵심 안에 내포하고 있는 단어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리처드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격체는 정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이다.(per sonare-가면을 쓰고 소리를 통해 정체성을 나누는 것) 이는 -이성과 창조의 선물에 의해- 신적 위격들과 모든 인간 인격들 사이에 서로 공유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눔은 나중에 포함되고 실현되는 것이거나 성사나 어떤 확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본래 정체성을 찾게끔 도와주는 것이기는 하다.”

 

로어 신부는 본래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되던 이 ‘인격’이라는 말이 전혀 엉뚱한, 아니 정반대의 의미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감을 표현한다. “우리를 현대의 개인주의로 내몰아온 많은 이론적 조합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 인격에 대해 ‘이교도적’ 이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삼위일체적으로 사용해온 이 인격-역동적인 인격체(sounding-through)-라는 단어를 결국에 가서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가깝지도 않은 ‘자율적 자기’라는 의미로 완전히 뒤집어 놓아버렸다.”

 

인간의 완전한 인격을 삼위일체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인격이 하느님에 의해 고유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그 이해의 시작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인격에다 하느님의 신적 모상을 심어주시어 관계성 안에서 당신과 통교를 하도록 해주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인격은 다른 피조물과도 그렇게 통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은 상호 통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다른 모든 존재와의 통교와 일치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토마스 머튼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 ‘홀로 있음(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존재와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 전체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가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생태적 회개’의 핵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창조적 관계성 안에 들어서는 것! 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모든 것의 근간이 들어 있다.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나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가 갑자기 내 가슴을 최상의 기쁨으로 채웠다. 그리고 나는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기쁨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위일체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시고 우리의 끝없는 기쁨과 환희이시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계시에서 나에게 보였는데, 그 후 다른 모든 계시에서 마찬가지였다. 계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거룩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노르위치의 율리안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14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856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