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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이야기: 축성생활의 정착과 발전 -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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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5 ㅣ No.647

[수도원 이야기 – 축성생활의 정착과 발전] 베네딕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축성생활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는 다시 축성생활 공동체의 설립 열풍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이가 축성생활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광야에서 우왕좌왕했고 이때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내려 주신 것처럼, 세속에서 탈출한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틀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6세기 초 서방의 측성생활자와 하느님을 연결할 중재자는 베네딕토였다.

 

 

로마를 뒤로 하고

 

베네딕토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 마을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약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의 허락을 얻어 수도 로마에서 유학하게 되었다.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의는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500년이 가까웠다. 조선왕조도 그랬지만 500년이라면 자칫 해이와 이에 따른 쇠퇴를 부를 수도 있을 만한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도 그러한 경향이 팽배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태와 향락의 기풍이 만연했다. 배울 것이 없었다.

 

베네딕토는 절망했다. 그는 엔피데라는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그곳에서는 적은 수의 사제들이 경건한 공동생활을 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 베네딕토는 만족했다. 나날이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했다.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성 베네딕토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유해를 함께 모신 무덤(좌),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 수도원(우).

 

 

유혹, 고독과 난관

 

그러던 어느 날부터 베네딕토를 통해 여러 기적이 일어났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베네딕토의 반응이 의외다. 그는 기적에 대해 퍼지는 소문을 고통으로 여겼다. 베네딕토는 사람이 찾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꼭꼭 숨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악마로부터 큰 유혹을 당한다. 특히 정결을 위태롭게 하는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이 물러섰다고 한다. 이런 온수 생활은 3년간 계속되었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명상만으로 보낸 나날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목동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드디어 세상으로 한 발 나온 것이다. 베네딕토가 목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참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베네딕토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만들이 함께 생활했다.

 

어느 날 인근의 수도원 원장이 서거했다. 그러자 수사들은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일 원장에 되어 주기를 청했다. 베네딕토는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수락한다. 그리고 원장이 되자마자 엄격한 축성생활을 요구했다. 수도원 개혁에 나선 것이다.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사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잘 생활해 왔는데, 갑자기 엄격한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수군거렸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결국 일을 내고 만다. 점심 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권한 것이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졌다.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초기 수도원 생활이 얼마나 큰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수도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모두 베네딕토가 성덕으로 이끈 결과였다. 수도원 하나로는 모든 수도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 나갔다. 분가한 수도원에는 신뢰할 만한 성덕 있는 수도자를 원장으로 보냈다.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 수도원 성당 내부 전경.

 

 

몬테 카시노와 규칙서

 

성인은 이후 525년 무렵 이탈리아 나부의 몬테 카시노에서 새롭게 축성생활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몬테 카시노 인근 주민들은, 그리스 신 아폴론에게 바친 신전이 있을 정도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이 신전을 곧장 파괴하고 성덕의 모범으로써 마을 주민을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5년 뒤에는 이곳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과 성 마르티노 성당 그리고 수도원을 세웠다.

 

실로 서방 수도원의 명실상부한 발상지로 일컬을 만하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금욕 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한 명의 원장을 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서」(Regula)는 오늘날 모든 수도회 규칙의 모태가 된다. 베네딕토가 오늘날까지도 ‘축성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규칙서」에 따르면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수도원은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이다.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한 이 규칙은 순명을 최대의 덕으로 삼았다. 또 재산의 사유화를 금지했으며,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르기를 요청했다. 나아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도록 했다.

 

눈여겨볼 점은 축성생활의 중심을 ‘성무 일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그러했듯이 수도자의 하루도 기도와 독서와 노동으로 채워졌다. 「규칙서」는 특히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를 하루에 두세 시간 하도록 요구한다.

 

오늘날의 신앙인에게 베네딕토의 「규칙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감동적인 내용을 담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글을 소개한다. “서방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이며, 저의 교황 본명 주보이기도 하신 베네딕토 성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라며 시작하는 이 글은 성현주 마리아 폴 수녀(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가 번역했다.

 

“오늘날 진정한 진보를 찾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 여정에 안내의 역할을 할 빛이 될 수 있는 베네딕토 성인이 쓰신 「규칙서」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위대한 수도승이신 성 베네딕토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참스승이시며, 그가 세운 학교 교과서인 「규칙서」에서 우리는 참인간성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베네딕도회협의회 엮음, 「교부」(코이노니아 선집 6-1), 들숨날숨, 2017).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지낸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선종했다. 마지막 때에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하지만 성인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인의 삶은 입에서 입을 거쳐 당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많은 신자가 축성생활의 잣대이자 올바른 신앙의 전형이었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기를 원했다. 8세기 말부터 7월 11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해 왔으며,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4년 10월 24일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이다. 1998년 입회하고,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로마 ‘이디 제약회사’(IDI Farmaceutici)의 이사, 알바니아 NSBC 가톨릭대학교 부설 병원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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