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세계교회ㅣ기타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50: 한국 정부가 유엔 승인을 받기까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14 ㅣ No.631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50) 한국 정부가 유엔 승인을 받기까지


장면과 오브라이언의 만남, 한국 현대사의 매듭을 풀다

 

 

1948년 유엔 총회에 특사로 파견된 장면 수석대표가 한 외국 대표에게 신생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찬성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장면 대표에게 발급된 외교 여권. 출처=「건국·외교·민주의 선구자 장면」.

 

 

뜻밖의 만남! 성경 속에는 ‘뜻밖의 만남’이 많습니다. 모두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만남, 야곱의 우물에서의 만남, 저는 이 두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곤 합니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도 뜻밖의 만남은 인생을 살맛 나게 합니다. 먼 길을 가다, 아니면 홀로 여행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인연이 되어 고달픈 인생살이가 펴지기도 하고, 진퇴양난의 어려움이 풀리기도 합니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서도 뜻밖의 만남이 주는 은총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유엔 총회와 한국 특사

 

1948년 12월 12일, 유엔이 신생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날입니다. 세상이 아는 장면 박사(제2공화국 국무총리), 가톨릭 신자들이 아는 장면 사도 요한은 1948년 10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축일을 맞아 프랑스 파리 근교로 성지순례에 나섰습니다. 당시 장면은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유엔 3차 총회에 한국 정부의 특사로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장면에게 “유엔 총회에서 정부 승인을 받아오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장면의 임무 수행은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시쳇말로 ‘맨땅의 헤딩’ 수준이었습니다. 한국 특사를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고, 총회 의장을 만나 사정을 하려고 했지만 면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시 유엔 총회에서는 이스라엘 문제가 핫이슈로 부각되어, 한국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의사봉을 쥐고 있는 에바트 의장을 만나야 했는데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호주노동당(ALP) 출신으로 외무장관을 지낸 분이었습니다.

 

장면은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도움을 청하려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기도가 통한 것일까요. 장면은 성지에서 귀인을 만납니다. 그 뜻밖의 만남이 꼬이고 꼬인 매듭을 풀어 줄지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호주 시드니 대교구의 오브라이언 부주교! 장면은 성지순례 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뭐 큰 기대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브라이언과 에바트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오브라이언은 그 후 에바트를 만나 장면의 고민을 전달하며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바티칸은 이미 한국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비오 12세 교황은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에게 한국을 지원하라고 특명을 내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12월 12일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에 비우호적이기만 했던 에바트 의장이 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안건으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건’을 공식 상정했고, 장면 대표에게 발언권도 준 것입니다. 장면은 유창한 영어 연설로 각국 대표단을 감동시켰습니다. 투표 결과는 가결 46표 반대 6표, 압도적인 표 차이였습니다.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 진영의 방해 공작으로 한국 정부의 승인이 물 건너갈 뻔했지만, 한국 대표단이 ‘9회 말 역전 홈런’을 친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그날 한국 정부가 유엔 승인을 받지 못했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3년 후 6·25 전쟁이 터집니다. 한국은 풍전등화의 생태로 몰립니다. 유엔군이 극적으로 참전하여 한국을 살립니다.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면 유엔군 참전이 가능했을까요? 1948년의 ‘파리 대첩’은 바로 호국의 토대였습니다.

 

 

교황청과 가톨릭의 지원도 한몫

 

미국 유학파인 이승만 대통령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국제 정세에 밝았습니다. 세계 외교무대에서의 가톨릭의 위상과 교황청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지요. 이승만은 교황청과 가톨릭 네트워크의 지원을 겨냥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면 사도 요한을 특사로 선택한 게 분명합니다. 파리 대첩은 교황청과 가톨릭 네트워크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론칼리 대주교는 그로부터 10년 후 제261대 교황(요한 23세)이 되어 가톨릭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개혁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뒤이어 제262대 교황(바오로 6세)이 된 몬티니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한 개혁 내용을 착실히 실행했습니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두 교황은 모두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13일, 이백만(요셉,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1,40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