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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니가 가르쳐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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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12 ㅣ No.814

[허영엽 신부의 ‘나눔’] 어머니가 가르쳐준 기도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서 항상 “엄마!”하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안 계신 빈집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항상 빨래나 다듬이질, 음식준비, 바느질 등 집안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집안일을 하시다가 내가 집에 오면 반기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손 씻고 올라와서 엄마 빨래 좀 저쪽에 앉아서 잡아당겨 주렴.”

 

빳빳하게 마른 빨래를 두 손으로 쥐고 어머니 쪽에서 오른손으로 당기면 내 왼손으로 잡고 빨래가 앞으로 훅하고 당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오른손으로 힘을 주어 내 쪽에서 빨래를 당기면 어머니는 꿈쩍도 안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내가 무슨 쓸모가 있었는지(?)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다 내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 “나머지는 엄마가 할 테니 이제 들어가 숙제하렴.”하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저녁엔 방안에 넓게 이불을 펴놓고 꿰매시다가 이따금씩 “바늘에 실 좀 꿰어주렴”하고 부르셨지요. 옆에서 엎드려 책을 보고 있던 내가 단숨에 꿰어드리면 “아이쿠! 바늘도 잘 꿰는구나” 하셨습니다. 어린 나는 바늘 꿰는 게 뭐 힘든 일일까 생각하면서도 내가 어머니를 도와드릴 수 있다는 것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를 기억할 때 떠오르는 대부분의 모습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쉬고 계신 모습은 기억에 없습니다. 밤중에 자다 깨 어머니를 찾을 때면 십중팔구 어머니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작은 소리로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안개처럼 몽환적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편안하게 다시 잠들던 때가 생각납니다.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늘 내 옆자리에 이불을 깔았던 동생 신부는 특이한 잠버릇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는데 내 혼잣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곤히 잠든 동생에게 “오늘 뭐하고 놀았니? 뭐가 제일 재미있었니?”하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대답하곤 했습니다. 다음 날 동생에게 “너 어제 어디 갔었다며?”하면 “그걸 어떻게 알아?”하며 어리둥절해 하곤 했지요. 밤중에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조금 크다 싶으면 동생은 자면서도 뭐라 뭐라 중얼거렸습니다. 뭐라는지 가만히 들어보면 어머니의 기도를 따라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는 알아듣겠는데 그다음엔 영락없는 옹알이였지요. 천방지축 동생이 자면서 어머니와 묵주기도를 함께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납니다.

 

사제가 되어 월요일 휴일에 집을 찾을 때도,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뜨면 어머니는 항상 곁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요즘 새삼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겠지요. 언젠가 어머니께 장난처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 묵주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성모님도 만나셔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묵주기도를 마치고 성호를 긋고 나면 어느 때는 성모님이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계신단다.” “아! 그래요?” 그때는 어머니 말씀이 못미더워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귓등으로 흘려듣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그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났습니다. 아, 그때 성모님에 대해서 더 물어볼 걸 하고 후회가 됩니다. 성모님이 어떻게 생기셨어요? 예쁘시죠? 몇 살이나 돼보이셔요? 무슨 옷을 입으셨어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평생 묵주를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홀로 세상을 떠나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셔서 세수를 하시고 옷을 갈아입고 묵주기도를 드리신 후 다시 누워 영원히 잠드셨습니다. 어머니와 이웃에 사시는,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가 장례 후 저희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중에 소리가 들렸어요. 혼자 사시는 어머니 집안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찬송가 같은 것을 부르는 소리도 크게 들렸어요. 그런 적이 없는 데 하도 이상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어요. 분명히 성가 부르는 소리였어요.”

 

처음 그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어머니는 돌아가신 날 혼자 계셨고 찾아온 사람들도 없는데 그 할머니가 다른 집 소리를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성모님께 기도를 열심히 하셨으니 그렇게 성모님의 천사들이 마중을 나왔나보다 생각하며 혼자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열심히 기도를 하셨으니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선종(善終)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어딘가에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에게 기도를 배우셨습니다.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외할머니도 항상 어머니처럼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외할머니 방에서 자다보면 아주 밤늦도록 꾸벅꾸벅 졸면서도 무릎 꿇고 묵주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는 어머니에게 배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누나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어머니가 기도하는 방식, 모습을 닮아서 기도를 하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외할머니는 특히 묵주를 쥐고 바로 잠에 빠지시기도 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시는 날에도 묵주기도를 하시는 중 쭈그린 채 한참을 가만히 계셨다고 해요. 옆에서 잠을 청하시던 외할버지가 일어나셔서 다른 방에 있는 가족들에게 담담하게 말하셨다고 해요. “얘들아! 네 어머니가 하늘로 떠나셨다.” 어머니는 그런 외가의 분위기에서 자라셨으니 당연히 기도가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는 늘 항상 내편이 되어주셨고 내 힘이 되어주셨던 분입니다. 어머니가 일 년에 몇 번 외가댁에 가실 때가 있는데 그때 집에 돌아와 “엄마!”라고 외치고 난 후 대답이 없으면 온 집안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허전했던 기억도 또렷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면 항상 계실 것 같은 어머니가 더 이상 그곳에 계시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 그 공허감을 더 크게 느낄 것이 무서웠으니까요. 그 대신 내 마음속에 그리고 어딘가에서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고 계실 어머니를 상상하곤 합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기도, 그 기도가 가장 소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기를 바라시나요? 자녀들이 우리를 기억할 때 어떤 모습을 가장 많이 떠올릴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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