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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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교회 안에서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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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02 ㅣ No.2003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교회 안에서의 일치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개인 혼자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제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주교를 포함한 다른 성직자는 물론 모든 형제자매와 일치하고 협력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사제품을 받은 후 순교하기 전까지 페레올 주교에게 여러 차례 서한을 보냈다. 그중 옥중에서 보낸 서한을 보면, 그가 페레올 주교를 얼마나 극진히 공경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지극히 사랑하올 저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이렇게 적었다.

 

“정신적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저의 아버지이시며 지극히 공경하올 저의 주교님께 마지막으로 저의 인사를 드립니다.”

 

최양업 신부도 페레올 주교에게 각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 귀국 후 페레올 주교를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드렸고, 그다음으로 교우촌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855년 조선의 새 교구장으로 임명된 베르뇌 주교의 부임을 매우 기뻐하며 이 소식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착하신 목자 갑사 명의의 베르뇌 장 주교님을 영접하였습니다. […] 주교님을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마침내 우리 안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는 최양업 신부가 베르뇌 주교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1842년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그곳을 떠나온 다음에도 스승 신부들에게 지속적인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스승 신부들도 그들에게 정성 어린 답서를 보내왔다. 이렇게 박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선의 젊은 사제는 교회와 일치하고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에 조선은 물론 중국에도 성직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두 사제는 장상 주교와 사제들과 끊임없이 연락하며 일치하였고, 그렇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선교와 사목 활동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을 기울여 나갈 수 있었다.

 

참조

조규식,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심포지엄, 2021.

 

[2021년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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