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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많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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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19 ㅣ No.673

유럽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많은 까닭은?

 

 

독일 유학 때 지도교수님과 수도원으로, 답사를 다닌 적이 많습니다. 수도원 도서관에 보관된 귀중한 필사본을 보기 위해서였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멜크 수도원이나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도 답사 장소였습니다. 답사한 수도원 중 열에 아홉은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어서, 당시 홈피로 사진을 본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유럽에 베네딕도회 수도원만 있냐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수도회도 많은데 왜 그런지 그 맥락에서 성녀 오딜리아의 전기를 좀 더 살펴보려 합니다. 전기에는 7~8세기 유럽 수도원 제도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모습을 엿볼 수 있거든요.

 

전설에 따르면, 홧김에 아들까지 죽인 공작은 여생을 수도원에서 보내며 속죄의 삶을 살다가 딸인 오딜리아에게 수도원과 모든 재산을 넘겨줍니다. 대신 죄 많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수도 공동체와 기도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죠. 기록상 공작은 자신의 영지 두 곳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날 ‘성녀 오딜리아의 산’이란 뜻인 몽생트오딜(Mont Sainte-Odile)에 있는 호엔부르크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이 건강한 사람조차 오르기 힘든 산꼭대기에 있었지만, 4세기 시리아와 이집트 수도원처럼 속세를 떠나 은수 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일랜드나 잉글랜드에서 오는 순례자나 주변 환자들을 보살피는 활동도 펼쳤고, 남성 수도자까지 받아들여 사제가 되도록 했다고 하니까요. 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물이 풍부한 산발치에 병원을 갖춘 니더뮌스터 수도원까지 짓습니다. 이렇게 성녀는 수녀원장으로서 130여 명의 수녀를 이끌며, 평생을 검소하고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했고, 조카인 에우게니아와 군드린데가 뒤를 이어 수녀원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이 그 지역의 선교 중심지이자 순례자의 쉼터였고, 또 후원자를 위해 기도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귀족이 교회와 수도원은 짓고 세습했다는 사실이 낯설겠습니다만, 중세 초 유럽 상황은 조금 특이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서부 지역과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지역은 옛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뒤늦게 7세기에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로 신앙을 받아들인 지역입니다. 가톨릭 중심지인 로마가 아니라 바다 건너 머나먼 섬나라에서 수도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겠다고 온 겁니다. 아일랜드는 5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는데, 로마의 손길이 닿기 힘든 변방이어서 교구와 같은 교계 제도 없이 수도원 중심으로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변방이었던 덕분에 유럽 본토가 게르만족 대이동으로 대혼란을 겪는 동안 안정적으로 성장해, 수백 년 동안 ‘성인과 학자의 섬’으로 유럽의 선교 불씨를 되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역사 속의 하느님 섭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일랜드 수도자들은 ‘자발적인 추방’을 가장 큰 고행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6세기 말 고향을 떠나, 스코틀랜드를 거쳐 사나운 게르만족이 득실대는 낯선 유럽 본토 선교에 나섭니다. 이때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이들을 도와 자기 영지에 수도원을 많이 짓습니다. 종교 목적 외에도 수도원을 문화 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있었고, 자기 노후나 자식을 위해 지은 곳도 있었죠. 그 과정에서 옛 로마 제국의 지역 교구 주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만, 7세기에는 도시 아닌 지방 곳곳까지 300여 개의 수도원이 세워집니다. 수도원은 그 지역의 종교 문화적 중심지가 되죠.

 

수도 공동체의 형태도 다양했습니다. 8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수도원은 아일랜드 선교사인 골룸바노 성인(543-615)의 수도 규칙을 따라 살거나, 정주 생활을 중시한 이탈리아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 규칙이 혼합된 규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난, 독신과 같은 서원을 하는 수도자와 다르게, 서약 없이 그 지역의 교회법에 따라서 생활하는 재속 성직자나 동정녀들도 있었습니다. 또 그 변형도 있었고요. 오딜리아 성녀의 전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요. 전기를 보면, 니더뮌스터 수도원이 완공된 뒤, 성녀가 수녀들과 어떤 규칙에 따라 살지 논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처음 수녀들은 수도 규칙을 선택하려 했다가, 후배들이 엄격한 수도 규칙으로 힘든 생활을 할까 염려한 성녀의 제안에 따라 만장일치로 교회법에 따라 생활하는 수도 공동체 삶을 택합니다.

 

사실 교회를 이용해 나라를 굳건히 통합하려는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는 일찍부터 수도원에도 하나의 기준을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오튕 공의회(670년경)부터 제국의 모든 수도원에 베네딕도 규칙을 적용하려 했고, 수도원에서 규칙에 따라(sub ordine regulari) 사는 수도자와 주교의 감독 아래 교회법에 따라(sub manu episcopi, sub ordinae canonico) 사는 재속 성직자와 동정녀의 기준도 정하려 했습니다. 기존 수도원과 교구 사이의 갈등도 문제였지만, 수도원이 저마다 통치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직접 감독을 하려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루도비쿠스 피우스 시기인 816-819년 아헨 공의회의 결정으로 모든 수도원은 베네딕도 규칙을 의무적으로 따르는 결정에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공의회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행여 황제가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황제처럼 아빠스(수도원장)의 임명권을 좌지우지할까 염려하던 이들이 많았거든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혼란스러운 수도생활을 개혁하여 그리스도교 열정을 되살리려는 아니아네의 성 베네딕도(747-821)의 역할이 컸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장벽이 계속 개혁의 발목을 붙잡습니다만, 이후 몇 백 년간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죠.

 

중세 초 선교 과정과 수도원 발전 모습을 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 하느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 차윤석 베네딕도 –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뒤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분도통사」를 비롯한 여러 번역을 했으며, 「교양으로 읽는 용선생 세계사」(1-15권) 기획, 집필했다. 현재 <사회평론>에서 단행본 본부장을 맡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여름(Vol. 54), 차윤석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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