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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명화 속 순례: 순례의 역사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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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14 ㅣ No.1964

[명화 속 순례] 순례의 역사와 의미

 

 

엘 그레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순례자 복장을 한 성 야고보 사도, 1600년경, 뉴욕, 개인 소장.

 

 

2019년 9월, 코로나19로 순례의 길이 막힐 줄 몰랐던 시기에, 나는 올케언니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거기서 만난 한국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질주하듯 전투적으로 걷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 속에 끼어 어느새 열심히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길에서 만난 크고 작은 경험들은 지나온 내 삶의 모든 면이었다.

 

순례길에서 나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았다. “길 → 진리 → 생명”이 순서였다. 이 명제가 바뀌면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확한 목적지를 향해 올바른 길에 들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뒷골목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내 이웃을 생각하며, 이 나눔의 꼭지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교 순례의 역사에서 최고 고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이셨다. 길 위에서 살았던 그분의 발자취는 사도들에 이어 2000년 교회사 여정에서 수많은 성인성녀와 선교사들로 이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분으로 그림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1600년경 엘 그레코(El Greco)가 그린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순례자 복장을 한 성 야고보 사도」를 소개한다. 야고보 사도는 맨발에 지팡이를 짚고 모자와 성경을 들고 험한 길도 외면하지 않고 다녔다.

 

순례(pilgrimage)라는 말은 라틴어 페레그리누스(peregrinus)에서 유래한 말로, 페르(향해서) + 아제르(시골)의 합성어다. 도시에 살지 않는 사람, 문명이 결핍된 곳에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곧 낯선 곳에 있는 ‘이방인’(straniero)을 뜻했다. 훗날 의미가 발전하여 특수한 목적이 잇는 여행,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반복되는 일상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정 기간 ‘구룩한 것’과 결부시키는 행위를 일컬었다.

 

순례를 떠나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착하기보다는 자발적 이방인이 되어, 이방인의 조건인 내적, 물질적 고생과 위험을 감수하고, 영적인 양식을 추구한다.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자기를 더 깊이 존재론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결핍으로 인한 위험과 희생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봉헌하려고 한다.

 

거의 모든 고등 종교는 역사적으로 이런 유사한 형태와 목적의 순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일생에 한 번 메카에 들르는 것을 ‘하즈’라고 하여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로 간주하고, 불교에서는 순례를 자기를 발견하는 여정으로 생각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시간과 위험과 비용이 줄어든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의 거룩함도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순례를 한 번쯤 해 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신앙인의 공통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순례의 역사를 연대기 순이 아니라, 순례의 형태로 최대한 간략하게 개괄해 보기로 하겠다. 우선, 그리스도교 초기의 순례는 개별적이고 사적인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첫 번째 밀레니엄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여 뭔가 달라질 세상을 기대하며 순례의 길에 올랐고, 그 규모가 커지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형태와 목적은 사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순례의 두 가지 형태다. ‘은총을 바라는 순례’와 ‘참회(혹은 속죄)의 순례’다.

 

‘은총을 바라는 순례’는 말 그대로 영적 물적 은혜를 받기 위한 것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의 ‘회심 여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세상일에 얽매여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으로 고개를 돌려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는 사는 지역 순교 성인의 성지를 찾고, 멀리는 예루살렘 · 로마 · 산티아고 등을 찾았다. 성지에서 순례자는 ‘이방인’이 되는 훈련을 한 후, 남은 생을 이승의 이방인으로 살 것을 다짐하며 삶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순례의 대표적인 인물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 황제기도 했던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는 ‘성지(Terra Santa)’라는 개념도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거룩한 장소’, ‘성스러운 곳’이 제정되고 순례가 신앙인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참회의 순례’ 역사는 구약 성경에서도 그 모델을 찾을 수가 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된 것’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빈곤 속에서 미지의 위험한 땅을 방황하며, 누군가의 자선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을 일컬었다. 살던 지역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를 가시적으로 표시해야 했다. 발가벗겨 쫓겨나 거적을 걸치고, 맨발에 손목과 다리에는 쇠고랑을 찼다. 중세기 전기들을 보면 누가 갑자기 기적적으로 쇠사슬이 끊어졌다는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하느님 자비의 징표를 부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세기 중반에 이르러, 순례자들은 덜 모욕적인 표시로 지팡이와 가방 같은 것을 들고, 가려는 성지의 상징을 모자나 망토에 달고 다녔다. 카를루스 왕조 시절 이번 순례 행태는 공적으로 발전했다.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서 살인과 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을 로마로 보내 교황이 직접 생사를 결정하게 했다. 범죄자로서도 무서운 자기 주교보다는 조금이라도 자비할 것 같은 교황을 찾아 로마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일종의 면책 방법으로 순례를 강요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런 로마를 향한 ‘참회의 순례’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심이 더해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방문하는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이 두 가지 순례 유형은 섞이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여 순례자는 일부러 속죄할 것을 찾기도 했다. 중세 말기에 접어들어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순례를 신앙 생활의 기본적인 체험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전대사의 은혜를 더해주기도 했다. 중세기 대규모 순례는 인구 이동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교역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아가 점차 순례의 길에 들어서는 ‘호스피시움’(hospitium)이라고 하는 순례자 숙소는 병들고 지친 순례자들의 중요한 쉼터가 되어 주었다.

 

순례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 목적 외에도 경제적,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 탈환에 목숨을 걸었던 것과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 과정에서 순례자들의 유입을 민족 결집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정치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순례의 불변하는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목적은 신앙과 결부되어 회개와 구원의 여정으로 들어선다는 데 있다.

 

* 김혜경 세레나 - 로마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선교학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가톨릭대, 서강대, 성심여대 등에서 가르쳤다. 이탈리아 관광청 공인 가이드이며 현재 피렌체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다. 「일곱 언덕으로 떠나는 로마 이야기」,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역사와 의미」, 「인류의 꽃이 된 도시 피렌체」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도 역임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봄(Vol. 53), 김혜경 세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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