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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새 천년기를 연 서울대교구장(정진석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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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04 ㅣ No.655

새 천년기를 연 서울대교구장


작은 교회로 공동체성 발휘하고 선교 운동에 주력

 

 

- 정진석 추기경은 2000년 대희년을 소외된 이들과 시작했다. 1999년 12월 22일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자를 위한 2000년 대희년 맞이 성탄 거리 미사’를 봉헌했다.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진석 추기경은 고 김수환 추기경에 이은 한국 교회 두 번째 추기경으로 1998년부터 14년간 서울대교구를 이끌었다. 청빈한 교회법학자로 새 천년기를 연 교구장으로서 새 천년기에 걸맞은 교회로 성장하는 데 초석을 다졌다. 전반적인 사목 분야를 전문화ㆍ세분화하고 사람 중심의 작은 교회를 표방했다. 고 정진석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업적을 살펴본다.

 

 

몸집이 작은 교회 강조, ‘지구 중심 사목’ 펼쳐

 

1998년 6월 29일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정진석 추기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구 중심의 사목을 펼친 일이다. 7월 16일 첫 사제평의회를 열고, 지구장 중심의 획기적인 교구 운영 방안을 제시했다. 직선제로 지구장을 선출함으로써 지구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이와 함께 정 추기경이 지구별 특성에 맞춰 다양한 사목을 시도한 것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많은 지구에서 지구 운영위원회를 별도로 설립해 청소년ㆍ선교ㆍ사회복지ㆍ교육 담당 신부를 임명해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사목을 시도했다. 직장 중심, 특성화 사목을 추진하면서 교구에서 처음으로 경찰사목 사제를 임명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밀집한 지역에 4곳의 선교 본당을 설립한 것도 정 추기경이었다.

 

몸집이 작은 교회와 소공동체 활성화는 그가 착좌 전부터 마음에 담아 둔 사목 과제였다. 당시 대형화되어 가는 본당 공동체는 서울대교구가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1990년대 들어 서울대교구는 규모가 커졌고, 본당 구성원 간의 대화와 협력, 일치와 친교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 추기경은 본당이 대형화될수록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많다고 염려했다.

 

- 정진석 추기경은 성전 신축으로 신자들에게 작용하는 재정적 부담을 덜고, 공동체의 규모를 작게 나눔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발휘하자는 취지로 공동사목 제도를 운영했다. 2005년 10월 9일 공동사목 출범 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서명하고 있다.

 

 

그는 1998년 11월 23일, 교구 사제들에게 서한을 보낸다.

 

“관할 인구 9만 명 이상 신자 수 7000명 이상이 되는 본당은 1999년 이내에 새 본당 분할 신설이 요망됩니다. 본당 분할 신설이 시급히 요망되는 곳에서는 기존 본당 내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을 일절 금지합니다.(중략) 교구 사제의 주 임무는 선교와 사목임을 명심해 주시고 각 본당에서는 매년 신자 수 10% 증가를 위한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주십시오.”

 

그는 항상 ‘몸집이 작은 교회’를 강조했고, 본당 한 군데에 신자 3000~4000명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며 본당 분할을 적극 독려했다.

 

 

서울대교구 복음화율 10% 돌파

 

1998년 말, 서울대교구의 복음화율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했다. 당시 교구 신자 수는 125만 3392명으로, 복음화율이 전년도의 9.94%에서 0.28%p 증가한 10.22%를 기록했다. 특히 성인 영세자의 증가율이 두드러졌고, 명동본당이 한해 1084명의 새 영세자를 배출했다.

 

이 같은 결과는 정 추기경이 항상 선교를 강조하며, 선교 운동에 주력한 노력의 결실로 평가받았다.

 

정 추기경은 사목자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둔 것은 선교였다. 그에게 선교는 사목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의 기준은 ‘선교에 도움이 되는가?’였다. 정 추기경은 그의 임기 동안 복음화율을 18%대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고, 교구 사목의 역량은 선교에 집중됐다.

 

- 2006년 6월 25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환경의 날 기념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은총과 평화의 대희년’을 연 교구장

 

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1990년대 말은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뤘고, 민주주의 개혁을 시도하던 때였다.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수많은 노동자가 마땅한 안전망 없이 거리로 내몰려야 했다.

 

정 추기경은 2000년 대희년을 가장 소외된 이들과 시작했다. 1999년 12월 22일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자를 위한 2000년 대희년 맞이 성탄 거리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해 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2001년 1월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를 ‘은총과 평화의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희년에만 여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열었다. 바티칸의 성문 개방을 시작으로 교구마다 대희년 개막 예식을 거행하면서 은총의 대희년을 열었다.

 

“대희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를 믿고 죄악으로부터 회개하여 거듭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2000년 대희년이 우리 개개인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지난날의 어두운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12월 25일 낮 12시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대희년 개막 예식과 기념 미사에서 “우리들이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며 “정의와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뜻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노드, 변화와 쇄신의 씨앗을 심다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한국 교회에는 시노드의 바람이 불었다.

 

새천년기 사목 방향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으로서 그동안 교구가 양적ㆍ질적으로 팽창하면서 교구의 사목을 반성하고 평가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1999년 8월,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시노드 개최를 건의하면서 시노드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정 추기경은 1999년 11월 8일, 서울대교구 전체 사제모임에서 2000년 사목교서를 발표하며 시노드의 개최 배경과 필요성을 알렸다. 그는 사목교서에서 시노드 개최 배경을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고 설명했고, “변화와 위기의 시대를 직면하며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리와 소망을 잘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0년 1월 6일에 시작된 시노드는 2003년 9월 28일 폐막 미사를 거행하면서 4년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교구 구성원이 한마음이 되어 △ 평신도 △ 수도자 △ 성직자 △ 청소년ㆍ청년 △ 선교와 교육 △ 교회 운영 △ 사회 복음화라는 7가지 의제를 바탕으로 교구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정 추기경은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로」에 서명하며, 새로운 순례의 여정을 이어갔다.

 

정 추기경은 시노드의 결실은 과정보다도 실천에 있다고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시노드 정신에 따라 교구의 사목 정책과 비전을 기획하고, 시노드 후속 실천 계획들을 조정ㆍ감독하는 상설 기구가 필요했다. 이에 이 업무를 담당할 기획조정실을 신설하고, 지구와 본당의 사목 활동을 지원하고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할 통합사목연구소를 설립했다.

 

- 의정부교구 신설은 교구장 재임 시절 중 일어난 큰 사건 중 하나였다. 2004년 9월 의정부교구 신설 감사미사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교구 분할, 의정부교구 신설

 

의정부교구 분할은 교구장 재임 기간에 일어난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시노드 폐막 후 시노드 후속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 관할 지역인 경기도 북부 지역을 분할해 의정부교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정 추기경이 교구 분할 청원을 낸 지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교구 분할 청원이 빠르게 받아들여졌고, 사제들에게 의정부교구로 이적할 수 있는 파격적인 선택권을 줬다. 교구가 분할될 때는 자신이 사목하고 있는 현재 위치를 관할하게 되는 교구에 소속되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었다.

 

173명의 사제들이 자유롭게 이적 의사를 밝혔고, 본당 54개ㆍ신자 16만여 명 규모로 의정부교구가 첫발을 내밀었다. 초대 의정부교구장은 이한택 주교였다. 의정부교구 신설은 1963년 수원교구 분가 후 41년 만에 이뤄진 교구 분가로, 서울시만 관할하게 된 서울대교구의 사목 역량은 한층 강화됐다.

 

 

복음화 2020운동ㆍ공동사목 운영

 

교구장 재임 시절 정 추기경은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강조했다. 2004년 사목교서를 통해 2020년까지 복음화율 20%를 달성하자는 ‘복음화 2020운동’을 제안, 동참을 촉구했다.

 

복음화율 20%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지만, 교구의 일부 본당은 이미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20%에 육박한 곳도 있어 불가능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교구는 복음화 2020운동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교회의 사명인 복음 선포에 충실히 임했다.

 

- 정진석 추기경이 9월 16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성모상 앞에서 열린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기공식에서 성수를 뿌리고 있다.

 

 

정 추기경은 교구장 취임 때부터 보좌신부 기간이 길어지면서 젊은 사제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는 2005년 10월, 기존의 화곡동ㆍ오금동ㆍ장안동본당 3곳을 모태로 공동사목 본당 8곳을 신설했다. 공동사목은 성전 신축의 부담을 줄이고 여러 명의 사제가 함께 신자들을 돌보는 사람 중심 교회를 표방하는 제도였다. 성전 신축으로 신자들에게 작용하는 재정적 부담을 덜고, 공동체의 규모를 작게 나눔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발휘하자는 취지였다.

 

정 추기경은 교구의 몸집을 줄이고 신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2002년부터 ‘교구장 대리 제도’를 시행했다. 교구장이 선임한 교구장 대리가 교구장을 보좌해 교구의 특정 업무를 담당하는 제도로, 서울대교구 지역을 3개로 나눠 지역 담당 주교가 각 지역을 책임지게 했다. 이 역시 비대해진 교구의 몸집을 줄이고, 교구 사목에 새로운 장을 여는 시도였다. 그는 이 제도를 통해 지구와 본당 사목에 활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복음화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평양교구장 서리의 북녘 교회 사랑

 

정 추기경은 교구장 임명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로도 임명됐다.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된 것에 각별함을 느낀 그는 교구장 착좌 미사 답사에서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소감을 밝혔다.

 

착좌 미사에서 초대 평양지목구장을 역임한 패트릭 번 주교(메리놀외방선교회 초대 한국지부장)의 목장을 들고 있었던 그는 “이 지팡이를 들고 평양교구를 돌볼 수 있도록 하느님께 떼를 쓰겠다”고 밝혔다. 2007년은 평양교구가 설정 80주년을 맞는 해였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평양ㆍ청주ㆍ인천교구의 설립을 통해 한국 교회의 토대를 마련해준 수도회로 정 추기경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희생과 노력에 감사했다.

 

정 추기경은 평양 지역과 가까운 경기도 파주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 건립을 제안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당시 많은 형제를 죽인 죄를 참회하는 뜻으로 지은 몽마르트 예수성심대성당 같은 성전이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2012년 6월 15일 신자들이 15일 명동대성당에서 이임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퇴장하는 정진석 추기경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가톨릭 상담의 시대 열고, 명동성당 종합계획의 첫 삽 뜨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가 가톨릭 영성을 바탕에 둔 상담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도 물꼬를 터줬다. 시대 변화에 따라 영성심리 상담은 교회의 사목에 꼭 필요한 영역임을 인정하고, 2007년 11월 14일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의 문을 열었다. 교구는 가톨릭 영성심리 상담사 양성에 필요한 교육과 실습을 병행했다.

 

한국 교회 1번지 명동성당을 대대적으로 바꾼 명동성당 종합계획(1단계) 첫 삽을 뜬 것도 정 추기경이었다. 2011년 교구 설정 180주년에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기공식을 열고, 시민들에게도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이임을 앞두고 교계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서울대교구장직을 떠난다고 해도 제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순간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삶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생명 문제와 사회 정의를 언급할 때에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생명도 사회정의도 헛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5월 2일,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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