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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30: 번식하고 번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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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14 ㅣ No.632

[사유하는 커피] (30) 번식하고 번성하라


인간의 욕심, 커피의 다양성 위협

 

 

창세기를 살펴보면, 하느님이 모든 생명체에 내리신 축복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로 요약된다.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늘어서 널리 퍼져 나가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생명체에게 내린 사명이기도 하다.

 

최근 2~3년 커피 분야에 생소한 명칭의 품종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체의 등장을 보는 것처럼 낯설고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는 임무를 받은 인간으로서는 새로운 유전형질을 지닌 생명체의 등장을 허투루 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티피카, 버번, 카투라, 모카, SL28 등 익숙한 커피 이름들도 사실 유래를 보면 실험실과 샘플 꼬리표에서 따왔거나 단순히 커피가 자란 지역이나 거래된 항구의 이름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T5175, ET 47, H10, BM139, EC14 등 새 품종들의 이름을 보면 섬뜩한 마음마저 든다.

 

더 걱정되는 것은 새로운 품종들의 탄생 배경이다.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았다지만, 품종의 다양성이 줄어들어 위협에 대처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대목은 번식할 순 있어도 번성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창세기 말씀에 어긋난다.

 

새 품종 개발은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결과물은 마땅히 그들의 소유물이 된다. 가난한 산지의 농부들은 새 품종을 심으려면 이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 묘목을 사야 한다.

 

새 품종들은 F1 교배종들이다. 부모 세대의 다음 세대라는 의미인데, 이게 참 영악하다. F1에서는 부모가 지닌 우수한 형질만이 발현된다. 커피에 비유한다면, 병충해에 강하고 맛도 좋은 커피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F1 교배종은 다음 세대인 F2에 가면 열성인자들이 다시 드러난다. F1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부모 세대의 약점들이 다시 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센트로아메리카노(Centro americano)라는 F1 교배종은 사티모르와 루메 수단을 교배해 만들었다. 사티모르에는 로부스타의 피가 흐르고 있어 병충해에 강한 형질이 있고, 루메 수단은 에티오피아 원종으로서 좋은 맛을 지니고 있다. 이 둘을 교배한 센트로아메리카노는 씨앗을 뿌려 증식시킬 수 없다. F2에서 병충해에 약하고 맛이 떨어지는 나무들이 절반 이상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새 품종들은 씨앗을 뿌리지 않고 묘목으로만 거래돼 밭에 심게 된다. 커피 농부들로서는 비용 부담이 커졌고, 이것은 커피값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비용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커피나무의 우수성을 돈벌이에 급급해 맛과 병충해 내성만 보고 판단하는 거대 자본의 짧은 생각이다. 씨를 뿌리지 않고 묘목으로 옮겨 심은 커피 밭은 모두 얼굴이 같은 복제인간으로 가득 찬 세상과 다를 바 없다. 가벼운 독감 바이러스 하나에도 형질이 모두 같은 탓에 순식간에 커피 밭의 모든 커피나무가 사라질 수 있다.

 

한 잔의 센트로아메리카노 커피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이 커피의 유전자에는 100만 년 전 아버지 카네포라와 어머니 유게니오이데스가 만나 자연스레 아라비카를 탄생시킬 때 부여된 좋은 향미의 특성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병충해와 가뭄, 때론 홍수와 싸우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깨우쳤고, 1927년에는 로부스타와 결합된 ‘하리브리드 티모르’의 과정을 거쳐 지구온난화에 따른 병충해에 대처할 힘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았다.

 

커피 품종을 자연 속에 그대로 두는 것이 섭리이다. 서둘러 과실을 따려는 인간의 욕심이 위협을 자초한다. 번식하고 번성하기 위해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각자 존재해야 할 사명이 있고 가치가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13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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