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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29: 의주 땅을 밟고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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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05 ㅣ No.2041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29) 의주 땅을 밟고 돌아오다


검문검색과 살을 에는 추위 뚫고 홀로 국경을 넘나들어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봉황성에서 조선 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홀로 중국과 조선의 국경 수비 상황을 파악하고자 의주 읍성까지 갔다가 1843년 1월 16일 메스트르 신부가 있는 중국 요동반도 백가점 교우촌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의주 변문 옛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부친과 최양업 부모의 순교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봉황성에서 약 8㎞ 떨어진 지점에서 우연히 조선의 동지사 일행과 마주쳤고, 그들 속에 있던 조선 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김대건은 그로부터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신자 200여 명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친 김제준과 동기 최양업의 부모도 순교한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김대건은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김여상이 불행한 죽음을 맞은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고 매도당하게 마련입니다.”(김대건이 1843년 1월 15일 요동 백가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의 이 보고는 김 프란치스코가 잘못 알려준 것이다. ‘김순성’으로도 불린 김여상은 앵베르 주교를 밀고한 공을 인정받아 한양 도성 순찰을 통솔하는 정3품 오위장(五衛將) 관직에 올랐다가 1840년 죄를 지어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 김여상은 1853년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1862년 역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그해 8월 21일 대역부도 죄로 참수됐다. 김여상은 김대건이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사형에 처했지만, 이 일은 김대건이 순교하고도 한참 뒤에 일어난 일이다.

 

- 겨울을 맞은 압록강. 출처=위키백과사전.

 

 

목숨걸고 압록강 넘어

 

기해박해로 성직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절박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인지한 김대건은 어떻게든 메스트르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김 프란치스코에게 메스트르 신부를 인도하기 위해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물었다. 김 프란치스코는 난색을 보였다. 자신이 동지사 일행 명단에 올라 있기에 사신을 수행해 북경까지 가지 않고 홀로 변문에 남으면 의심을 산다는 것이다. 또 일행 중에는 신자가 아닌 친구들이 있어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려 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또다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1812년생으로 비록 김대건과 9살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1834년부터 유진길(아우구스티노)와 조신철(가롤로) 등과 함께 압록강 국경을 왕래하면서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킨 인물이다. 또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이 유학길에 오를 때도 국경까지 동행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기해박해 이후 조선 교회에서 성직자 영입에 가장 경험이 많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런 김 프란치스코가 메스트르 신부 영입을 서두르는 김대건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하면서 위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김대건은 어떻게든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성사시키겠다 마음먹고 김 프란치스코에게 국경 통과 방법을 물었다.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유일한 방법은 오직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대건은 동지사 일행이 귀국하는 내년 2월에 봉황성 책문에서 만날 수 있으면 다시 만나자고 말하고 김 프란치스코와 작별했다.

 

김대건은 김 프란치스코와 헤어진 후 책문으로 돌아와 중국인 길 안내인과 하루를 지냈다. 깊은 밤 새벽 1시, 몰래 일어난 김대건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중국인 길 안내인과 작별한 뒤 홀로 국경을 향해 길을 나섰다. 김대건은 6년 전 이맘때(1836년 12월 28일)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너무나 다르다. 6년 전에는 동료가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압록강만 건너면 의주가 보인다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동서남북이 분간조차 안 되었다. 최저 영하 30℃까지 떨어진다는 압록강의 겨울 강바람은 살을 베이는 것같이 날카로웠다. 중국땅 책문에서 조선땅 의주 변문까지는 60여㎞ 거리의 무인지대이다. 압록강에는 3개의 지류가 있는데 조선과 중국 간의 가장 가까운 지류가 국경이다. 압록강은 겨울 4개월 동안 얼어있어 물에 빠질 염려는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김대건은 해 질 무렵에서야 압록강을 건너 멀리 의주가 보이는 거리만큼 왔다. 반나절 이상을 쉬지 않고 걸었다. 녹초가 된 그는 피곤이 몰려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탈진한 몸보다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심리적 압박이 그를 더 지치게 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예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해 다가갔습니다”(같은 편지에서)는 고백처럼 김대건은 위협이 다가올수록 하느님과 성모님께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겼다.

 

의주 읍성 문 앞에 다다른 김대건은 병사들이 일일이 통행증을 검사하는 것을 보고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국경 경비가 제법 살벌했다. 해가 떨어져 날이 어두웠음에도 병사들은 불을 밝히고 한 사람씩 수문장 앞으로 불러 이름을 대라 하고 출입자 명단을 확인했다. 성곽에서는 달아나는 사람이 없나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통행증이 없었던 김대건은 제법 몸집이 큰 소들 사이로 숨어들어 성문 가까이 간 후 먼저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그들 뒤에 잽싸게 붙었다. 이를 본 병사가 김대건에게 통행증을 내지 않고 가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연거푸 김대건을 부르며 제지하자 김대건은 “통행증을 벌써 냈다”며 소리친 후 성 밖 변두리까지 병사들을 피해 40여㎞를 밤새 달아났다. 이틀을 꼬박 뜬 눈으로 걷기만 한 김대건은 해가 뜰 무렵 그제야 한기를 느꼈다. 너무나 춥고 피곤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언 몸을 녹일 주막에 들어갔다.

 

하지만 김대건은 주막에서 몸을 누일 새도 없었다.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이 김대건의 행색을 보고 중국인이다, 외국인이라면서 김대건을 관가로 끌고 가려 했다. 하는 수 없이 김대건은 주막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사람들은 김대건이 정말로 한양 방향으로 가는지 미행을 붙였다. 이를 눈치챈 김대건은 한양 쪽으로 가다가 나무가 무성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해가 떨어질 때까지 숨어있었다.

 

날이 어둡자 김대건은 산에서 빠져나와 밤 2시께 의주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국경 수비대 막사를 우회하는 먼 길을 택해 압록강으로 갔다. 그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떠올라 사방이 환할 때였다. 김대건은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중지도에서 다시 중국 옷으로 갈아입고 40여㎞를 걸어 봉황성 책문으로 갔다. 저녁 무렵 책문에 겨우 도착한 김대건은 그제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밤새 깊은 잠에 떨어졌던 김대건은 중국인 길 안내인과 함께 5일을 걸어 메스트르 신부가 있는 백가점에 도착했다. 이날이 1843년 1월 16일이었다.

 

 

국경 넘으며 얻은 교훈

 

메스트르 신부는 의주까지 다녀온 김대건의 노고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안드레아는 조선인 밀사를 반갑게 만나고 나서 더 전진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저는 그에게 교우들을 만나면 즉시 제게 알리고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는 열성에 사로잡혀 숙고하지 않고 경솔하게 초반의 위험에 맞서려 했다.…그는 조선의 변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이 불행한 땅에서 밤새 여정을 계속했다. 그때 그는 조선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비난당하고 관가에 끌고 가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그는 다시 요동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서 나의 작은 은신처로 돌아오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돌아온 것과 오직 필요했기 때문에 감행한 이 첫 시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메스트르 신부가 1843년 3월 1일 요동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여행을 통해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얻은 성과는 무엇일까? 둘은 조선인 신자들의 도움과 치밀한 준비 없이 용기와 열정만으로 조선에 들어갈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이 깨달음으로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1843년 3월과 9월에 조선 입국을 탐색하기 위해 책문으로 가서 김 프란치스코 등 조선 교회 밀사와 접촉하지만 무리하게 입국을 시도하지 않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2월 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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