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 용서 (1)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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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01 ㅣ No.1561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용서 1 :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길

 

 

“뺑소니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운전자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따라 저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청했는데 저의 용서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미운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준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삶의 자리에서 미운 사람에 대한 용서와 받아들임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까이에 있던 믿었던 배우자나 자식, 이웃의 배신은 진정 받아들이기 힘든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람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앉으나 서나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속 시끄러운 날들을 보낸 적이 누구나 한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용서는 하늘 차원의 사랑을 배우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셨고, 우리를 다시 낙원에 살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천지 창조 때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생명을 주셨듯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성령을 주시며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새 인간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하셨던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고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요? 사실 소소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는 쉽게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적 피해나 강간, 살인죄와 같이 대죄를 지은 경우 우리는 말처럼 쉽게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머리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용기를 내어 용서를 청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는 용서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잊은 채 “네가 신자니 그래도 참아야지!” 혹은 “예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의 마음으로 이겨내셔요!”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더 당사자를 화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함께 울어 주고, 당사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며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위해서 첫 번째 필요한 요소는 ‘기다림과 침묵’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도 (상징적인 숫자이지만) 4000년이 지난 다음 아드님을 보내셔서 화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시간이 필요하셨듯이(?) 우리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상대방도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게 됩니다. 또한 무조건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우, 혹은 아직 미숙한 신앙을 가진 경우 고통 중에 기도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억울한 감정으로 기도조차 할 수 없는 경우는 주위 이웃들이 대신 그 사람을 위해 중재 기도를 해 주는 것도 좋습니다. 격한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는 고통의 상황이나, 자신이 받았거나 주었던 상처의 의미를 예수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혹은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해, 혹은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분의 은총으로 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아픔으로 느껴지지만 더 큰 하느님의 선과 그 섭리에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용서의 과정에서 “부정적인 감정 하느님께 말씀드리기”에 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21년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마산 3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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