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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32: 크리스마스 캐럴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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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7 ㅣ No.636

[사유하는 커피] (32) 크리스마스 캐럴의 딜레마


구원의 소식 전하는 캐럴의 의미 새기며

 

 

크리스마스 캐럴이 딜레마에 빠졌다. 방송과 인터넷에서는 캐럴이 음원 차트 1위를 휩쓸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거리에서는 캐럴이 실종됐다는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하기에는 허전하고 황량하다.

 

머라이어 캐리가 1994년에 발표한 캐럴만으로 벌어들인 저작권 수익이 이번 시즌에만 5억 원으로 추정되는 등 모두 700억 원을 훌쩍 뛰어 넘어섰다는 전언이다. 국내 음원 차트에서도 캐럴이 강세를 보여 일부 가수들에게는 캐럴이 수익을 보장하는 ‘성탄연금’이 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거리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캐럴이 음원에서는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다.

 

캐럴이 곧 돈이 되는 가요기획사와 음원 사이트는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기 위해 캐럴을 찾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반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예술가와 봉사단체들이 재능기부로 크리스마스 음원을 제작했다는 기사는 애써 찾아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캐럴은 거리에서 울려 퍼져야 한다. 캐럴의 본질은 음악 감상이 아니라 구원의 희망을 전파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800년 전 ‘가난한 자의 아버지’, ‘또 한 분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린 프란치스코 성인이 구유를 만들어 예수 탄생을 재현하며 기도를 드린 데에서 오늘날의 캐럴 문화가 형성됐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촛불을 밝히고 구유를 둥글게 둘러싼 신자들은 성가를 바치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맞이한 구세주 탄생의 감격을 나눴다. 이어 프란치스코 성인과 신자들은 병들거나 몸이 불편해 구유를 찾지 못한 환자들, 생계에 쫓겨 일터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 문밖에서나마 성가를 들려주며 구원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 앞에서 캐럴을 불러 축복의 마음을 전하는 캐롤링(Carolling)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17세기경부터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캐럴이 예수 탄생을 알리는 내용의 ‘저 들 밖에 한밤중에(The First Noel)’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실 캐럴은 5세기경에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불렸다. 구전으로만 500여 곡이 전해진다. 내용도 성탄뿐 아니라 사순과 부활, 연중 시기에 각각 맞도록 다양하다. 이것이 로마로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로 전해져 각 지역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야외에서 춤추며 부르는 ‘찬송의 노래’라는 성격이 짙어졌다. 따라서 이들 성가를 춤을 뜻하는 라틴어 ‘카롤라(carola)’ 또는 헬라어 ‘코라울리엔(choraulien)’에서 따와 캐럴(carol)이라 부르게 됐다.

 

돈을 주고 통신망에서 캐럴을 구입해 홈파티 분위기를 띄우는 데 소비하는 모습은 차라리 슬프다. 캐럴의 본질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찾아가 확신에 찬 구원의 소식을 전하며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캐럴은 구세주 예수처럼 가장 낮은 곳에 임해야 한다.

 

본질을 보지 못해 정신이 사라지는 현상은 안타깝게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커피에서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가 그렇다. 이 커피의 본질은 품질이 좋아 비싸게 팔아도 된다는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출처를 정확하게 밝혀 산속 오지의 작은 땅이라도 그곳의 커피나무에 내린 신의 축복과 이를 땀 흘려 가꾸고 수확한 농부의 노고에 감사하고 기억하는 심성을 기르자는 다짐의 징표이다. 스페셜티 커피가 장사의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이 인터넷을 통해 요란한 파티장에 소음처럼 울려 퍼지는 캐럴과 중복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25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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