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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관한 성찰: 매장에서 화장으로 - 옳고 좋은 일이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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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19 ㅣ No.400

[죽음에 관한 성찰] 매장에서 화장으로


옳고 좋은 일이기만 한가

 

 

1980년 13.9%, 1990년 17.5%, 1995년 22%이던 대한민국의 화장률은 화장 장려 정책과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를 지난 2005년 52.6%에 달했고, 2018년에는 드디어 85%를 넘어 86.8%까지 올라갔습니다.

 

 

1990년대 화장 장려 정책과 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

 

화장을 장려해 온 정책적 입장에서 생각하면 대단한 성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나아가 ‘둘도 많다’던 가족계획 정책에 버금가는 성공이지 싶습니다. 물론 두 정책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유의미한 유사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한쪽은 삶의 시작, 다는 한쪽은 삶의 끝을 말하고 있다는 점, 그 생과 사의 순간에 대한 정책적인 판단과 개입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 판단과 개입이 대단히 ‘계몽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 등.

 

당시의 가족계획 정책과 운동의 부작용(?)은 이미 온 나라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최저 출생률이라는 현상을 이 정책과 운동만의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란 무리이며, 나 또한 그런 무모한 주장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관련 정책이 출생에 관한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그리고 출생률의 방향을 불가역적으로 하향 조정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 이 정책이 그런 거창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화장으로의 급격한 변화: 보이지 않는 파장과 부작용을 걱정함

 

강력하게 화장을 장려하는 정책과 운동이 시행되는 동안 나는 자주 가족계획 정책이 떠올랐고, 그와 비교할 때 드러난 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오갔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화장 장려 정책과 운동이 화장을 옳고 좋은 것으로만 전제한 듯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장, 화장, 풍장(風葬), 조장(鳥葬), 그 어떤 장법이 되었든 그것은 지역의 기후, 지질, 종교, 역사 등이 어우러지며 오랜 기간에 걸쳐 선택되며, 특정 지역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의 토대를 이룬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서양의 의식 변화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천 년의 역사는 살펴봐야 한다고 했던, 「죽음의 역사」의 저자 필립 아리에스의 말처럼 인간의 의식 중 가장 느리게 변하는 것 중 하나가 죽음과 관련한 부분이라는 학자들의 관찰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압축 성장의 신화를 쓴 한국은 과연 대단했습니다. 조선 시대만이라 치더라도 오백 년의 역사를 지닌 매장 문화를 불과 수십 년 만에 밀어내 버렸습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밝힙니다만, 나는 ‘매장 옹호론자’라거나 ‘화장 반대론자’가 아닙니다. 다만 무엇이든 급격한 변화는 당장 눈에 띄든 아니든 어떤 식으로든 개인과 집단에 ‘상흔’을 남긴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집단 무의식과 같은 심층을 건드릴 경우, 파장과 부작용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오래 갈 수 있다는 걱정을 합니다. 화장 장려 운동이나 정책을 추진했던 분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금수강산이 ‘묘지강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부족한 묘지에 대한 우려, 전국에 산재한 무연고 묘지의 처리 문제 등 현실적인 필요와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근본 문제: 생과 사에 관한 정책은 도구적, 기능적 행정 그 이상

 

사회 구성원의 출생과 사망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시도하지 않는 사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행정적 차원으로만 처리해도 되는 사안이 있고, 그 너머까지를 생각해야 하는 사안이 있는 법입니다. 생과 사에 대한 근본 인식까지 바꿀 수 있는 일을 ‘마스크를 씁시다’와 같은 시민 계도 운동과 같은 차원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출생 정책의 성공 여부를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의 숫자나 출생 지원금 지급액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부족하고도 위험하듯, 장묘 정책의 성공 여부를 “화장률 몇 % 달성‘에 맞춰 판단하는 것은 너무 평면적이고 근시안적으로 보입니다.

 

전환기가 아닌 때가 없었다지만, 오늘의 인류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대전환기를 맞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지금처럼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매장 옹호론자도 화장 반대론자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매장되든 화장되든, 성찰적이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 내 자리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매장에서 화장으로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지닌 까닭은 그런 정책과 운동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어떤 철학적, 종교적 배경도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것도 모자라 수량화된 성과주의에 매몰되거나 도취되어 지나친 속도전을 하지 않았나 하는 나름의 합리적 의심 때문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에 기능성, 도구성, 편리성, 효율성, 위생성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요?

 

 

죽음을 의미 있게 다루고자 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장묘란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죽은 자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일은 본디 산 자를 위한 것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우리의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묘를 둘러싼 각종 제도는 모든 인간이 겪어 내야만 하는 실존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죽음을 의미 있게 다루고자 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의 전면적인 변화를 암시하며, 매장 비판의 주 논리였던 땅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장묘 의례가, 아직 산 자가 이미 죽은 자와 만나고 삶과 죽음의 화해가 이루어져 자기 삶을 긍정하는 장이 된다면 그 방법이 무슨 문제이겠는지요.

 

하여 이는 특정한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더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진정 큰 문제는 장묘가 – 매장이든 화장이든 간에 – 떠나는 자와 남은 자가 서로 화해하여 순화된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는 의례의 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 그것일 겁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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