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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0: 두만강 입국로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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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14 ㅣ No.2042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30) 두만강 입국로 개척


페레올 주교의 안전주의에 조선 입국로 탐색만 하며 시간 흘러

 

 

-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주도한 조선 신자들은 이 길로는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것이 멀고 고통스럽다고 보고했다. 사진은 얼어붙은 두만강 풍경. 출처=다음 블로그 ‘김성련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신학생 김대건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압록강 입국 시도에 이어 두 번에 걸쳐 두만강을 통한 입국로 개척 과정을 살펴본다.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 조선에 두 차례 입국했다. 첫 번째는 1842년 12월 2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왔다가 1843년 1월 1일 다시 중국 봉황성 책문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는 1844년 3월 8일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난 다음 소팔가자로 다시 갔다. 첫 번째 여행을 메스트르 신부가 주도했다면, 두 번째 여행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조선 입국 시급, 앵베르 주교의 제안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부터 벨리노의 명의 주교이자 조선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된 페레올 신부는 1843년 12월 31일 중국 요동 개주 양관성당에서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 주례로 주교품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9년 9월 21일 순교했기에 자동 승계해 제3대 조선대목구장이 됐다. 페레올 주교가 주교품을 받기까지 1843년 한 해 동안 조선 파견 선교사들과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이 이야기가 끝난 다음 호에 소개하겠다.

 

동갑인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는 둘 다 조선 입국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1842년 12월 말 압록강 입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건으로부터 1839년 기해박해로 조선 교회가 풍비박산이 나고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더욱 그랬다. 이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안전하게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40년 3월 마카오를 떠나 그해 말 중국 길림성 소팔가자에 도착한 이후 4년째 발이 묶여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도 1842년 10월 하순 압록강 국경에서 사나흘 길인 요동반도 태장하 백가점에 도착한 이래 고립상태였다. ‘안전한 조선 입국 방책’이 두 성직자의 골머리를 가장 앓게 했다.

 

사실,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는 배를 이용해 조선에 입국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온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강력한 제안이기도 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는 요동반도 끝자락 해안 지대에 교두보를 마련해 고기잡이하는 신자 가족들을 정주시켜, 그들에게 배를 사주어 압록강 하구에서 고기잡이하는 조선 신자들과 연락을 취하게 해 연락망을 구축하고, 형편이 되면 바다 한가운데서 성직자들을 옮겨 태워 조선으로 데려오게 하자고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를 설득했다. 앵베르 주교는 또 이 방안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압록강이 아닌 조선의 또 다른 국경인 두만강 입국로를 개척해 볼 것을 제안했다.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위한 두 가지 제안을 1840년 8월 서만자에서 확인한 페레올 신부는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조선의 국경 감시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체포된 신자들의 혹독한 심문을 통해 유럽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세세히 파악했다. 또 세 명의 조선 소년이 신부가 되기 위해 비밀리에 출국해 마카오로 유학을 갔고, 그들 중 한 명은 죽었다는 사실까지 알았다. 기해박해로 조선 교회의 모든 사정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그래서 변문을 왕래하는 동지사 수행원들에 대해 철저하고 엄격한 감시가 시행됐다.

 

 

두만강 입국로 탐사

 

두만강 국경을 통한 동북방 입국로 개척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가 파리 본부의 지도 신부에게 보고하면서 본격화된다. 아마도 리브와 신부가 서만자에서 페레올 신부가 확인했던 앵베르 주교의 편지를 받고, 또 다른 조선 국경인 ‘두만강 루트’에 구미가 당긴 모양이다. 리브와 신부는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북쪽에 매우 확실한 길이 있습니다. 들어가기는 더 어려울 테지만 훨씬 더 확실합니다.”(리브와 신부가 1842년 2월 11일 마카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만강 입국로 탐사는 조선 신자들에 의해 1843년 5월 말에 시작됐다. 김대건은 1843년 3월과 9월에 압록강 책문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했는데, 아마도 3월 말에 만났을 때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요청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고, 9월에 그 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면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주도한 인물은 누구일까? 김 프란치스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는 1844년 1월 20일 봉천에서 페레올 주교를 만났기 때문이다. 동지사 일행이 3월께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하므로 그가 물리적으로 두만강 국경 지역으로 갈 수가 없다. 또 김대건은 조선 땅 경원에서 생면부지의 조선 신자와 접촉을 한다. 따라서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주도한 조선 신자들은 조선 밀사로 새롭게 선발된 인물들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신자들의 두만강 입국로 탐사 결과 보고는 긍정적이면서도 비관적이었다. 두만강으로 가기는 상당히 쉽지만, 한양에서 두만강 국경까지 800여㎞ 거리여서 매우 멀고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함경도 지방 출신 두 사람이 두만강 경원 일대를 탐색하고 돌아와서 그쪽으로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것이 실현될 수 있으나 한두 번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편지로 1844년 음력 정월에 두만강 국경 경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들은 약속대로 1844년 음력 정월에 맞춰 20일 여행 끝에 경원에 도착한 후 한 달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을 기다렸다. 하지만 메스트르 신부는 경원을 향해 한 발자국도 띌 수 없었다. 페레올 주교가 두만강 국경을 이용한 메스트르 신부의 조선 입국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조선 입국 시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박해 시기에 안전을 보장하라는 것은 위협을 무릅쓰지 않겠다는 소극적 태도일 수밖에 없다. 페레올 주교는 그렇게 4년간이나 소팔가자에 머물고 있었다. 주교품을 받기 위해 양관으로 갔다 온 것과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기 위해 봉천에 다녀온 것 외에는 소팔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후 메스트르 신부에게 1843년 1월 12일 첫 번째 사목 서한을 보내 “우리의 가엾은 포교지에 신속하게 들어가는 데에 등한시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페레올 주교의 ‘안전제일주의’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1년을 요동 땅에서 허비한 메스트르 신부는 리브와 신부에게 노골적으로 페레올 주교에 관한 불만을 표했다. “페레올 주교님은 길림에 ‘틀어박혀’(reste confine, 헤스테 꽁피네) 계십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3년 11월 21일 요동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스트르 신부는 또 파리외방전교회 경리 담당인 알브랑 신부에게 “지난겨울에는 희망을 좀 가졌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우들은 그들의 새 주교나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북쪽 국경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자신의 입국도, 선교사의 입국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계획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고 첫눈에도 매우 모험적으로 보였습니다. 조선 신자들은 상당히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라고 일러바쳤다.(메스트르 신부가 1844년 3월 28일 길림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에서 두만강까지의 길부터 확인하자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박해 중인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적지 않게 실망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김대건에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조선에서의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마쳤으니, 소팔가자에서 두만강까지 안전하게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있는지 탐사하자는 것이었다.

 

페레올 주교가 이나마 결정하게 된 데에는 김 프란치스코의 역할이 컸다. 김 프란치스코는 1844년 1월 20일 봉천에서 만난 페레올 주교에게 “앞으로 오랫동안 이 길(압록강 변문)을 통한 조선 입국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이 길로 조선 입국을 시도하는 것은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일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이 말은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날 유럽인이 중국에서 두만강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두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기로 결심했다.(페레올 주교가 1844년 1월 20일 봉천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에서)

 

그 둘이 신학생 김대건과 중국인 길 안내인 한 명이었다. 졸지에 지난 겨울 80여 명 이상의 행인과 100마리 이상의 소와 말이 맹수에게 잡혀먹혔다는 사지로 김대건이 내몰리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2월 1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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