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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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48: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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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07 ㅣ No.1626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8)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하세요”

 

 

누군가에게 덕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 자명하다. 사진은 한 행인이 노숙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있다. [CNS]

 

 

11. 하느님 현존 의식과 주님의 영을 간직함 - 의식함과 자유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고상으로부터 들었던 “쓰러져가는 내 집을 고쳐다오”라는 주님의 초대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초대는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던 당시의 교회 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는 우리 내면의 집과 하느님 백성 서로 간의 관계성을 재건하거나 수리하라는 당부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의미는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우리는 바로 그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이고, 또 교회의 재건은 교회, 즉 하느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재건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살라고 프란치스코를 초대하시면서, 당신 교회와 넓은 의미에서의 당신 교회인 온 세상 재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하느님 현존 의식’임을 당부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요즘의 세상에서는 이 ‘하느님 현존 의식’의 필요성이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하다.

 

주님의 영을 간직하는 것과 ‘깨어 있는 의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어 있는 정신 자세를 지니지 못한 채, 즉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시간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정보의 범람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범람하는 정보와 소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관점에서 식별하지 않은 채 그것들이 주는 여파에 이리저리 떠밀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우리는 집단최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서로 갈라져 살아가면서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적대시하면서 분열과 불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이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념과 정보(그것도 때로는 잘못된 정보일 수 있음)로 인해 분열된 세상을 우리 스스로가 조장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의식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한 다음의 권고는 우리에게 이런 의식을 요청하는 권고이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깨어 있음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 ‘화두’를 조심스럽게 풀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나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부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덕과 악덕에 대한 가르침인 권고 말씀」 27번에서 이런 깨어 있음과 하느님 현존 의식에 대해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권고 말씀 27번은 다음과 같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루카 11,21)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식별)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덕들이 먼저 앞에 부분에 열거되고 그런 다음 반대되는 것들, 즉 악덕들이 나온다. 우선 첫 번째 부분, 즉 덕목들을 살펴보되, 특히 첫 번 네 가지 덕목들을 살펴보자.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고요와 묵상(관상)이 있는 곳에….”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같은 덕의 목록을 기술하면서 이 모든 덕이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한다. “당신은 거룩하시고, 주님이시며… 당신은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안식처이시고, 평화이시며 당신은 기쁨이시나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특성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겸손이시고, 안식처이시며, 평화와 기쁨이시다. 이들은 프란치스코가 「권고 말씀」 27번에서 사용하고 있는 덕목들과 거의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집, 즉 우리 존재를 차지하신다면, 거기에는 사랑과 지혜와 인내와 겸손과 가난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관상하는 휴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덕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은 자신 안에 거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깨어 알아보고 모셔 들여, 그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믿음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이 깨어 있음, 혹은 하느님 현존 의식임을 우리는 늘 상기하는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7월 4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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