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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 과학주의의 한계 -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의 존재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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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0 ㅣ No.401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 과학주의의 한계 (4)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의 존재 가능성

 

 

물리학 법칙, 우주, 물질

 

우리는 뉴턴의 ‘중력 법칙’을 이미 알고 있다. 중력 법칙이란, 그가 1687년에 쓴 기념비적인 저작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흔히 ‘프린키피아’로 약칭한다.)의 본디 표현을 인용하면, “질량을 가진 두 문제가 있을 때 그것들은 떨어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서로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물체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제곱, 곧 2승인가? 중력 법칙에 왜 반드시 제곱이 들어가야 하는가?

 

이 제곱, 2라는 숫자는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중력 법칙이,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떨어진 거리의 2,0001승 또는 1.9999승에 반비례하게 서로 잡아당긴다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001승의 경우는 태양계를 비롯한 이 우주의 모든 은하계가 와해되어 멀리 흩어지고 만다. 반면, 1,9999승의 경우는 모든 별과 행성들이 서로를 향해 부딪치면서 조만간에 다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이 우주가 지금처럼 안정되게 유지되고 행성들이 각자의 궤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정확히 거리의 2승에 반비례하여 서로 잡아당겨야만 한다. 그리고 이 우주가, 이 자연이 정말 정확하게도 거리의 2승에 반비례하여 서로 잡아당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중력이 ‘어떠한 이유로’ 정확히 2승과 관련을 맺는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우주가 2,0001승이나 1.9999승이 아니라 정확히 2승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은 다만 ‘경험적으로 관찰해 보니 2승이다.’ 그리고 ‘2승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안정적인 우주를 구성할 수 없다.’ 정도까지만 설명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정전기학에서 잘 알려진 쿨롱의 법칙도 있다. 이 법칙이 설명하는 정전기력은 “두 전하가 있을 때 그들은 서로 떨어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제곱, 2승이 나오는데, 만일 정확히 제곱에 반비례하지 않고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 분자는 금세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거나 한 점으로 붕괴하게 된다.

 

하지만 두 전하 사이의 전기력이 ‘어떠한 이유로’ 정확히 2승과 관련이 있게 되었는지, 자연이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2승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뉴턴의 중력 법칙에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관찰해 보니 2승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안정적인 원자를 구성할 수 없다.’ 정도까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 물리학 법칙의 특징

 

이렇듯이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법칙을 고려해 볼 때 그것들을 활용하는 물리학자조차도 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왜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함은 우리는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어째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할까?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활동하기 직전까지 서구 사회를 1000년 이상 지배해 온 물리학 개념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물리학』에서, 세상 모든 물체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인에 따라 운동한다고 주장했다.

 

· 질료인(causa materialis) :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 형상인(cause formalis) :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운동인(능동인, 작용인)(causa efficiens) : 그것을 누가(무엇이, 무엇을 통해서) 만들었다가(행했는가)?

· 목적인(causa finalis) : 그것을 왜(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행해졌는가)? 그것이 존재(운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 ‘4원인설’은 물리학의 대상인 물체의 운동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모든 현상의 원인까지 설명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자신의 신학 체계 안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따라서 ‘4원인설’은 물질계와 비물질계 전체, 심지어 하느님을 포함한 신학에까지도 적용 가능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 이래 현재의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질량으로서의 질료인과 외부에서 그 물체에 가해진 힘, 곧 외부작용으로서의 운동인만을 고려한다. 다시 말하면,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 그 물체가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인지, 운동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물체의 운동에 그 물체가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인지(사과인지 아니면 돌멩이인지), 그 물체가 운동하는 목적(이유)이 무엇인지(누군가가 아래로 던지려고 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 떨어지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곧 물리학이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물리학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과학 분과의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과학의 설명 대상

 

물리학은 ‘이 세상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모든 물질은 질량과 전하가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그 위에서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학문이다. 이 기본 전제는 수학에서 말하는 공리(axiom)와 같은 것이다. 시간과 공간, 질량과 전하의 존재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전제일 뿐 이것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하는, 물리학의 대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물리학이 이 세상의 대단히 많은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이 자연에 ‘왜 존재하는지, 왜 그러해야만 하는지, 그 문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은 다만 ‘경험적 현상을 최대한 간단한 개념과 이론과 모델을 통해 기술(describe)하는 법’을 알려 주는 학문이지 그 현상들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학문은 아니다.

 

결국 과학은 스스로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법칙들조차도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인의 부재는 갈릴레이 이래 현대적 의미의 ‘기술 과학’(descriptive science)이 태동하고 발전하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과학 법칙의 목적인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여전히 형이상학 또는 신앙 · 종교의 영역에 의존하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렇다면 신앙적, 종교적 문제에 대해 과학은 과연 과학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의미 있는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다른 논의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해 좀 더 깊은 내용을 알고 싶은 독자분들은 필자의 글 ‘현대의 과학 시대에서도 신앙은 과연 의미가 있는가?: 과학주의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한 신앙의 의미 탐색’(「신학전망」, 204호, 2019년 3월, 130-170쪽)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 김도현 바오로 - 예수회 한국관구 소속 신부로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통계물리학과 ‘과학과 종교’를 연구,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김도현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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