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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카스트에 도전한 인도 첫 순교자 성 데바사하얌 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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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01 ㅣ No.2092

카스트에 도전한 인도 첫 순교자 ‘성 필라이’


명망 높은 힌두교 가문 출신, 특권 포기하고 천주교로 개종... 모든 사람의 평등 주장

 

 

코타르(Kottar)교구의 성 하비에르 대성당에 세워진 성 필라이 동상.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5일 선포한 새 성인 10위 가운데 인도의 성 데바사하얌 필라이(St. Devasahayam Pillai, 1712~1752)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끈다.

 

성 필라이는 인도의 첫 번째 평신도 성인이다. 또 인도 태생의 첫 순교자로 공인됐다. 인도 교회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피로 얼룩진 순교 역사가 간단치 않다. 힌두의 땅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 필라이의 순교 행적을 보면 그의 이름을 장식하는 ‘첫 번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는 명망 높은 힌두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힌두교 성직자였다. 덕분에 이른 나이에 토후국 트라반코르(현 케랄라 주) 왕궁에 들어가 엘리트 관료가 됐다. 그는 전쟁에 패한 뒤 왕국으로 전향한 네덜란드 제독 란노이(De Lannoy)를 통해 예수의 존재와 그리스도교를 처음 접했다. 란노이 제독과 가깝게 지내면서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았다.

 

왕국의 영주들과 힌두교 지도자들이 그의 개종을 그냥 지켜볼 리 없었다. 반역죄를 씌워 관직을 박탈하고, 3년 동안 가둬둔 채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다. 가톨릭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예전의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와 명예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8)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다행히 풀려나왔다. 서남부에 진출한 유럽 열강들이 왕실에 석방 압력을 가한 덕분이다. 하지만 석방 조건이 있었다. 물소를 뒤로 돌아앉아 타고 국경까지 가서 망명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죄인에게 공개적으로 굴욕감을 안기는 방법이었다. 그는 그 수모를 감내하면서 국경에 도착했으나 결국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순교는 인도 사회의 전통적 신분 질서인 카스트 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신분이 가장 높은 브라만(승려) 바로 아래 계급이었다. 하지만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비천한 그리스도인이 됐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주로 하층민이었다.

 

인도 교회는 성 필라이의 이 같은 선택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보여주신 비움의 근본적 모델”이라고 칭송한다. 성직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행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성 필라이의 비움은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장식과 특권의식을 버리라고 재촉한다는 것이다.

 

바티칸은 그의 시성과 관련해 “성 필라이는 특히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했다. 이것이 상류 계급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그의 유해는 인도 남단 타밀나두주 코타르(Kottar)교구의 성 하비에르 대성당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다. 그의 동상은 문두(mundu)라고 불리는 인도 남성 전통복 차림이다. 서양의 성직자ㆍ수도자 성인 이미지에 익숙한 인도인에게 이 동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성인이 자신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시성 미사에서 성덕은 달성하기 힘든 이상적 목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거리의 먼지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시련 속에서,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동료 수녀에게 말한 것처럼 ‘주방 냄비 가운데에서’ 성덕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덕은 몇몇 영웅주의 행동이 아니라 수많은 일상의 사랑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이날 강론 요지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29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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