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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 - 선교지 조선과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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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17 ㅣ No.1506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

- 선교지 조선과 조선인 -*

 

 

국문 초록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극동’에 위치한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성장해온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동시에 외부세계와 단절되었으며 가난하고 가련하지만 완강히 천주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베르뇌 주교가 파악한 조선교회의 실상은 존속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과 위축, 안정과 위기가 반복되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지하교회’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서양 세력(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을 억제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되고 교세가 확장되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이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순종하지 않는 반(半)미개(demi sauvage)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나쁜 기질을 꺾기 위해 주교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신자들을 대했다. 이러한 인식에는 조선인 · 조선 문화 = 미개 · 야만, 프랑스 · 천주교 =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오리엔탈리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이 한 번 신앙을 받아들이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성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금지 법령이 폐지되고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르뇌 주교가 전망하는 ‘그리스도교화’가 곧바로 ‘유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선교지 조선의 관습을 유럽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존중해야 하며, 어떤 조선의 관습은 유럽의 관습보다 훨씬 낫다고까지 했다. 그의 사고에는 천주교와 대립하는 근대사상(공화주의, 자유주의, 탈권위주의)을 배격하는 ‘반(反)근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문화가 조선사회의 전통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리스도교화’를 지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외부의 구원자로서 서양 국가에 기대려 했고, 중국처럼 천주교가 조선에서도 공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르뇌 주교는 ‘반미개’적인 조선인들이 ‘그리스도화’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으며, 천주교의 공인을 통한 ‘그리스도교화’라는 목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교세 확장 추세를 유지하고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천주교 공인을 대목구장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 머리말

 

1831년 조선대목구의 설정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천주교회를 관할했고, 프랑스 출신 선교사제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특히 역대 조선대목구장들은 천주교가 조선 정부에 의해 금지되고 탄압받던 금압(禁壓) 시기 이래 천주교회 보호와 전교 활동을 책임지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대목구장들은 대목구의 재치권(裁治權)1)을 전유(專有)했으며, 천주교회의 철저한 위계질서 속에 동료 선교사제와 신자들은 대목구장에게 순명해야 했다.2) 따라서 대목구장이 자신의 선교지인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이러한 조선 인식을 바탕으로 한 전교 방침과 정책은 동료 선교사제와 신자들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의 천주교 대응과 중국 · 프랑스 등 연관 국가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한국천주교회사의 특성 때문에 조선대목구장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의 조선 인식에 주목한 연구 성과가 현재까지 상당히 축적되어 왔다. 선교사제들의 공통적인 조선 인식은 물론 개별 선교사제의 인식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3)

 

이러한 프랑스 선교사제 중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S. Berneux, 1814~1866) 주교는 1866년 순교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56년부터 1866년까지 10년 동안 대목구장직을 수행했는데 ‘금압 시기’라는 한계 속에서 대목구의 조직을 정비하고 전교 방침을 확립했으며, 신학생 육성과 성영회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대목구의 기틀을 다지고 질적 · 양적 교세 확장을 이루어 낸 베르뇌 주교가 자신의 선교지인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그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어떤 선교 정책을 펼쳤는가는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이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가장 큰 원인은 베르뇌 주교에 대한 자료, 특히 주교가 작성한 서한 자료들을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된 베르뇌 주교의 서한은 1995년 그 판독본4)이 나왔지만, 판독 자체에 미비한 점도 있고 번역이 되지 않아 이용하기 쉽지 않았다. 최근까지 주요한 사료집으로 인식되던 달레(Ch. Dallet, 1829~1878)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역주본)5)에서도 베르뇌 주교의 서한을 직접 인용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6) 그러한 가운데 2015년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베르뇌 주교 전기의 역주본이 간행되었고,7) 2018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베르뇌 주교의 서한들을 다시 판독하고 역주한 서한집이 출간되었다.8)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베르뇌 주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한다.9) 이 글에서는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에 초점을 맞춰 그 내용과 의의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은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시론적 차원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선교지)에 대한 인식과 신자와 비신자를 아우르는 ‘조선인’에 대한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베르뇌 주교의 서한 자료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며, 비교를 위해 다른 대목구장(앵베르, 페레올 주교)의 자료도 참조할 것이다.

 

제2장에서는 조선 입국을 전후하여 베르뇌 주교의 전반적인 조선 인식과 이후 대목구장으로서 겪었던 대목구의 상황과 그에 대한 주교의 판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조선 신자에 대한 주교의 인식을 먼저 살펴보고, 주교가 신자와 비신자를 포함하여 전체 조선인이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 기질(특성)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은 물론 그가 지향했던 전교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색했던 방안까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인식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

- ‘평화’도 ‘전쟁’도 아닌 전교 지역

 

베르뇌 주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ère, 1792~1835) 주교나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1796~1839) 주교와 달리 조선 전교를 자원한 것이 아니었다.10) 그는 만주대목구의 자기 사목지에서 1854년 12월 24일경 자신을 조선대목구장로 임명한다는 교황 칙서를 받고 난 다음 잠시 고민한 끝에 조선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래전부터 약해진 건강과 어지간히 많은 나이 때문에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을지, 새로운 나라의 관례와 풍습을 따를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보낸 12년 세월이 나로 하여금 그곳 교우들에게 유난히 애착을 갖게 했다는 것도 말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조선입니다! 훌륭하신 순교자들의 땅, 그 이름만으로도 선교사제의 온 마음에 울림을 주는 조선입니다. 이제 그 문이 내 앞에 열려 있는데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겠습니까! 더구나 교황청의 지시가 급박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새 책무를 받아들이고 임지를 향한 길에 올랐습니다.11)

 

이 (조선의) 신앙공동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졌고, 긴 세월 동안 어떤 선교사제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뜨거운 신심과 역동적인 기질로 지탱해 왔으며, 피로 물든 박해를 겪으면서도 오히려 성장했습니다.12)

 

‘교황 파견 선교사제’로서 베르뇌 주교는 순명의 원칙에 따라 조선대목구장직을 수락했지만 동시에 ‘순교자의 땅’에 가서 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수 없다고 했다.13) 그는 험난한 해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는데, 직접 마주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 ‘혹독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성장해온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처럼 베르뇌 주교에게 조선은 무엇보다 훌륭한 순교자의 땅이며, 뜨거운 신심과 역동적인 기질로 스스로 성장해온 신앙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한 조선의 선교사제이자 대목구장으로서 베르뇌 주교가 자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외에 그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저 혼자만 수도(서울)에 머물고 있는데,…여기서 평온히 지내기 위해서는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제 거처는 삼엄한 감옥이 되었습니다.…대신 제가 얻는 보상이 있다면, (선교사제들에게) 일본의 입국로가 닫혀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저는 ‘극동’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편지를 써서 유럽에 보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14)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반적 인상은 지리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양 중심적 시각에서 일본과 함께 조선이 ‘세상의 동쪽 끝 극동(極東)’에 위치했다고 여겼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삼았던 선교사제들에게 ‘극동’에 위치한 일본과 조선의 전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컸다.15)

 

베르뇌 주교가 지적했듯이 당시 일본의 전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선은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세상 끝’이었다. 따라서 세상 끝에 위치한 조선에 자리를 잡은 대목구장이라는 사실이 베르뇌 주교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었다. 이는 자신이 세상에서 먼저 해가 뜨는 ‘극동’의 선교사제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던 앵베르 주교의 인식과 비슷한 것이다.16)

 

‘극동’에 위치한 선교지이자 순교자의 땅이라는 ‘조선’에 대한 인상은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조선대목구 선교사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서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특성과 서양과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 때문에 은둔의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작고 가난한 나라, 중국(일본)에 종속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다. 초대 브뤼기에르 주교 이래 제2대 앵베르 주교, 제3대 페레올(J. Ferréol, 1808~1853) 주교 등 베르뇌 주교의 선임 조선대목구장들의 서한에서 ‘은둔’, ‘가난’, ‘종속’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항상 조선에 따라다녔다.17)

 

베르뇌 주교의 서한에서는 이러한 조선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국 배들을 포함해서 어떤 외국 선박도 조선에 들어올 수 없다.”18)고 지적한 점은 조선이 외부세계와 단절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향 신부에게 조선을 소개하는 서한에서 “도무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지방 고을에 비하면 수도(서울)는 낙원”이지만 “수도에서 생활 편의품 몇 가지를 구하려면 자신의 욕구를 단단히 자제해야”19) 한다고 적었는데, ‘낙후되고 가난한’ 조선 상황을 서양인에게 은유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중국 청 왕조와의 사대 · 조공 관계에 대해서 “다른 국가들과 어떤 교류도 없습니다. 단지 1년에 한 번씩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다고20) 언급한 것 외에는 특별히 양국 간의 종속 관계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북경에 주재하는 우리 (프랑스) 공사가 (위임한 자를 조선으로 파견하여) … 북경 황실의 이름으로 조선 임금에게 (종교의 자유를) 표명하게 하는” 것21)이 좋겠다는 천주교 공인 방책을 제시한 것을 보면, 프랑스 외교관이 청국의 ‘종주권’을 이용하여 조선 정부를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국의 종주권을 이용해서 천주교 공인을 얻으려는 방안은 페레올 주교가 1846년에 먼저 제시한 바가 있다.22)

 

베르뇌 주교는 선교지 조선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23) 중국과의 사대관계만을 맺으면서 외부세계(서양)와 단절되었으며 가난하고 가련하지만 완강히 천주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역대 조선대목구장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제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24)

 

역대 조선대목구장들(선교사제)은 입국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자료는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Nouvelles Lettres édifiantes)』(총 8권, 1818~1823)이다. 특히 1820년에 간행한 제5권에는 ‘조선’ 항목이 따로 있으며, 북경교구장 구베아(A. Gouvea, 1751~1808) 주교의 서한들25)과 1811년(신미) 조선 신자들이 북경교구장에게 보낸 서한이 모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 제5권에 실린 구베아 주교의 서한에서는 조선 국가(정부)를 선교사제의 입국을 막고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는 ‘폐쇄적인 나라’로 보고 있으며, 청(중국)의 시각에서 ‘중국은 종주국’, ‘조선은 조공국이자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신미년 서한은 신생 교회인 조선 천주교회가 ‘간악한 무리’(조선 정부)에게 박해를 받아 엄청난 희생(순교자)을 치르면서 살아남지만 한 명의 사제도 없기 때문에 성사를 받거나 교세를 늘려나갈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서한의 내용은 선교사제 파견을 바라는 조선 천주교회의 염원을 프랑스 천주교회가 이뤄주어야 한다는 호소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29년 조선 선교지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아야 한다는 편지를 전교회 본부에 보냈을 때 위의 책을 언급하면서 조선 관련 내용을 소책자로 만들어 배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계속 조선에 관심을 가지면서 1826~27년과 1830년, 1833년에 『전교회(전교후원회) 연보(APF)』에 투고하여 조선 선교지와 조선교회(조선 천주교회 약사)를 소개했다. 이후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대목구장과 조선 파견 선교사제들의 서한들도 『전교회 연보』에 게재됨으로써 프랑스(서양)에 조선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중국 측과 일본 측, 또는 ‘피해자’인 조선 신자가 기록한 자료들인 『감동적인 서한집 신편』과 『전교회 연보』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제들은 조선에 대한 사전 지식(정보)을 습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전 지식을 통해 사제의 전교 없이 성립되어 끈질기게 존재하는 조선 천주교회,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나라, 반대로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는 야만스러운 ‘조선’ 국가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26)

 

1856년 3월 27일 서울에 도착한 베르뇌 주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선교지 조선(대목구)의 상황을 해마다 작성한 서한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 파리 본부와 홍콩 대표부, 교황청 포교성, 성영회 본부, 동료 사제와 지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입국 후 최초로 보낸 서한들에서 베르뇌 주교가 파악한 조선대목구의 상황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화롭지도 박해 중에 있지도 않”았다.27) 즉, 1856년 이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1850년대 초 제3대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은 없지만 천주교 신자와 선교사제들이 범죄자로 취급받아 쫓겨 다니는 준(準)‘박해 시기’로 인식하고 있었다.28) 1853년에서 1856년까지 대목구장 직무 대리를 맡았던 메스트르(J. Maistre, 1808~1857) 신부 역시 조선대목구의 상황을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니다’라고 했다. 즉 정부의 공식적인 탄압은 없지만 신앙의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29)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실상은 존속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과 위축, 안정과 위기가 반복되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지하교회’였던 것이다.30)

 

…조선 신자들의 상황은 여전합니다. 평화롭지도, 박해 중에 있지도 않습니다. 조정에서는 신자들을 악착같이 수색하지는 않습니다. 유럽 열강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유럽 선박들은 계속해서 조선의 바다를 지나다니고 있습니다.…(비신자들의 밀고로) 신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큰 해를 끼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당히 많은 고결한 영혼들로 인해 우리의 작은 양 떼가 매년 늘어나는 것을 보며 위안을 얻습니다.31)

 

조선 ‘지하교회’의 수장인 베르뇌 주교는 페레올 주교나 메스트르 신부의 상황 인식을 이어받으면서도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유럽 선박의 출몰로 상징되는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을 억제하고 있다고 보았고,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고 교세가 확장되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대목구에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상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기치 못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교회의 존속이 위협받고 교세의 확장세가 꺾이기도 했다. 1859년 12월에 시작되어 1860년 8월까지 계속된 경신년(1860)의 천주교 박해와 1862년 전국적인 민란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베르뇌 주교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위기였다.

 

(경신년의 박해 중에) 교우 50명이 체포되었고 수많은 교우촌이 약탈당하고 불탔으며 200여 가구가 처참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해 공포심이 확산되었는데, 그 공포심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많은 이들의 입교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32)

 

조정에서 교우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배교시키거나 처형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나 교우들을 법 밖에 두고 교우들에게 온갖 학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하도록 하는 옛 법령들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습니다.33)

 

(1862년 당시 국지적 박해를 주도한) 비신자들, 관원들, 포졸들, 이런 자들은 얼마나 지독한 족속들인지요! 그들과 그들의 탐욕 때문에 복음을 그토록 잘 받아들이고, 예비 신자들이 많아서 비신자들 사이에서 ‘작은 유럽’이라고 불렸던 경상도가 완전히 싹 바뀌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열기가 곤두박질했고 우리 신자들은 사기가 꺾였습니다.…이와 같은 소리 없는 ‘전쟁’이 계속된다면 이 선교지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34)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적인 천주교 탄압은 없었지만, 천주교를 금압하는 법령들인 1801년의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과 1839년의 「척사윤음(斥邪給音)」을 근거로 비신자, 관원, 포졸들이 교우촌을 약탈하고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학대했다. 이러한 사태를 베르뇌 주교는 ‘전쟁’으로 비유했으며, ‘전쟁’이 계속된다면 조선 천주교회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위기로 인식되었던 상황 속에서 조선대목구가 한층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베르뇌 주교의 서한에 따르면, 1857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 사망 이후 천주교에 적대하는 정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날 조짐이 있었고,35) 1863년 말 철종(哲宗)의 사망 이후 풍양 조씨의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다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36) 하지만 주교와 신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정부 차원의 천주교 탄압은 없었고, 오히려 천주교 복음의 전파와 교세의 확장이 두드러졌다. 1862년부터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황해도를 비롯한 북부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37) 국지적 박해로 타격을 입었던 다른 지역의 신앙공동체도 복원되었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상류계층까지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었다.38)

 

1862년의 위기가 가라앉은 이후 조선대목구의 상황은 비관적이기보다는 낙관적인 증후들이 많았다.39) 그럼에도 천주교 금압 법령은 여전히 유효했고 ‘평화’도 ‘전쟁’도 아닌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베르뇌 주교도 잘 알고 있었고, 대목구 소속 신임 선교사제에게도 이를 주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급 관리와 포졸들의 박해와 미신 행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입교자들에 대한 비신자 마을 사람들의 박해와 입교한 이에 대한 가족들의 모진 학대만이 있을 뿐인데, 이러한 유형의 박해는 우리에게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 가엾은 조선은 끝나지 않는 전쟁터입니다.40)

 

(1865년 내포를 통해 입국한 4명의) 우리 새 동료 신부들은 조선에 오면서 하나도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콘 주교(다블뤼 주교)가 그들이 하선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모두 당일에 붙잡혀서 여럿이 참수당하고 선교지 전체가 크게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동에서 (소문을 듣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 조선에 배속된 신부들에게 다음의 당부 사항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 조정에서 우리를 뒤쫓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박해 때처럼 숨어 지내기 때문입니다. …

 

비록 (천주교가) 여전히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양호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보다 편안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41)

 

천주교가 공인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상황이 급변하면 언제든지 천주교 박해가 전개될 수 있었고, 선교사제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숨어서 ‘지하교회’에서 사목 활동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한 가운데 베르뇌 주교는 조선대목구의 안전을 위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주변 여건이 계속 호전되고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3. 열정적이면서 거만한 조선인

- ‘반(半)미개’에서 ‘그리스도화(化)’의 갈림길에 놓이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에게 조선인은 복합적인 대상이었다. 교회의 일원으로 선교사제들의 사목 대상인 신자들도 조선인이고, 그 신자들과 선교사제를 핍박하고 잡으려고 하는 비신자 · 포졸 · 관원들도 조선인이고, 새롭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대상도 조선인이었다. 신자와 ‘박해자’ 사이에는 천주교에 대해 다양한 생각과 태도를 지닌 비신자들이 있었는데, 때로는 ‘박해자’의 선동에 따라 천주교를 배척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주교회와 서양 세력에 의지해 자신의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기도 했다. 이 모두를 아울러 하나의 민족, 국민으로서 ‘조선인’이 인식되기도 했다.

 

앞의 장에서 언급했듯이 베르뇌 주교에게 조선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겪었지만 훌륭한 순교자를 배출하면서 성장해온 신앙공동체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크고 작은 박해 속에서 굳건히 신앙을 지키고 이웃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교사제들이 겪는) 궁핍한 생활은 어찌나 넉넉하게 보상을 받는지 우리는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답니다. 우리는 그 보상을 교우들의 믿음과 열의에서, 때론 영웅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항구함에서, 그리고 비신자들의 입교를 위해 애쓰는 그들의 헌신에서 받습니다.42)

 

이와 같이 베르뇌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열정적인 신앙에는 감탄하고 찬사를 보냈지만, 선교사제이자 대목구장의 입장에서 신자들의 부족한 점을 확인하고 그것을 채워줄 방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주교가 보기에 시급한 과제는 신자 교육 문제였다.

 

선교지 전반에 걸쳐 신자들의 교리 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 우리 선교사제들은 그 무지에 맞서 한참을 더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하고 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수단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교사제와 회장과 책과 시간이 부족합니다.43)

 

조선 선교지는 시초부터 끊임없이 박해에 시달렸고, 지금까지는 선교사제가 매우 부족해서 그들의 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교우 한 명에게 1년에 15분 이상을 할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우리처럼 선교사제 수가 부족한 처지에서는 책을 통해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 조선에는 책이 부족합니다.44)

 

베르뇌 주교는 천주교 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밀입국하여 활동하는 소수의 선교사제들만으로는 신자들을 충실히 교육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주교 서적의 번역과 간행에 주목했다. 실제로 주교는 1861년 서울에 목판인쇄소를 건립하여 수만 권의 서적을 간행해서 배포함으로써 신자들의 교육과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45)

 

그런데 베르뇌 주교가 신자를 포함한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기질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교가 가지고 있는 조선인 인식의 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신자) 그들은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고,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잠깐 보기 때문에 선교사제와 접촉이 거의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영성이 부족하고, 또 그들의 ‘거의 미개한’(demi sauvage) 기질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인보다 더 화를 잘 내고 더 오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심은 열렬하고 중국인들처럼 무관심하지는 않습니다.46)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콧대가 세고 굉장히 뻣뻣합니다. 저는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애초부터 저는 다정한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대목구장 직무대리) 메스트르 신부 때는 모성적인 방식, 애지중지하는 어머니의 방식으로 대했나 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부성적인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을 주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야단을 칩니다.…우리 (페낭 신학교) 학생들은 조선인들입니다. 이 민족 안에는 아직도 뭔가 ‘야생적인’(sauvage) 면이 있는데, 이 강철과 같은 성질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리브와) 신부님의 엄격함에 강력히 동의합니다.47)

 

조선에서는 가장 지위가 낮은 한 개인이 포졸이나 관원임을 자처하며 우리를 추방하는 법을 집행합니다. 이런 식의 처리는 아직도 반(半)야만적인(demi sauvage) 조선인의 기질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포졸보다 일반 개인을 더 두려워합니다.48)

 

베르뇌 주교에 의하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물론 조선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하는 비신자들까지 포함하여 조선인들은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화를 잘 내며 강철같이 뻣뻣해서 순종하지 않는 반(半)미개(demi sauvage)49)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나쁜 기질을 꺾기 위해 주교는 더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신자들을 대했다고 한 것이다. 특히 페낭 신학교에 유학 갔던 조선인 신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거만한 자세’에 대해 크게 걱정했다.

 

수단을 입는 것을 금지시키십시오. 수단이 (이만돌) 바울리노의 자만심을 키웁니다. … 이곳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거만한 사제가 해악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편지에서 유럽인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에 대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한탄했다고 합니다.50)

 

페낭에 있는 우리 학생 두 명(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은 1861년이면 신학 과정을 마칠 것입니다. 그들이 신부 몇 명과 함께 귀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신학생들이) 상해에서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도록, … 주의해야 하고 프랑스어도 익히지 말아야 합니다.51)

 

제가 필수품만 그들에게 주라고 권고했는데, 어떻게 (페낭 신학교에서 외상으로)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책(중국 서적)과 또 그들은 읽을 시간도 없는 책(라틴어 서적)을 그들에게 사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벌써 선교지에서 200권 이상의 책을 불태웠습니다. 이 학생의 책들이 제게 도착하면 그 책들도 그렇게 처리될 것입니다. … 그들이 조선에 귀국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의복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지고 오는 것을 금합니다.52)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답게 반미개적인 기질’을 가져 거만한 데다가 유럽인에게 반감을 드러낸 이만돌 신학생에게 수단을 입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주교의 허락 없이 구입한 서적을 조선으로 가져오겠다는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 신학생에 대해 그 책들을 없앨 것이고,53) 상해에서 다른 물건을 구입하게 해서는 안 되며 프랑스어도 익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베르뇌 주교는 현지인 선교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최양업 신부에 대해 높게 평가했지만,54) 자존심이 강하고 순종적이지 않은 신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학생들의 단점에 대해 주교는 반미개적인 조선인 기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반미개’라는 인식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서도 확인된다. 그는 조선을 ‘폐쇄적인 은둔국가’이자 ‘미개와 야만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음식 조리 등 서양과 이질적인 조선 문화 자체도 미개한 것으로 치부했다. 몇 년간 머물렀던 중국 북부(만주지역)도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페레올 주교는 조선은 그 중국 북부 지방보다 더 뒤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서양을 기준으로 문명화의 정도에 따라 “서양(문명) → 중국의 마카오(半미개) → 중국의 북부 지방(미개) → 조선(미개 · 야만)”으로 구분했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문명과 천주교의 영향을 받게 된 마카오 지역을 미개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조선도 천주교를 통해 문명화하는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조선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한탄했다.55)

 

이러한 페레올 주교의 인식에는 선교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도덕적이고 애타주의적인 사명감이 넘치는 동시에 그 내면에는 ‘조선인 · 조선 문화 = 미개 · 야만’, ‘프랑스 · 천주교 =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오리엔탈리즘)와 서구 문명(천주교)의 우월감, 전교 제일주의가 뿌리 깊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56) 베르뇌 주교의 조선인 인식도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고, 사실 19세기 내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57)

 

한편 선교사제로서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에 대해 ‘변화’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고, 신자와 비신자를 포함해 조선인들에게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선량한’ 부분이 있고 결국 ‘그리스도교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58) 그가 ‘반미개적’이라고 표현한 조선인의 기질은 복음의 전파를 막는 요소이자 반대로 전파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인은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의향이 중국인보다 훨씬 더 큽니다.59)

 

비신자들도 대체적으로 선량한 정신에 고무되어 있으니, 우리가 선교의 자유를 얻기만 한다면 머지않아 조선은 나라 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될 것입니다.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날마다 확산되고 있고, 궁중의 대신들과 왕족들에게까지 스며들어 갔습니다.60)

 

조선인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놀랍습니다. 조선인은 일단 진리를 알게 되면 어떤 희생을 치른다 해도 그 진리를 꼭 부여잡습니다. … 만일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다면, 수천 명의 조선인이 입교할 것입니다.61)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이 자존심이 강하고 거만하지만 한 번 신앙을 받아들이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성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이 12년간 머물렀던 중국(만주대목구)과 비교해도 조선인들이 천주교로 입교하는 데 열정적이었고, ‘그리스도교화’의 가장 큰 걸림돌인 금지 법령이 폐지되고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베르뇌 주교가 전망하는 ‘그리스도교화’가 곧바로 ‘유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교는 조선인을 유럽화하려는 시도는 거만한 태도이며 잘못된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선교사제를 파견하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파리 신학교)의 장상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당부 사항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장상 신부님, 조선에 배속된 신부들에게 다음의 당부 사항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 미래의 우리 동료 신부들에게 다음 내용을 잘 새기도록 해 주십시오. 조선에 일단 도착하면 그들은 반드시 조선의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들은 전혀 비난할 것들이 아닙니다. 또 그들을 유럽화하려는 거만함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이 동양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우선 그들을 유럽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크나큰 오류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의 정당한 관습을 버리게 하지 못할 것이고 게다가 종종 그들의 관습이 유럽의 것보다 훨씬 나을 때가 있습니다.62)

 

선교지의 관습을 유럽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라는 베르뇌 주교의 지침은 1658년 교황청 포교성에서 내렸던 훈령 내용과 거의 같다.63) 파리외방전교회도 기본적으로 이 원칙을 받아들였고 동아시아 파견 선교사제들은 자기가 배속된 선교 지역의 언어와 풍속을 습득하고 될 수 있는 한 선교지의 전통문화와 부딪히지 않으려 했다. 이 원칙을 주교가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의 관습을 존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관습이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까지 한 것은 특이한 점이다. 이는 베르뇌 주교가 언급한 ‘유럽화’의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주교가 경계한 ‘유럽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의 서한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저는 공화주의적 자유사상, 탈권위 사상이 유럽을 장악했고, 10년째 나와 있는 선교사제들은 이 사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이는 슬픈 일입니다. 그러니 신부님께서 수련자들에게 장상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순종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4)

 

베르뇌 주교는 공화주의, 자유주의, 탈권위 사상이 유럽을 장악했으며 젊은 사제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럽을 지배하는 반(反)천주교적 세속 사상들이 교회 내 위계질서를 흔든다고 보았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던 조선 신학생의 불순종과 거만함을 지적하면서 신학교의 기강을 우려했다. 이러한 베르뇌 주교의 인식에는 ‘반(反)근대주의’ 사고가 기반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65)

 

종교적 열정이 강한 서북부 출신인 베르뇌 주교는 당시 유럽의 근대사상을 반대했고, 천주교의 보호와 확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표방한 나폴레옹 3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66) 그에게 반천주교적인 근대 유럽을 조선에 이식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버지’로서 대목구장의 권위와 교회의 위계질서에 친화적인 조선의 전통문화가 유럽의 근대사상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천주교 전파와 함께 서양 근대문명의 유입까지 포함된 ‘문명화’라는 말을 쓴 데에 비해 베르뇌 주교는 ‘유럽화’가 배제된 오로지 ‘그리스도교화’라는 말만 사용했다.

 

페레올 주교는 1840~1845년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 대륙을 위아래로 왕복하면서(마카오~상해~소팔가자) 아편전쟁 이후 변화하는 중국의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특히 무력을 앞세운 서양 제국에 의해 중국의 항구가 개방되고 개항장에 유럽인이 상주하게 되면서 천주교 전파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자 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서양과의 교섭을 일절 거부하고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은 가장 미개·야만스럽다고 판단했고, 중국에서처럼 서양 제국(프랑스)이 무력시위를 동원해서라도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천주교 공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67) 따라서 그는 통상(세속 자본주의)과 전교가 상호보완 관계이자 상호대립이라고 여기지는 않았고, 서구 문명의 유입(반천주교적 세속 사상)에 대한 경계심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1840~1850년대 베르뇌 주교는 베트남과 만주대목구에서 10년 이상을 사목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주민과 전통문화에 대한 경험이 많았고, 서양 문물과 그리스도교(천주교, 개신교 포함)의 유입 이후 선교지의 변화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외교관이나 군대의 힘이 교회와 선교사제들을 보호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체험했지만 동시에 비신자들의 반발과 증오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진출과 ‘탐욕스러운’ 상인들의 행태는 천주교회의 명성을 훼손시키고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다고 인식했다. 그는 천주교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는가가 기준이 되어 선교지의 전통문화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재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복음과 문화가 조선사회의 전통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리스도교화’가 베르뇌 주교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베르뇌 주교가 순수한 ‘그리스도교화’를 지향했던 것과 별도로 조선사회를 둘러싼 대내외적 상황 변화는 일부 조선인들에게 서양 세력의 개입과 천주교의 공인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조선은 내란을 겪을 일도, 외국과의 전쟁을 치를 일도 없지만 그래도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1859년과 1860년에 콜레라가 번져 잔혹할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는데, 올해(1861년)에는 기근이, 지독한 기근이 들어 조선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쌀이 전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닌데,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쌀을 모조리 독점하는 바람에 쌀값이 폭등하여 가난한 백성은 쌀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왕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탄식하며 말합니다. 또 고통을 어느 정도 줄이려면, 오로지 기댈 곳은 서양 강국들이라며 공공연하게 바라고 있습니다.68)

 

일 년 전(1862년)부터 우리 천주교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1860년 북경조약 체결 이후) 중국에서 그랬듯이 천주교가 조선에서도 공인될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 나라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다 알려진 선교사제들이 곧 공개적으로 설교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69)

 

1860년대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지고 세도정권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고통에 시달리던 민인들은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한 가운데 1862년(임술)같이 민란이 각지에 일어나 폐정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고, 일부는 왕조의 전복이나 외세의 개입을 바라게 되었다. 외부의 구원자로서 서양의 강국이 언급되기도 하고, 중국에서처럼 천주교가 조선에서도 공인될 것이라고 기대 섞인 예상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반미개’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이 ‘그리스도화’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으며, 천주교의 공인을 통한 ‘그리스도교화’라는 목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 교우들은 전반적으로 사기가 약간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중국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것을 보면서 그 자유가 자신들에게도 주어질 것이고 관리들과 포졸들, 비신자들로부터 견뎌야 하는 온갖 학대에서 해방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 그들의 처지는 상당히 개선되어 왔지만, 그들은 아직 남아 있는 고통을 간신히 견디고 있습니다.70)

 

중국에서 천주교가 공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신자들은 자신들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고 비신자, 포졸, 관리들에게 당하던 학대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전쟁’도 ‘평화’도 아닌 ‘지하교회’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신자들이 전반적으로 사기가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의 교세 확장 추세를 유지하고 신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라도 천주교 공인은 대목구장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베르뇌 주교는 기질적으로 ‘열정이면서 거만한’ 조선인들이 엄격하고 충실한 교육을 받으면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주교는 점차 대내외적으로 조선대목구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외부의 구원을 바라는 비신자들과 신앙 자유를 고대하는 신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천주교 공인을 시도하게 되었다.71)

 

 

4. 맺음말

 

베르뇌 주교는 조선 전교를 자원한 것이 아니라 교황의 임명에 따라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순명의 원칙에 따라 대목구장직을 수락했지만 동시에 ‘순교자의 땅’에 가서 전교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세상 끝’(극동)인 조선의 천주교회가 ‘혹독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성장해온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한 주교는 선교사제이자 대목구장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그와 동시에 중국과의 사대관계만을 맺으면서 외부세계(서양)와 단절되었으며 가난하고 가련하지만 완강히 천주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역대 조선대목구장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제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입국 이후 베르뇌 주교가 파악한 조선대목구의 상황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화롭지도 박해 중에 있지도 않았다. 당시 선교사제들이 파악한 조선교회의 실상은 존속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과 위축, 안정과 위기가 반복되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지하교회’였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적인 천주교 탄압은 없었지만, 천주교를 금압하는 법령들(토역반교문과 척사윤음)을 근거로 비신자, 관원, 포졸들이 교우촌을 약탈하고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학대하는 ‘전쟁’ 상황이 지속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이러한 인식을 이어받으면서도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고통을 받고 교회의 존속이 위협받기도 했지만, 주교는 서양 세력(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을 억제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고 교세가 확장되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교는 조선대목구의 안전을 위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주변 여건이 계속 호전되고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열정적인 신앙에는 감탄하고 찬사를 보냈지만, 신자 교육 문제는 시급하다고 보았다. 소수의 선교사제들만으로는 신자들을 충실히 교육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천주교 서적의 번역과 간행에 주목했다. 주교는 1861년 서울에 목판인쇄소를 건립하여 수만 권의 서적을 간행하여 배포함으로써 신자들의 교육과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베르뇌 주교는 신자를 포함하여 조선인들이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화를 잘 내며 강철같이 뻣뻣해서 순종하지 않는 반(半)미개(demisauvage)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나쁜 기질을 꺾기 위해 주교는 더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신자들을 대했다고 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순종적이지 않은 페낭 유학 신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인 = 반미개’라는 인식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서도 확인되는데, 선교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도덕적이고 애타주의적인 사명감이 넘치는 동시에 그 내면에는 ‘조선인 · 조선 문화 = 미개 · 야만’, ‘프랑스 · 천주교 =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오리엔탈리즘)와 서구문명(천주교)의 우월감, 전교 제일주의가 뿌리 깊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베르뇌 주교의 조선인 인식도 이와 유사한 것이며, 19세기 내내 서양인 선교사제들(개신교 선교사 포함)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반면 베르뇌 주교는 ‘반미개적’인 조선인들이 자존심이 강하고 거만하지만 한 번 신앙을 받아들이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성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만주대목구)과 비교해도 조선인들이 천주교로 입교하는 데 열정적이었고, 금지 법령이 폐지되고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르뇌 주교가 전망하는 ‘그리스도교화’가 곧바로 ‘유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교지의 관습을 유럽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라는 주교의 지침은 1658년 교황청 포교성에서 내렸던 훈령 내용과 거의 같다. 더 나아가 주교는 조선의 관습을 존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관습이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낫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주교의 인식에는 ‘반(反)근대주의’ 사고가 기반에 깔려 있는데, 공화주의, 자유주의, 탈권위 사상 등 반(反)천주교적 세속 사상을 조선에 이식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아버지’로서 대목구장의 권위와 교회의 위계질서에 친화적인 조선의 전통문화가 유럽의 근대사상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복음과 문화가 조선사회의 전통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그리스도교화’가 주교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다.

 

베르뇌 주교가 순수한 ‘그리스도교화’를 지향했던 것과 별도로 일부 조선인들은 서양 세력의 개입과 천주교의 공인을 기대했다.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지고 세도정권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일부 사람들은 외부의 구원자로서 서양의 강국에 기대려 했고, 중국에서처럼 천주교가 조선에서도 공인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반미개’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이 ‘그리스도화’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으며, 천주교의 공인을 통한 ‘그리스도교화’라는 목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신앙 자유’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신자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의 교세 확장 추세를 유지하고 신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라도 천주교 공인은 대목구장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베르뇌 주교는 기질적으로 ‘열정이면서 거만한’ 조선인들이 엄격하고 충실한 교육을 받으면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주교는 점차 대내외적으로 조선대목구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외부의 구원을 바라는 비신자들과 신앙 자유를 고대하는 신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천주교 공인을 시도하게 되었다.

 

앞으로 베르뇌 주교에 대해 그의 조선 인식을 비롯하여 다루어야 할 연구 주제가 많다. 조선 인식이라는 주제로 좁혀 본다고 해도 조선 문화와 풍속에 대한 주교의 인식, 조선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관련된 주교의 인식, 주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에 대한 인식, 중국과 프랑스까지 시야에 넣어 동아시아 천주교사 관점에서 접근하는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 등 새롭게 규명해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베르뇌 주교를 중심으로 선·후임 대목구장이나 다른 선교사제들과의 비교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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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치권은 교회 내의 입법, 행정, 사법을 포함하나 국가의 삼권분립 제도와는 달리 재치권자가 삼권을 모두 가지며 다만 그 행사의 편의상 기능의 분립이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재치권자는 자기 구역에 상주하는 자에게뿐 아니라 그 구역 안에 여행, 기타의 이유로 잠시 들어온 자에게 행사할 수 있으며, 재치권에 복종하는 자가 다른 구역에 가 있어도 그 자에게 행사할 수 있다.

 

2)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54쪽.

 

3)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의 조선 인식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최석우, 「재한 천주교 선교사의 한국관과 선교 정책」,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4 ; 김용구, 「서양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상」, 『국제문제연구』 9-1,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1985 ; 김정옥, 「박해기 선교사들의 한국관」, 『한국교회사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 여동찬, 「개화기 불란서 선교사들의 한국관」, 『교회사연구』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이병호,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성과 한국 교회」, 『교회사연구』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盧吉明, 「개항기 제국주의열강의 조선공략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태도」, 『한국의 사회와 역사』(최재석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김정숙, 「깔래 신부 활동을 통해서 본 1860년대 조선 가톨릭 문화」, 『(九谷黃鍾東敎授停年紀念) 史學論叢』, 九谷黃鍾東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刊行委員會, 1994 ; 조현범, 『문명과 야만 -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책세상, 2002 ; 조현범, 「19세기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이미지에 관한 사례 연구―프티니콜라(Petitnicolas, 1828-1866)의 경우」, 『프랑스학연구』 30, 프랑스학회, 2004 ;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 김규성, 「19세기 전·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3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 조광,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선교사의 한국인식 - le Pére Calais, M.E.P.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景仁文化社, 2010 ; 이석원, 「1830년대 로마가톨릭의 동아시아 선교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활동」, 『교회사학』 8,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의 방아책 제시의 배경과 전개」, 『교회사연구』 40,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 이석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朝鮮) 인식」, 『교회사학』 9, 수원교회사연구소, 2012 ; 방상근,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인식」, 『東洋學』 68,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院, 2017 ; 여진천, 「배론 신학교 프티니콜라 신부의 삶과 조선 인식」,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재조명』, 원주교구문화영성연구소, 2017 ; 여진천, 「푸르티에 신부의 조선 인식」,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재조명』, 원주교구문화영성연구소, 2017 ; 윤용복, 「일제 강점기 천주교 선교사들의 한국 인식」, 『한국학연구』 62,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7 ; 이석원, 앞의 책, 2018.

 

4) 배세영(펠리스[Pélisse]) 신부 판독, 『베르네(S.F. Berneux, 張敬一) 문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30통의 베르뇌 주교 서한과 기타 서한 등을 수록한 최초의 자료집이다.

 

5)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이하 ‘『달레 교회사』 하’로 약칭함).

 

6) 달레 신부는 바로 뒤에 언급할 피숑 신부의 전기를 참조했는데, 전기 안에 수록된 베르뇌 주교 서한을 자신의 저서(『달레 교회사』)에 많이 인용했다.

 

7) 피숑 신부 저, 정현명 역, 『성 베르뇌 주교 전기』,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피숑 신부의 전기 원본은 1868년에 프랑스에서 간행된 것으로 베르뇌 주교의 삶과 순교, 전교 활동(베트남, 만주, 조선 포함)을 다루고 있다. 이 전기에는 베르뇌 주교의 서한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자료집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이하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하)’로 약칭함). 이 서한집의 일러두기(34쪽)에는 새로운 판독자(장신호 주교, 지정환[Didier] 신부)와 번역자(장신호 주교, 한윤식 신부, 강영수, 서정화, 유소연), 감수자(유서연, 신혜림), 해제·약전·각주 작업자(조한건 신부, 방상근)가 명시되어 있다. 이 역주본은 한국천주교사학계에서 기념비적인 성과이지만, 전거 자료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지 않고 전거 인용에서 원문서의 쪽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점은 아쉽다.

 

9) 2018년 역주본 서한집이 간행되기 전에 베르뇌 주교의 서한을 번역·인용한 선구적인 성과로 조현범, 앞의 책(2008)과 김규성, 앞의 논문(2012)이 있다. 2018년에는 역주본 서한집과는 별도로 베르뇌 주교의 서한 번역본을 활용한 박사 논문(저서로 보완되어 출간)이 나왔다. 이석원, 『19세기 중반 조선대목구장들의 천주교 공인(公認) 시도와 조선의 대응』,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 이석원, 앞의 책, 제1부. 이석원의 책은 위의 박사학위논문을 제1부로, 기타 논문 3편을 제2부 보론으로 실었으며, 내용을 수정·보완했다. 이 논문과 저서에서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조선대목구장들의 조선 인식과 천주교 공인 시도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여기에 인용된 베르뇌 주교의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제인 최세구(제제구[Jézégou]) 신부가 번역한 것이다.

 

10) 1845년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주교직을 제안받았지만 당시 베르뇌 신부는 이를 사양했다. 그러나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유언장에서 베르뇌 신부를 자신의 부주교로 지명했고, 로마 교황청은 페레올 주교 사후 베르뇌 주교를 1854년 8월 5일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1855년 1월 16일 만주에서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43~45쪽).

 

11) 1857년 9월 15일 앙리 드 라 부이으리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343쪽.

 

12) 1857년 11월 23일 전교(후원)회 참사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509~511쪽.

 

13) 베르뇌 주교는 자신이 “의무감으로, 그러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조선에 왔”다고 했다(1856년 9월 21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95쪽).

 

14) 1856년 9월 21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93쪽.

 

15) 이석원, 앞의 책, 74쪽.

 

16) 앵베르 주교가 1839년 3월 30일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485~487쪽.

 

17) 프랑스 대목구장들은 타자(他者)인 조선 국가와 사회가 가지는 독자성을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선교와 박해(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바라보았으며, 이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귀결되었다(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기록에 나타난 샴과 중국」, 『동국사학』 49,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0, 153~154쪽 ; 이석원, 앞의 책, 75~76쪽).

 

18) 1857년 11월 18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491쪽.

 

19) 1863년 2월 20일 베르뇌 주교 고향 르망교구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357쪽. 같은 서한에서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은 수도를 환희의 도시라고 부르는데, 가련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적으면서 ‘가련한’ 조선인들에게 대한 동정심을 드러냈다.

 

20) 1861년 9월 29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215쪽.

 

21) 1863년 11월 18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473쪽.

 

22) 이석원, 앞의 책, 98~100쪽.

 

23) 베르뇌 주교는 고향의 누아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사랑스러운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지상 낙원입니다. 당신 천국의 한 부분을 제게 떼어 주신 주님은 천번 만번 찬미 받으소서.”라고 적었다(1863년 2월 20일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355쪽). 이는 훌륭한 신앙공동체가 존속하면서 동시에 박해가 끊이지 않아 선교사제이자 대목구장으로서 할 일이 많다는 역설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24) 유럽의 선교사제들이 동아시아로 와서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조선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고, 조선 인식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16~17세기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제들은 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을 통해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중국이나 일본 자료에 주로 의존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시각을 그대로 투영해서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누구와도 교역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일본의 침공을 받는 나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은둔·폐쇄’의 이미지가 점차 ‘미개성’과 ‘후진성’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이석원, 앞의 책, 68쪽).

 

25)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 자 서한(조선 천주교회 약사)과 1801년 7월 23일 자 서한이 실려 있다. 1797년 서한(라틴어 원문)은 1800년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나 간행은 1820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1801년에 이미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로마에서 간행되었고, 1808년에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어 리스본에서 간행되어 유럽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최석우,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66~170쪽).

 

26) 이석원, 앞의 책, 68~74쪽.

 

27) 1856년 7월 15일 만주대목구 선교사제 프랑클레 신부에게 보낸 서한과 같은 해 9월 4일 전교(후원)회 참사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63쪽·279쪽.

 

28) 페레올 주교가 1852년 9월 19일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617쪽.

 

29) 메스트르 신부가 1853년 10월 20일에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서한, 『달레 교회사』 하, 205~206쪽.

 

30) 이석원, 앞의 책, 66쪽.

 

31) 1856년 9월 4일 전교(후원)회 참사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79쪽.

 

32) 1860년 10월 24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89~91쪽.

 

33) 1862년 11월 23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311~313쪽.

 

34) 1862년 11월 4일 홍콩 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265~267쪽.

 

35) 1857년 11월 23일 전교(후원)회 참사회에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79쪽. 513쪽.

 

36) 1864년 7월 22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543쪽.

 

37) 1862년 11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291~293쪽. 1863년에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신앙공동체가 설립되었다(1863년 2월 19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과 같은 해 11월 24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341쪽·491쪽).

 

38) 1863년 11월 18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469쪽.

 

39) 1863년 9월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에 신설된 교우촌을 방문했다가 비신자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고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주교를 관아에 넘겨주지 않고 풀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3년 전이었다면 자신이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했다(1863년 11월 25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517쪽).

 

40) 1864년 11월 15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587~589쪽.

 

41) 1865년 11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639~641쪽·647쪽.

 

42) 1857년 9월 15일 앙리 드 라 부이으리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355쪽.

 

43) 1859년 11월 6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729~731쪽.

 

44) 1857년 11월 11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429쪽.

 

45) 베르뇌 주교가 설립한 목판인쇄소와 천주교 서적 간행에 대해서는 이석원, 「19세기 서울지역 천주교회 목판인쇄소 운영과 서적 유통」, 『조선 후기 서울 상업공간과 참여층』, 서울역사편찬원, 2021 참조할 것.

 

46) 1861년 8월 20일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157쪽.

 

47) 1859년 8월 5일 홍콩 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703~705쪽.

 

48) 1861년 2월 16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125쪽.

 

49) 역주본인 『베르뇌 주교 서한집』에는 ‘거의 미개한’, ‘야생적인’, ‘반야만적인’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demi) sauvage로 동일하다. 이 글에서는 ‘반(半)미개’로 번역어를 통일했다.

 

50) 1859년 8월 5일 홍콩 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705쪽.

 

51) 1860년 10월 24일 홍콩 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95~97쪽.

 

52) 1861년 2월 16일 홍콩 대표부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139~141쪽.

 

53) 베르뇌 주교는 조선대목구에 서적이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200권 이상의 책을 불태웠다고 했다. 주교의 입국 이전부터 유포되었던 책들을 ‘검열’하여 부적절한 책을 골라 없앴다는 의미

로 보인다.

 

54) 1865년 2월 2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613쪽.

 

55) 이석원, 앞의 책, 89쪽.

 

56) 이석원, 앞의 책, 77쪽·93쪽.

 

57) 조현범, 앞의 책, 87~89쪽 ; 김상민, 「서양문헌에 나타난 한국 - 정형화된 이미지와 사실의 간극 -」, 『동국사학』 49, 동국사학회, 2010, 193쪽.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러한 이분법적 문명관을 공유하고 있었다(오상미, 「헐버트(H.B. Hulbert)의 조선문명화론」, 『학림』 32,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2011, 10쪽).

 

58) 문명화(그리스도교화)의 목적으로 조선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잠재력을 신뢰할 필요가 있었다. 문명화(그리스도교화)의 잠재력이 있다는 전제는 조선 내에서 이들의 사명이 가능한 것이라는 의의를 부여해 줄 뿐 아니라 이들의 선교활동에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오상미, 앞의 논문, 12쪽). 천주교의 선교사제인 베르뇌 주교도 자신의 사명에 의의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의 그리스도교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59) 1856년 9월 4일 전교(후원)회 참사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279쪽.

 

60) 1857년 9월 15일 앙리 드 라 부이으리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상, 355쪽.

 

61) 1863년 2월 20일 베르뇌 주교 고향 르망교구 누아르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379~381쪽.

 

62) 1865년 11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641쪽.

 

63) 포교성의 훈령에는 “선교지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예식이나 관습, 도덕 관념 등이 명백하게 천주교회의 교리와 배치된다고 판단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을 금지하거나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선교 지역의 주민을 대할 때에 유럽 교회의 모습을 이식하려는 태도를 가지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다(조현범, 앞의 책, 54~56쪽).

 

64) 1861년 2월 16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129~131쪽.

 

65) 프랑스 천주교회는 공화주의(자유주의)와 정교분리를 표방했던 프랑스대혁명 이후 반공화주의적 정치 성향과 정교분리를 거부하는 반근대주의적 사고를 19세기 내내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지방 사회로 갈수록 더 강화되었는데, 대부분 지방 농민의 자식이거나 지방 소도시의 노동자 집안 출신인 조선 파견 선교사제들은 순수한 신앙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조현범, 앞의 책, 103~117쪽).

 

66) 피숑 신부 저, 정현명 역, 『성 베르뇌 주교 전기』, 수원교회사연구소, 2015, 362쪽.

 

67) 이석원, 앞의 책, 88~93쪽.

 

68) 1861년 8월 30일 앙리 드 라 부이으리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185쪽.

 

69) 1863년 11월 25일 성영회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513쪽.

 

70) 1864년 8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베르뇌 주교 서한집』 하, 571쪽.

 

71) 베르뇌 주교의 천주교 공인 방안, 특히 흥선대원군과의 협상 시도는 이석원, 앞의 책, 123~149쪽 참조.

 

* 이 글은 2021년 10월 1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 보완한 것임.

 

[교회사 연구 제59집, 2021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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