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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현양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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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16 ㅣ No.2043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현양 절실

 

 

김대건 신부와 동기 동창이지만 순교한 김 신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최양업 신부는 당시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 조선 8도 중 5개 도에 있는 127개 교우촌을 담당했던 ‘열정의 사제’였습니다. 또 박해를 피해 사람이 살 수 없는 산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해마다 7,000리씩 걸었던 ‘땀의 증거자’였죠.

 

그동안 한국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준비하며, 올해 탄생 200주년, 선종 160주년을 맞아 시복이 이뤄지길 기대했지만, 아직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좀 더 최 신부의 시복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의 생애

 

최양업 신부를 제대로 알기 위해 출생과 이름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출생일은 1821년 3월 1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문헌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라 집안의 전승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출생일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 박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출생일은 1821년 초 혹은 3월 중일 가능성은 있지만, 3월 1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양력인지 음력인지도 몰라 출생일은 더 연구해봐야 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최 신부의 선종일은 1861년 6월 15일로 사료에 기록이 남아있어 명확합니다.

 

최 신부의 이름인 ‘양업’에 대해서도 여러 추론이 존재합니다. 원주교구 배론성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사제도마최정구지묘’(司祭篤瑪崔鼎九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도마’(篤瑪)는 최양업 신부의 세례명 토마스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묘비에는 ‘최양업’ 대신 ‘최정구’로 기록돼 있는데, 일부 문헌에서도 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 이름이 정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제 이름인 ‘구정’(九鼎)을 오기한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그의 남동생들 이름도 희정, 선정, 우정, 신정 등입니다. 실제 경주 최씨 세계(世系)에도 최양업 신부가 ‘장자 구정’(長子 九鼎)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럼 ‘양업’은 어떤 이름일까요. 차기진 박사는 ‘양업’은 아명, ‘구정’은 족보상 이름이라고 밝혔습니다. 혹은 구정이 관명(冠名, 관례를 치르고 받는 이름)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교회사학자 원재연 박사는 ‘양업’에 대해 15세 무렵 받은 관명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관명 전에 쓰던 아명은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론했죠.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발과 땀으로 이룬 사목

 

최양업 신부는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며 양들을 찾아다닌 목자였습니다. 박해시대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가 그들 곁에 있다는 커다란 희망과 위안이 됐죠.

 

그가 조선에서 사제로 사목한 기간은 1849년 말부터 1861년 6월까지 11년 6개월입니다. 처음 조선에서 사목을 시작할 때는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등 박해가 계속되며 신자들의 삶이 피폐해졌을 시기입니다.

 

그가 남긴 서한들을 보면 그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진심으로 신자들을 사랑했는지,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신자들을 위해 얼마나 진심으로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박해시대, 위험한 고비와 육체적 고통을 어떻게 믿음으로 이겨냈는지도 나와있습니다.

 

최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스승 신부에게 전한 서한 내용 한 구절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제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 순회의 모든 것을 끝마치고 새벽 동이 트기 전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복음화 사업의 절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1858년 흉년이 들면서 온갖 유언비어들이 나돌아 인심이 흉흉했습니다. 그 전해의 성직자 회의에서는 세례 준비 규정을 엄격히 정했지요. 그 결과 영세자 수는 대폭 감소된 반면, 예비신자 수는 거의 3배로 증가했습니다. 1859년에는 최 신부의 관할구역에서만 예비신자가 1,000명이 넘었습니다.

 

결국 그는 1861년 6월 15일 신자들을 돌보는 데 온 정성을 쏟다 과로로 40세의 나이에 선종했습니다.

 

 

시복 절차 그리고 기적 심사

 

그런데 왜 아직 최양업 신부 시복에 대한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 걸까요? 먼저 시복시성의 단계별 호칭을 살펴보겠습니다.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는 그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호칭이 ‘하느님의 종’, ‘가경자’, ‘복자’, ‘성인’으로 바뀝니다.

 

먼저 순교자나 성덕이 뛰어난 증거자 중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면 ‘하느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지역교회에서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를 선정하고 그 생애와 행적을 담은 간략한 전기인 ‘약전’을 교황청 시성성에 보냅니다. 그러면 시성성은 이 자료를 검토한 뒤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데 ‘장애 없음’ 교령을 보냅니다.

 

최양업 신부의 호칭인 가경자(加敬者)는 순교나 영웅적 덕행이 인정돼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016년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며 최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습니다. 이 단계까지는 신자들이 시복 추진 대상자를 공적으로 경배할 수 없습니다.

 

복자(福者)는 교회가 정한 시복재판 절차를 거쳐 시복식에서 선포되며, 이때부터 해당 지역교회의 신자들은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성인(聖人)은 이미 시복된 복자에 한해 시성식을 통해 탄생합니다. 복자와 성인은 신자들이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인은 전 세계 모든 교회가 공경할 수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현재 최양업 신부의 시복은 증거자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순교 사실 자체로 기적 심사가 면제되지만, 증거자 시복을 위해서는 ‘기적 심사’ 통과가 필요합니다.

 

시성성이 철저한 조사를 거쳐 기적으로 확인하면 통과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종 재가하면 최 신부는 복자가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기적 심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새로운 기적 심사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신자들의 관심과 기도가 더욱 필요한 이유입니다.

 

 

누구를 위한 ‘시복’인가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 바치게 하소서.”

 

2006년 3월 1일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인준한 ‘최양업 사제 시복시성 기도’에는 시복시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복시성은 순교자나 증거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들이 시복시성 대상자들의 삶과 신앙을 배우고 그 덕을 기려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교회의가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승인하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수정한 ‘시복시성 기도문’에도 이러한 문구가 등장합니다.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결과적으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은 한국교회의 영예이자 한국교회사와 우리 신자들의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발길을 따라가는 성지

 

❖ ‘순교자들의 본향’ 청주교구 진천 배티성지 ❖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최양업 신부가 1853년 여름부터 약 3년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전국 다섯 개 도에 흩어진 교우촌을 순방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박물관’도 있어 최양업의 삶과 신앙을 더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현재 교황청에 시복을 청원한 ‘하느님의 종’ 124위 중 8위가 이곳 배티 출신이며, 인근에 27기의 순교자 무덤이 있다.

 

❖ 생쌀을 먹으며 지킨 신앙을 지킨 죽림굴 ❖

대재공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기해박해 당시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곡식을 물에 불려 먹으며 숨어 지냈다고 한다.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약 4개월간 은신하면서 미사를 집전한 곳으로, 1860년 9월 3일 마지막 서한을 쓴 곳이다. 그는 조선 입국 후 순교자들의 행적을 편지를 통해 전했다. 

 

❖ ‘선교의 길목’ 진안리 성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하리 2-1

 

최양업 신부와 강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로 알려져 있다.

 

❖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성지 ❖

생가터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청양 다락골성지는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정착하면서 교우촌으로 변모한 마을이다. 다락골의 초입에 있는 ‘새터’는 최인주의 가족이 정착한 곳이자 최경환, 최양업 부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는 최양업의 생가터와 ‘최양업 신부 기념관’ 등이 조성돼 있다.

 

❖ 수원교구 안양 수리산성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

 

안양 수리산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 교우촌을 일군 곳이자 묻힌 곳이다. 최 신부는 1832년경 가족과 함께 수리산 뒤퉁이로 이주해 생활하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성지에는 최경환 성인의 묘역과 순례자 성당, 최경환 성인 생가 기념 성당 등이 조성돼 있다.

 

[평신도, 2021년 겨울(71호), 성슬기 글라라(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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