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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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63: 13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공방 -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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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3 ㅣ No.819

[성당 이야기] (63) 13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공방(攻防)


웨스트민스터 수도원(Westminster Abbey) 성당 (1)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역사는 960년경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가 이곳에 세워졌다는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그 후 참회왕 에드워드(1042-1066 재위)는 왕위에 오르자 왕실 묘지 성당으로 쓰기 위하여 이곳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웨스트민스터 성 베드로 수도원을 건립합니다. 20여 년 후 성당이 완공되어 봉헌식이 거행되고 일주일이 겨우 지났을 때, 에드워드는 자신이 지은 성당에 묻히는 첫 번째 왕이 됩니다. 그리고 헤럴드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정복왕 윌리엄(1066-1087 재위)이 헤이스팅스에서 그를 물리치고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성당이야기 29회 참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지어지고 200년이 지난 1245년, 영국 왕 헨리 3세(1216-1272 재위)는 영국의 중심이 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의 증축을 명령합니다. 성당 건축은 종교적인 이유 말고도 간혹 정치적인 필요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증축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노르망디에서 건너와 영국에 노르만 왕조를 세운 윌리엄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선출을 위한 기관인 위탄게모트를 건너뛴 채 세습으로 아들 헨리 1세(1100-1135 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이후 헨리 1세는 모국과도 같은 노르망디를 지키기 위해서 딸 마틸드를 앙주의 백작 조프루아와 혼인시켰습니다. 하지만 헨리 1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조카 스티븐이 왕위를 계승하자, 마틸드는 프랑스에서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와서 스티븐과 대치하였습니다.

 

그 사이 노르망디에서는 마틸드의 아들 헨리 2세가 카페 왕조의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아노르와 결혼하여 아키텐을 얻게 됩니다. 앙주 가문의 입장에서는 결혼 동맹으로 노르망디뿐만 아니라 아키텐까지 프랑스 서부 전체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어서 영국의 스티븐이 죽자 마틸드는 아들 헨리 2세(1154-1189 재위)를 영국의 왕으로 앉혔습니다. 헨리 2세는 아버지 조프루아의 별칭을 따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고, 이로써 앙주 가문은 프랑스 서부에 이어 영국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페 왕조의 필리프 2세(1180-1223 재위)가 헨리 2세의 후계자인 리처드와 존을 물리치고 앙주와 노르망디를 손에 넣음으로써, 영국에게는 아키텐만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의적 로빈 후드를 탄생시킨 폭군 존은 영국 귀족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요구 사항인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합니다. 하지만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된, 존의 아들 헨리 3세는 대외적으로 잃었던 노르망디와 앙주를 회복하여 프랑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상징물이 필요했는데, 대성당의 건축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헨리 3세가 처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다 보니 지면이 다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는 이렇게 탄생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고딕 증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2021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의정부주보 7면, 강한수 가롤로 신부(민락동 성당 주임, 건축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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