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49: 최양업은 홍콩에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01 ㅣ No.2093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49) 최양업은 홍콩에서


라틴어 능통했던 최양업,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의 숨은 공로자

 

 

최양업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 행적은 이들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기초 자료가 됐다. 그림은 1925년 7월 5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걸린 복자화.

 

 

조선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에 기여

 

홍콩은 1841년 1월 영국에 점령된 후 청이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함으로써 1842년 남경조약에 따라 영국에 양도됐다. 이때부터 홍콩에는 영국과 미국, 독일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교황청도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축소하기 위해 1841년 4월 22일 지목구를 설정해 홍콩을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에서 분리했다. 이후 비오 9세 교황(재위 1846~1878)은 1847년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홍콩 선교 책임을 맡겼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1847년 초 극동대표부를 홍콩으로 이전했다. 1734년부터 운영해오던 마카오 대표부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극동대표부를 홍콩으로 이전함으로써 ‘선교 보호권’ 문제로 포르투갈과 갈등을 더는 빚지 않게 됐다. 또 중국과 조선, 일본, 유구 지역의 선교 사업을 더 손쉽게 펼칠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오늘날 스탠턴 거리(Staunton street) 6번가이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한 직후 그곳으로 갔다. 둘은 1846년 12월 말 압록강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 병오박해로 입국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페레올 주교가 보낸 편지 꾸러미를 들고 곧바로 요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극동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카오를 거치지 않고 홍콩으로 바로 갔을 것이다. 아마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홍콩 대표부의 첫 손님이었을 것이다.

 

최양업 부제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써보낸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최양업 부제는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73위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행적을 번역했다. 최 부제는 라틴어 번역을 마친 후 ‘Acta Martyrum’(순교자들의 행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1839년과 1846년에 조선 왕국에서 박해가 맹위를 떨쳤을 때, 그리스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행적을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하고 벨리나 명의 주교인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기록한 것을 최 토마스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설명을 붙였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졌고, 르그레즈와 신부는 몇 개의 오자만을 수정한 다음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오늘날 시성성)에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로 접수했다. 예부성성은 이 자료를 검토해 교황에게 보고했고, 비오 9세 교황은 1857년 9월 24일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82위 모두를 ‘가경자’로 선포했다. 최양업 부제는 라틴어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번역함으로써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첫 번째 시복시성 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블뤼 주교 업적 뒤 숨겨진 최양업의 노력

 

최양업 부제는 이 작업을 통해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 최양업 부제는 페레올 주교가 쓴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번역하면서 순교자들의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순교 사실을 증명해줄 목격자나 증인들이 없는 경우도 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간략하게 기록돼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는 것을 파악했다. 최양업은 이것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귀국 후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훗날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귀국한 그는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친척인 최해성(요한)의 순교 행적을 다시 조사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 자료를 보냈다. 또 1856년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다블뤼 신부가 정식으로 순교자 행적 조사와 역사 편찬에 착수하게 되자, 최양업 신부는 다음 해에 주교품을 받은 다블뤼 주교를 방문하고, 오랫동안 자신이 수집해 온 상당히 많은 순교 자료들을 모두 전달하였다.

 

“지난해에 제가 우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내서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그것을 존경하는 다블뤼 주교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께서 모든 순교자의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고 계십니다. 다블뤼 주교님께서 그 사적들을 신부님도 읽어보시도록 보내드릴 것이 확실하므로 제가 따로 신부님께 보고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여겨집니다.”(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4일 충청도 불무골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다블뤼 주교는 1858~1859년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1860년에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완성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다. 이들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행적 내용의 상당 부분이 최양업 신부가 수집, 조사, 보완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안팎에서 많은 이가 다블뤼 주교의 이 업적을 칭송하고 있지만 실상 최양업 신부의 숨은 노력에 대해, 헌신적인 수고에 관해, 모든 공을 주교에게 돌린 희생의 처신을 잘 알지 못한다.

 

 

뛰어난 어학 실력

 

최양업 부제의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눈여겨볼 것이 또 하나 있다. 그의 어학 실력이다. 최양업은 모방ㆍ칼르리ㆍ데플레슈ㆍ르그레즈와 등 여러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이 말은 안정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임지로 떠나기 전 그때그때 손이 비는 신부에게서 라틴말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양업의 라틴어 실력은 뛰어났다. 신학생 시절 그는 156개 단어로 한 문장을 작문했다. 그 문장에는 15개의 쉼표와 6개의 세미콜론, 2개의 콜론, 1개의 물음표로 24개 동사가 연결돼 있었고, 능동형, 수동형, 직설법, 접속법, 현재, 반과거, 전과거, 대과거 등 모든 시제와 목적문, 시간문, 결과문, 간접 의문문, 관계문, 부정문, 분사문, 동명사문 등으로 꾸며졌다. 이처럼 빼어난 라틴어 실력 때문인지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부제를 꼭 집어 자신이 프랑스어로 쓴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할 것을 지시했다.

 

최양업 부제는 라틴어만큼이나 프랑스어 실력도 대단했다. 프랑스어로 된 순교자 행적을 라틴어로 옮긴 것이 그 증거이다. 최양업은 리브와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라틴어와 프랑스어, 한문을 아우르는 그의 어학 실력은 훗날 한글 주요 기도문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본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을 편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최방제 신학생 무덤은 어디에?

 

한편, ‘신 김대건ㆍ최양업 전’ 13회(1622호, 2021년 7월 18일 자) 내용 중 최방제의 무덤에 관한 중요한 제보가 와서 관련 내용을 보충한다. 제보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공성식(마태오) 신부로 마카오에 처음으로 파견돼 2006년부터 13년간 선교 활동을 한 사제이다. 공 신부 역시 최방제 신학생의 무덤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수소문했다고 한다. 많은 자료를 찾았으나 그와 관련한 기록이 없어 아쉬워하다 마카오 교회사의 권위자인 마카오교구 요셉신학교 학장 라우짓 맹 신부에게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무덤에 관해 물었다고 한다.

 

맹 신부는 최방제 신학생이 선종한 1837년 당시 교회 묘지는 ‘바오로 묘원’였는데 이미 그 전 해인 1836년 포화 상태가 되어 이후부터는 바오로 묘원과 현 ‘미카엘 묘원’ 부근에 무차별적으로 시신을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맹 신부는 최방제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큰 곳은 지금의 ‘미카엘 천주교 묘원’이라고 지목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묘지 문제로 주민들의 민원이 거세서 마카오 정부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카오 정부는 기금을 마련해 1857년 현 위치에 미카엘 묘지를 조성하고, 주변에 산개해 있던 묘지들을 이장했다고 한다. 이후 주변의 모든 묘지가 위생적으로 묘원에 안장됐고, 1878년 바오로 묘원에 있던 마지막 유해가 미카엘 묘원으로 이장돼 모든 이장 작업도 완료됐다고 한다.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없는 묘지들은 정리해 유골을 한곳에 공동 매장하는 방식을 취해오고 있다.

 

이에 공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자리와 현 미카엘 묘지를 포함해 이전에 산개해 있던 묘지들의 자리가 걸어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서 “이곳이 최방제 신학생의 무덤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으나, 당시의 시대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기초로 할 때 가장 신빙성이 높은 곳은 현 미카엘 묘지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공 신부는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마카오에 있을 때 직접 관광 안내자들을 교육했고, 교우들의 순례도 추천했다고 알려왔다.

 

최방제 신부의 무덤은 공 신부의 제보를 토대로 좀더 심도 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할 듯 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29일, 리길재 기자]



1,0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