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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3: 배티와 최양업 신부 - 5개도를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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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16 ㅣ No.1957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3) 배티와 최양업 신부 - 5개도를 돌다


배티 소신학교 운영하고 한글본 천주가사·교리서 펴내

 

 

지난 2011년 배티성지에 조성된 최양업 신부의 성당 겸 사제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교도 겸했던 이 건물은 초가집 형태의 방 두 칸, 부엌 한 칸짜리 집으로,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돼 있다.

 

 

‘길 위의 목자’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려는”(1847년 4월 20일 자 4번째 서한) 희망으로 최양업 신부는 걷고 또 걸었다. 박해를 피해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1851년 10월 15일 자 8번째 서한) 교우촌을 찾아들었고 또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염원하며 걷는 그 길은 “그리스도의 용사들”, 곧 순교자들과 함께 걷는 길이기도 했다.

 

 

전국 교우촌 돌며 사목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은 선교사 입국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체로 5개도였다. 충청도와 경상좌ㆍ우도, 전라좌ㆍ우도였다.(1851년 10월 15일 자 8번째 서한)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첫해인 1850년 말까지 8개월간 순방한 교우촌은 127곳이나 됐다. 1850년대 말 전국 교우촌이 185곳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체 교우촌의 3분의 2를 최 신부 홀로 사목했던 셈이다. 1852년 8월 매스트르 신부 입국으로 사목 방문지는 줄었지만, 1853년 2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선종으로 다시 넓은 지역을 맡아야 했다.

 

때론 경기도 일부와 강원도까지 담당했다. 1857년 3월에는 페롱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강원도와 경상 북부를, 이에 앞서 1856년 3월에 입국한 프티니콜라 신부가 경기ㆍ충청ㆍ강원ㆍ경상도 일부를 사목했고, 1859년 보좌주교인 다블뤼 주교가 내포 일부를 맡게 되면서 최 신부는 경상도 중ㆍ남부에서 사목했다.

 

최 신부는 영혼 구원에 목마른 신자들을 위해 전국의 교우촌을 자신의 안마당처럼 드나들며 그들 곁으로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려 했다. “아주 고약한 서양놈”이라거나 “프랑스놈” 혹은 “큰 도둑놈”, “선동꾼” 같은 근거 없는 비난을 받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모진 박해 속에서 가산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에 숨어들어와 초라한 움막을 짓고 살면서도 신앙의 기쁨만 찾는 신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리스도의 양 무리에 들어오는’ 새 입교자들은 언제나 그의 희망이요 기쁨의 원천이었다. 해서 그는 선교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복음적 가난의 삶 속에서 겸손과 인내의 덕을 실천했다. 선교활동 내내 그가 바랐던 것은 오직 ‘신앙의 자유’뿐이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저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낙비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저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1851년 10월 15일 자 8번째 서한)

 

최양업 신부 성당 겸 사제관 마당 오른쪽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가운데)와 최경환 성인(왼쪽), 이성례 복자의 흉상.

 

 

소신학교에서 신학생 양성

 

“최 신부는 얼굴이 항상 그을려 있었고, 갓끈을 맸던 자리는 완연히 표가 났다”는 교회의 전승은 최 신부의 선교 열정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최 신부의 교우촌 방문 일정은 대체로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다만 1850년 7월, 장마철 한 달간 ‘진천 동골’에 머물렀다. 이를테면 동골 교우촌이 그의 첫 사목 거점이었던 셈이다. 최 신부의 동생 최우정(바실리오)의 「최 바실리오의 이력서」 등에 따르면,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그의 거처로 진천 동골을 정하자 이곳을 사목 거점 겸 여름 휴식처로 삼고 사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 신부가 다시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돌아오게 되는 건 1853년의 일이다. 최 신부는 그해 여름 배티에 있던 소신학교 지도신부로 임명돼 활동하게 됐다. 배티에는 1850년 다블뤼 신부가 설립 운영해온 조선대목구 신학교(소신학교)가 있었고, 1853년 다블뤼 신부가 소신학교를 떠남에 따라 최 신부가 소신학교를 이어받는다. 이때부터 자신의 거처를 경상도로 이전하는 1856년까지 배티는 최 신부의 사목 거점이 됐다.

 

현재 이 배티성지에는 2011년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초가집 형태로 복원된 성당 겸 사제관이 세워져 있다.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150호다. 이 성당 겸 사제관은 소신학교를 겸했고, 이곳에서 최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신학, 근대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이 신학교는 이전의 예비 신학교와 달리 조선대목구장에 의해 공식 설립된 첫 조선대목구 소신학교였다. 페레올 주교는 그래서 1850년 11월 5일 자로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에게는 ‘작고 허술하지만’ 신학교가 있다”고 강조한다.

 

최 신부는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4년 11월 4일 자 10번째 서한에서 이 소신학교 신학생들의 안부를 묻는다.

 

“봄에 (배티의) 세 신학생을 강남의 거룻배에 태워 상해로 보냈는데, 그들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건강하게 잘들 있는지요?…”

 

서한에 나오는 세 신학생이 바로 이 바울리노와 김 요한 사도, 임 빈첸시오 등으로, 이들은 1854년 3월 페낭으로 떠났다.

 

이들 셋이 배티를 떠나면서 배티 소신학교의 역할은 사실상 소멸한다. 다블뤼 신부의 사제 양성은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이즈음에는 매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설립한 대신학교인 ‘배론신학교’가 운영됐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표지에는 ‘산양가’라고 돼있으나 이는 필사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것이다.

 

 

교리 토착화에 힘써

 

이뿐만이 아니라 배티는 최 신부가 교리를 토착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역할을 했다. 전통 가사체의 3ㆍ4조 또는 4ㆍ4조 운율과 함께 민요나 독경의 음영(吟詠)에 바탕을 둔 한글본 천주가사를 짓거나 정리해 보급하는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최 신부는 우리말 한글의 편이성과 유용성을 이해하고 사랑한 목자였고, 교리를 토착화하는 데 앞장선 선구자적 사제였다. 훗날 1859년 최 신부는 글을 알지 못하는 아녀자와 서민층 신자들을 위한 기도서와 교리서를 편찬하기도 하는데, 그 책은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우리말로 옮긴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이고, 같은 해 한문본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해 이듬해 완성해 펴내기도 했다. 해서 교회 일각에서는 최 신부를 “한국 천주교회의 첫 교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명예소장은 “한국 개신교회에선 1883년, 고종 20년에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되었던 중등학교 원산학사를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라고 주장하는데, 배티에서 시작돼 배론으로 이어지는 조선대목구 신학교는 1850년에 설립됐는데도 그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배티순교성지 담임 이성재 신부도 “최양업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 목자들의 표본이고 보화와도 같은 분”이라며 “학문적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분이 예수님의 성사로서 한국 교회에 보여준 사랑이었다”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14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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