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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22: 1857년 9월 14일 불무골에서 보낸 열세 번째 서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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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07 ㅣ No.2094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2) 1857년 9월 14일 불무골에서 보낸 열세 번째 서한 ①


여성 신자들의 신앙 열정 구체적으로 드러나

 

 

- 조선시대 여성 신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잘 드러낸 탁희성 화백의 작품. 그림은 허계임 성인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질 당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1856년 소리웃에 머물렀던 최양업은 그해 9월 열두 번째 서한을 작성하며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곧 700리 떨어진 새 교우촌으로 출발한다”고 전한다. ‘귀양 간 어떤 신자가 복음의 씨를 뿌려 일군 교우촌’이 있다는 이곳에서 최양업은 “혹시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다음 기회에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열두 번째 서한을 보낸 지 1년 뒤, 불무골에 머물렀던 최양업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교우촌을 일구고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편지에 담았다. 특히 이 서한에는 여성 신자들의 깊은 신심과 신앙에 대한 열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부잣집의 종이었던 여성부터 마을 유지의 부인, 양반집 안주인까지, 당시 신자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천주교의 진리를 따르고 실천했다.

 

조선시대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 자신을 숨기며 남자들의 뜻에 따라 살아야 했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을 드러냈던 순간은 바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룩한 원의와 열정을 드러낸 당시 신자들의 모습을 열세 번째 서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여인의 깊은 신심, 교우촌의 초석 놓다

 

열두 번째 서한에서 최양업이 언급한 ‘새 교우촌’이 어디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양업은 “이 교우촌은 귀양 간 여인과 어떤 신자 가족이 신앙의 씨를 뿌린 곳”이라고 설명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고을로 내려온 한 여인. 부잣집에 종으로 들어간 여인은 그 집 안주인에게 전교했고 두 사람은 열심히 신앙을 실천했다. 하지만 얼마 뒤 남편에게 발각돼 부잣집 여인은 관가로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는 남편의 노력에도 이 여인은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배교하지 않겠다”고 거듭 말한다. 결국 아내의 굳센 용기에 굴복해 집으로 데려오게 됐고, 이 사건으로 읍내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부잣집 종이었던 여인의 친척들은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떠나 이 읍내로 거처를 옮겼다. 최양업은 “여인의 친척들은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더 깊이 배우기 위해서 교리에 밝은 신자들을 만나고자 간절히 원했는데 그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을 이제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두 가정은 혼연일치가 돼 신앙을 실천하고 읍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했다”고 전한다. 한 여인의 용기는 하느님을 따르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전했고, 교우촌을 일구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박해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재현한 순교자 동상. 해미성지 순교자들의 생매장터였던 진둠벙에 설치돼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공소가 된 여인의 집, 핍박 속에 무너지다

 

이 교우촌에 신자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신심은 더없이 깊었다. 최양업이 ‘그리스도의 용감한 투사’라 소개한 적 있는 마을 유지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서한에서 소개한다.

 

최양업은 “그 여인은 남편에게 엄포와 공갈과 매질과 핍박 등 온갖 괴로움을 당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굳세게 저항해 신앙을 보존했다”며 “그 여인은 언제쯤이나 내 눈으로 하느님의 사제를 뵈올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나는 사제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 귀로 들을 수 있게 될까! 이러한 은혜가 내게 내려지는 날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으련마는’하고 매일 탄식으로 지새웠다”고 밝힌다.

 

작은 교우촌에서 신자들이 기도할 수 있는 장소는 여인의 집이었다. 공소집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사 집전에 참여한 신자들은 감격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최양업은 전한다.

 

공소집에서 경험한 기쁨을 친구에게 전한 한 노파. 하지만 노파의 친구는 공소집에 다니는 여교우들의 남편들에게 비밀을 폭로했다. 흥분해 공소집에 들이닥친 남성들은 살림살이를 파괴하고 그 집 식구들을 읍내에서 쫓아낸다. 최양업은 가엾은 신자들의 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앞으로 이곳의 신자들이 어떻게 선교사를 모시고 다시 공소를 꾸밀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 식구가 다 신자인 집은 이 집뿐이고, 읍내에서 쫓겨난 그 집 외에는 신자들의 집회 장소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주께서 저 불쌍한 여인들을 인자하신 눈으로 굽어보시고 그들의 착한 뜻을 굽어보소서.”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5일, 민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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