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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커피48: 수염이 갖는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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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25 ㅣ No.653

[사유하는 커피] (48) 수염이 갖는 상징


아브라함과 모세의 수염

 

 

미켈란젤로가 그린 창세기의 노아, 카라바조의 아브라함, 그리고 렘브란트 특유의 거친 붓 터치에서 드러난 모세.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예외 없이 흰 수염을 수북하게 기르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최근 SNS로 대중활동을 재개한 아흔세 살 노암 촘스키 박사의 외모가 성경 속 인물들을 닮아가는 듯 눈길을 끈다.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the most important intellectual alive)’으로 불리는 그가 수염을 풍성하게 길러 예전과는 좀 인상이 달라졌다. 포근해 보이는 수염이 연륜과 지혜, 권위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수염은 생존과는 그다지 연관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진화의 결과라고 보기가 힘들다. 진화론 창시자인 다윈에게도 수염은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턱수염의 진화를 생존이 아닌 기호의 문제로 풀려고 했다가 눈총을 사기도 했다. 다윈은 턱수염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남성에게는 장식물의 일종이 됐다는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털은 수컷 경쟁자에게 겁을 주고 우위를 확보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는 입장에 밀리고 말았다. 수염이 무성하면 입과 얼굴이 더 커 보여서 더 위협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이 상대적으로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고대 수메르와 이집트 시대에 귀족들은 턱수염을 기른 반면 성직자들은 매끈하게 면도를 했다. 당시 분위기를 내는 영화들을 보면 주술사들은 대체로 수염이 없고 삭발한 모습이다. 권력자들은 힘의 상징으로서 수염을 기르고자 했지만, 성직자나 주술사는 신을 만나기 위해선 거만한 느낌을 주는 털은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에 보면 다윗 시대에 남성의 수염을 강제로 잘라내는 것은 망신을 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일각에서는 삼손과 다윗의 사절단이 머리카락이 잘리고 수염을 깎인 상황을 거세당한 것으로 풀이하려고도 한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인공 수염을 붙여서라도 장엄한 기품을 연출하려고 애썼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수염이 형성되는 모습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수염의 모양이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지표쯤으로 간주된 것이다. 길이가 50㎝를 넘는 관우의 수염은 대장부의 능력을 상징했으며, 장비의 거칠고 볼품없는 수염은 진중하지 못한 성격을 암시하는 오브제였다. 턱수염의 숱이 적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던 유비는 결국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단지 수염의 기능에만 집중하는 견해도 있다. 수염은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꽃가루나 먼지 등을 여과해 천식을 막아주는 면에서 유용한 것이지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수염을 뺀 모세의 모습은 왠지 허전하고 어색하기까지 하다. 수염에는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수염은 당사자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달했음을 드러내는 자연현상일 수 있다. 모든 것을 과학이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 너머의 무엇인가가 더 진실에 가깝다.

 

커피도 100년 된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를 더 귀하게 대한다. 크로마토그래피로 성분 분석을 해보면 관능적으로는 젊은 나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늙은 나무라고 해서 성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더 대우하는 것은 다른 나무들은 근접할 수 없는 지하 100m 깊이의 미네랄과 에너지를 끌어 올려 인류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수염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곧 완성에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25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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