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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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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657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상)


평양교구 선교 위한 수도자 양성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창립자 목이세 몬시뇰.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제공1923년 11월,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모리스(John Edward Morris) 신부는 당시 전교회의 선교지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한국 이름을 목이세(睦怡世)로 지었다. 이듬해 1924년 8월 평안남도 영유본당에 제4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목이세 신부는 얼마 되지 않은 11월 11~28일 영유공소를 방문하고 남긴 기록 ‘주님을 위하여 고생을 낙으로’에서 자신이 “이 도보 선교를 통해 제2의 그리스도가 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한국 선교에 쏟은 그의 열정과 사랑은 제2의 그리스도적 삶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그는 한국 여성들 안에 내재한 선교사의 자질과 지도력을 직관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1926년 자신이 관할하는 영유에 수도 생활에 뜻이 있는 젊은 여성 공동체를 만들었다.

 

당시 평안남도 영유 사정은 열악했다. “진흙 성당, 통풍장치·전기·온방 시설 전무, 학교 없음, 사제관은 진흙치고 최고 상태의 집, 최대한 2인용”이라고 쓴 기록을 보더라도 그렇다.

 

열심한 신자들이 무급으로 전교를 하던 그때, 목 신부는 유급 선교사를 채용해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투신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4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새 벽돌 성당을 완공했고,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어학 학교도 지었다. 또 떠돌이, 고아, 장애인 등 갈 곳 없고 불우한 사람들이 있을 장소를 마련했다.

 

1930년 목 신부는 몬시뇰로 명명되며 제2대 평양지목구장에 임명됐다. 당시 평양지역에서는 미국계 개신교와 천주교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목 몬시뇰은 개신교와의 교류에 비중을 두면서 개신교 방문을 통해 그들의 선교 현황과 선교 방법, 또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익혔다. 그런 노력 속에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많이 개종하는 결과를 낳았고 천주교 신자 수는 점점 늘어났다.

 

평양교구 선교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목 몬시뇰은 선교를 지속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더 나은 결실을 얻기 위해 업무에 전념할 능력 있는 여성 수도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당시 평양지목구에 파견된 메리놀 수녀회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는 별개로, 평양교구장 직속으로 그의 직접적 지시를 받으며 경험 있는 지도 편달을 따르는 방인 여자 수도회 창립을 원했다.

 

이에 따라 길의 인도자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그 축일인 1932년 6월 27일, 평양시 상수구리 257번지 기와집 두 채를 매입해 개조한 수녀원에서 5명의 입회자와 함께 첫 미사가 봉헌됐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시작이었다. [가톨릭신문, 2020년 10월 11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중)


‘기도 · 공동체 · 선교’ 정신으로 설립

 

 

- 1950년 평양 서포 분원에 모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제공.

 

 

수도회가 시작 발걸음을 뗀 후 수도자 양성은 메리놀 수녀회 수녀 3명에게 일임됐다. 설립자 목이세 몬시뇰은 교구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정한 날, 혹은 불시에 지원자들 교리 지식을 시험했다. 설립 초기부터 지원자들은 수도자들을 따라 인근 본당에서 교리를 가르치거나 성가대 활동을 했기에 이는 전교 수녀 자질을 갖추는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회자 5명으로 시작한 수도회는 20여 명으로 지원자가 늘어났다. 이에 1935년 3월 일본 성심여자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한국계 메리놀 수녀회 회원 장정온 수녀가 수련자 보조로 파견돼 지원자 교육을 도왔다.

 

당시 평양교구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 활동은 활발했다. 목이세 몬시뇰은 평신도 교육과 성경 공부에 주력했고 문화 부분에도 관심을 쏟으며 다방면에 걸쳐 가톨릭 운동을 전개했다. 평양교구는 한국 치명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 역시 특별해서 1935년 10월 천주교 조선 전래 1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목이세 몬시뇰은 1936년 표면상 건강상 이유로 평양지목구장을 사임한 후 수도회 설립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선교 사업 열매를 보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그가 교황청에 수도회 설립을 위한 첫 청원서 제출 후 필요한 교회법적 절차의 모든 업무가 윌리엄 부스(William. R. Booth) 지목구장 서리에 의해 마무리됐고, 마침내 1938년 2월 25일 자로 인준을 받았다.

 

청원서에 제출된 공통된 설립 목적은 회원 자신이 성화하기 위해서다. 특수한 목적은 전교 사업으로써, 교회를 건설하는데 도와주기 위함이다. 초·중등학교, 시약소, 예비자교리, 소녀와 남편과 사별한 이들을 위한 직업학교, 가난한 사람, 병자,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시설 운영이 수도자들 업무로 돼 있다.

 

수도회 설립 정신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해 하느님께 ‘마음을 드높이’(콜로 3,1-3)는 기도 정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마음 한뜻’(사도 4,32)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체 정신, ‘모든 이에게 모든 것’(2코린 9,22)이 되는 정도까지 자아를 잊어버리는 선교 정신이다.

 

회원들은 이 정신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고, 수도 생활 얼이며 완덕의 원리인 성경을 바탕으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성 아우구스티노 규칙 정신과 회헌을 따른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카리스마는 ‘말씀의 육화 신비에 동참하는 복음 선포’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 영성으로 구현된다. 회원들은 구원 협력자이신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삼고, 성경에 표현된 성모 마리아 영성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성모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영원한 도움을 베푸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10월 18일, 이주연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하)


설립정신 실천하며 선교 지평 확장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회원들이 남북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성체 현시 시간을 갖고 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제공.

 

 

설립자 부재중에도 새 수도회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1940년 6월 27일 마침내 11명 수녀가 첫 서원을 하고 본당과 학교에 파견됐다. 이후 서원한 수녀들은 설립 목적대로 각 본당에 파견돼 소속 유치원, 양로원, 병원 등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성장은 순탄치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일본은 미국계 선교사들을 1942년 본국으로 추방했다. 평양에서는 이미 1941년 12월부터 선교사들이 자택연금 혹은 집단으로 감금된 상황이었다.

 

제4대 평양교구장 윌리엄 오세아(William O’Shea) 주교는 교구청 연금 상태에서 메리놀 수녀회 소속 장정온 수녀를 수도회 원장으로 임명했다. 한국인이어서 일본 정부의 추방 정책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 수녀의 임무는 지도자를 잃어 해산될지도 모르는 수도회 기초를 다져 수도자들이 자립하는 것이었다. 해방이 됐지만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러나 회원들은 장 수녀를 중심으로 수도 생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수녀들의 영적 생활을 위한 교육과 라틴어, 성경, 성 아우구스티노 규칙 등을 교육했고 1947년부터는 전교 활동에 도움이 되고 파견 회원들이 본원과 소통할 수 있는 수도회 회지를 월 2회 발간했다. 이때 발행된 회지 「Sursum Corda」는 1971년 10월 「영원한 도움」으로 개칭돼 현재까지 월 1회 발간되고 있다.

 

수도원 건물과 재산이 몰수되고 수녀들도 해산되는 등 공산당 치하에서 어려움을 겪던 수도회는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10월 장정온 수녀와 본가에 갔던 서 요셉 수녀가 피랍되는 시련을 맞았다.

 

유엔군의 갑작스런 후퇴로 남하한 수도자들은 부산에서 전쟁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돌보는 등 어려운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수련소 운영을 재개했고 1955년 서울 흑석동으로 본원을 이전했다. 1966년 11월 본원이 현재 위치인 서울 정릉에 자리 잡게 되면서 국내외 본당, 의료, 사회복지, 교육 사도직 활동 등을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가톨릭 성서 모임’을 시작해 청년들을 비롯한 성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공부하는 길을 열었다.

 

1969년 ‘재단법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이름으로 법인 인가를 받아 재정적 자립을 이룩한 수도회는 한국교회 확장과 더불어 성장을 가속했고 설립자 연구와 함께 1980년 후반부터 수도회 카리스마와 영성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1년 12월 8일 자로 교구 소속 수도회에서 교황청 소속 수도회로 전환했다.

 

이로써 수도회는 보편 교회와 연대하며 본당 사도직, 북한과 북방 선교 준비를 위한 평화 사도직, 사회복지, 성서사도직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설립의 참뜻을 널리 펼치며’ 선교 지평을 넓히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0년 11월 1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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