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50: 프랑스 군함 타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08 ㅣ No.2095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0) 프랑스 군함 타고


프랑스 군함에 통역사로 승선한 최양업은 고군산도까지 갔지만…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프랑스 함선 글로와르호를 타고 조선 고군산진 신치도에 상륙했다. 그림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승선했던 글로와르호. 출처=위키피디아.

 

 

조선으로의 출항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에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라틴어 번역 작업을 마친 후 조선으로 출항할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곧 1846년 8월 세실 제독은 프랑스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 앞 외연도로 가서 조선 정승 앞으로 한문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세실 제독의 편지에는 1839년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살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다음 해에 회신을 받으러 오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이 회신을 받기 위해 조선으로 가는 프랑스 군함에 승선해 조선에 입국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다행히 성공해 지극히 가난한 우리 선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최양업 부제가 1847년 4월 20일 홍콩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었다. 1847년 7월이 되어서야 프랑스 함선 2척이 중국 광동성 광주 호문에서 조선으로 곧 떠날 예정이라는 소식이 홍콩 대표부에 전해졌다. 주강 남단에 위치한 호문은 홍콩에서 가까워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프랑스 함선의 출항 일정에 맞춰 출발했다. 조선으로 떠날 프랑스 군함은 라 피에르 해군 대령이 지휘하는 글로와르(la Gloire)호와 리고 드 즈누이 소령이 함장으로 있는 빅토리외즈(la Victorieuse)호였다. 글로와르호는 장교 21명, 수병 406명을, 빅토리외즈호는 장교 8명, 수병 125명을 태우고 1847년 7월 30일 조선을 향해 출항했다. 장교 29명, 수병 531명이 함포와 개인 화기로 무장한 대규모 조선 원정대였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글로와르호에 승선했다. 최 부제는 조선인과의 통역사 역할을 하기로 했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글로와르호는 1837년에 건조한 대포 52문의 프리깃함으로 취역 직후 멕시코 베라크루스 전투에 참전했으며 1843년 퇴역했다. 이후 중국해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라 피에르 대령이 함장으로 임명돼 1847년 재취역을 했다. 글로리아호와 빅토리외즈호는 중국ㆍ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세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감옥에 억류된 프랑스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1847년 4월 15일 베트남 다낭을 포격했다. 이후 같은 이유로 조선 원정을 위해 마카오를 거쳐 중국 광주 호문에 온 것이다. 글로와르호는 라 피에르 대령이 세실 제독에게 “이번 원정을 다녀온 후 상판과 내부 시설 대부분을 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상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할 만큼 낡은 함선이었다.

 

글로와르호의 호위함인 빅토리외즈호의 수병들은 조국을 떠나 서태평양 곧 남ㆍ동중국해에서 오랜 기간 파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병 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상당했으나 상당수가 제대를 앞두고 있거나 또 복무 기간을 넘겨 함상 군기는 엉망인 상태였다. 광주 호문에 정박한 지 얼마 안 돼 3명의 수병이 밤에 선상 탈영을 시도했다. 그 중 브롱트 프랑수아라는 수병은 헤엄쳐 육지로 도망가던 중 익사했다. 나머지 둘은 다음 날 체포됐다.

 

 

좌초된 함대

 

나름 정예 함대이지만 낡은 전함에 군기가 빠진 수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북동 계절풍이 불기 전인 8월 말 마카오 귀항을 계획하고 조선을 향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프랑스 함대는 대만을 거쳐 8월 9일 오전 제주도 해상을 지나 오후에 소흑산도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일 고군산도 인근에서 좌초했다.

 

“우리는 남동풍을 타고 군도 안으로 들어섰는데 수 마일 내에서만 섬이 보일 정도로 흐리고 안개 낀 날씨였다. 함선 모두 수심을 측량했고, 빅토리외즈호는 10마일 앞에서 수심을 신호로 보내왔다. 지도상에는 섬들이 북북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남남동쪽으로 내리뻗어 있었다. …우리가 앞에 있는 작은 섬들과 직각을 이루고 있을 때 바람이 거세져 모함(글로와르호)의 돛 2개가 찢어졌다. 예비 돛을 다는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개펄에 좌초됐다. 북동쪽으로 약 3마일 떨어져 있던 빅토리외즈호도 거의 동시에 좌초됐다. 바람도 거세고, 해류도 빠르며. 파고도 높아 닻 한 길이만큼이라도 나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보트가 견인해 함선을 개펄에서 끌어내려 시도했으나 두 차례 모두 굵은 밧줄이 끊어져 헛수고가 됐다. 세 번째 시도하려 했으나 밤이 돼 작업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수병 2명이 익사했다.…썰물 때가 되자 함선들은 완전히 펄 위에 있었다. 배 안에는 물이 너무 차서 전복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12일 아침 병사들에게 하선 명령을 내렸다.”(라 피에르 소령이 1847년 8월 19일 쓴 보고서 중에서)

 

1847년 8월 12일 아침에 시작한 하선 작업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수병들의 숙영지는 ‘북쪽 또는 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이었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좌초 과정에서 수병 2명이 익사했지만,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비롯한 나머지 560명이 무사했다. 이들은 좌초한 배의 돛과 돛대로 천막을 짓고 숙영했다.

 

조선 수병들이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무관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 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숙영지를 주시했다.

 

전라 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뒤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 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닿았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 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에 띄운 서신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 제독이 조선 조정에 보낸 편지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 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숙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 현령, 부안 겸 고부 군수, 위도 첨사, 여산 부사, 익산 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6월 5일, 리길재 기자]



1,03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