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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선 팔도를 땀으로 축성한 사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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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01 ㅣ No.1959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조선 팔도를 땀으로 축성한 사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1)

 

 

조선인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는 사목자의 생활과 성덕의 전형으로 추앙받으며 꾸준한 열성과 거룩한 땀을 통해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친 백색 순교자로 오늘날까지 신자들의 가슴 속에 이어져 오고 있다.

 

 

1. 생애 : 출생의 배경과 하느님의 부르심

 

최양업은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1984년 시성)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 2014년 시복) 사이에서 1821년 3월 1일, 6형제의 장남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정구(鼎九)이며, 세례명은 토마스다.

 

그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아우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아들 최인주(崔仁柱)를 낳았다. 신심이 뛰어나고 순박했던 최인주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많은 고초를 겪고 석방된 후, 모친과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하여 3대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최인주의 아들로 태어난 최경환은 강인한 성품을 타고 났으며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로 성장했다. 이후, 가족들이 신앙적으로 냉담하게 되자 그는 고향과 친척과 재산을 버리고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에 거처했다가 다시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다. 그리고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3동)에 정착하면서 교우촌(敎友村)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다. 또한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모친 이성례도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시 포도청에 갇혔다가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이후 형조 감옥에 갇혔을 때는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 1839년 12월 27일 용감하게 순교하였다.

 

교우촌에서 열심한 부모와 함께 성장한 최양업은 경기도 부평에 살 당시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과 1835년 11월 25일(음)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동료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37)와 함께 1836년 12월 3일(음 10월 25일)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2021년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조선 팔도를 땀으로 축성한 사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2)

 

 

2. 사제 수품과 사목활동 그리고 선종

 

최양업은 동료 김대건과 최방제와 6개월이라는 긴 여정 속에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대표 르그레즈와(Legrégeois) 신부, 부대표 리브와(Libois) 신부, 교장 칼레리(Callery) 신부,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사천(四川) 선교사인 데플레슈(Desflèches) 신부 등의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Lolomboy)에서 신학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여러 과정을 거치다가 조선 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 주교가 있던 길림성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그는 부제품을 받은 후 5년 뒤 상해에서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약속했던 백령도(白翎島)까지 갔으나 마중 나온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상해로 되돌아갔다. 1849년 5월 만주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만주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 밑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당시 그가 활동하던 지역은 요동의 전교중심지인 양관(陽關, 현 개주시 羅家店)과 차쿠(岔溝, 현 장하시 蓉花山)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따라서 그는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보낸 조선교회의 밀사를 봉황성 책문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3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에 성공하였다. 1836년 신학생으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1842년 마카오를 떠난 지 7년 6개월, 모두 여섯 차례의 시도 끝에,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난 뒤 한덕골(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교우촌에 가서 중백부 영겸(榮謙)과 동생 신정(델레신포로)을 만났으며,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동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을 거점으로 삼고 사목활동을 하였다. 입국 이후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해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걸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였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은 장마와 무더위, 농사일 때문에 순회할 수 없는 7-8월 한두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는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고,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했으며, 날이 새기 전에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등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박해가 수그러진 듯하여지자 그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로 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가 누적되었던 최양업 신부는 상경 도중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상도 문경 땅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하였다. 선종 후 그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11월 초 신학교 푸르티에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2021년 4월 11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참조

조규식, 「최양업 신부의 영성」, 『교회사연구』 14,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9.

여진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2006.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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