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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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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7 ㅣ No.1943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

 

 

기원전 7세기, 그리스 메가라의 왕자 뷔자스(혹은 뷔잔타스)가 새로운 도시를 세울 장소를 찾기 위해 당시 가장 영험한 신탁을 내려주던 델포이 신전을 찾았다. 델포이에서 내려진 신탁은 ‘눈먼 자들 도시의 반대쪽’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탁을 가지고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그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보스포로스와 마르마라 바다를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역을 발견하는데, 그 반대편에는 이미 칼체돈이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천혜의 지형을 이용하지 못한 칼체돈이라는 도시가 바로 신탁에서 말한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결론짓고 그 반대편 보스포로스 남쪽 해안의 끝자락에 자신의 이름을 딴 ‘뷔잔티온’이라는 도시를 세운다. 흑해의 유일한 입구였던 이 도시는 무역의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칼체돈까지 정복하게 되었다. 이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다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면서 후일 여타 그리스 도시처럼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한때 로마에 반기를 들어 황폐화되었으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밀라노 관용령을 내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로마’로서 도시를 재건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동로마제국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한다. 6세기에는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별처럼 빛나는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을 기념하기 위해 거룩한 소피아 성당을 세운다.

 

소피아 성당의 건설과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의 반대편에서는 흉노족 일부가 유연으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튀르크’(힘센, 방패라는 뜻)족이라 칭했고, 중국과 고구려의 역사에서는 그들을 돌궐이라 칭했다. 몽골 초원을 누비던 그들도 동튀르크와 서튀르크로 분열되었고 모두 당나라에게 멸망하게 된다.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튀르크 부족은 독립투쟁을 통해 다시 나라를 재건하게 되고 당시 비잔틴제국과 당나라 사이에서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던 아바스 왕조와 연합하여 당나라를 견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튀르크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되고 후일 자연스럽게 아바스 왕조의 서쪽 평원지대인 오늘날의 터키 땅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셀주크 튀르크이다. 셀주크 튀르크는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1453년에는 1000년을 지속했던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어로 ‘도시를 향해’(어떤 장소를 탐내는 구호처럼 쓰이던 말)라는 뜻을 지닌 이스탄불을 건립한다. 그 이스탄불이 바로 지금의 이스탄불이다.

 

 

 

이처럼 이스탄불의 역사는 세계사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오스만이라는 제국과 연관되어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그 맥을 견고하게 마주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로마를 중심에 둔 그리스도교의 문화에 대응하여 조금 다른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태어나 자라난 장소이며, 하나였던 그리스도교가 가톨릭과 정교회로 갈라진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교회가 가진 최상의 권위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서 나온다는 수위권의 문제와 ‘filioque논쟁’이라 불리는 복잡한 신학적 문제를 비롯해 몇 가지 관점에서 두 교회의 해석은 차이가 있지만, 성사와 교리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두 교회의 다른 점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이 길고 거대한 역사를 전부 알기엔 순례 여정이 길지 않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을 따라 순례를 준비한 순례자들은 복잡한 역사 지식을 뒤로하고 먼저 이스탄불의 중심지 술탄 아흐멧 광장 한복판에 서게 된다. 그리고 보스포로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풍요로운 언덕에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 벽돌로 세워진 돔 형식의 건물을 바라보며 아픔을 느낀다. 비잔틴제국 시절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막 완성된 성스러운 건물을 보며 솔로몬을 이겼노라고 되뇌었다는 이야기를 간직한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 성스러운 지혜의 성당을 뜻하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또는 아야 소피아)이다. 이 성당은 당시 유럽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정사각형 평면 위에 펜던티브를 이용해 원형 돔 천장을 올린 첨단 기법이 적용되면서 가능한 천장의 무게를 줄여야 했고, 구조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로 40여 개의 높은 아치형 창문이 생겨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서로 교차하면서 순례자들은 스스로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천상의 아름다움을 성당 내부로 끌어들인 듯한 감동이다. 게다가 모든 천장과 벽면은 하느님께 봉헌한 아름답고 찬란한 황금색 모자이크 이콘으로 장식되어, 지금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우리가 천상의 성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성당은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 모스크로 사용되다가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아쉽게도 올해 다시 이슬슐탄 아흐메드 자미 람 사원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매우 슬프다.”고 말씀하신 그 마음이 함께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오스만 제국 당시에도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황금색 모자이크 벽면에 회칠을 하였기에 그것을 벗겨내어 다시 같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또 이제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도 모자이크 위에 다시 회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수백 년 동안 제대가 놓여 있었고 거룩한 성체가 모셔져 있었던 방향으로 깊은 절을 하고 다시 광장으로 나오면, 하기야 소피아 성당만큼이나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자미가 눈앞에 보인다. 17세기의 위대한 술탄이었던 아흐메트는 하이야 소피아 성당을 마주하고서 그만큼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첨탑을 황금(altun)으로 지으라고 명령했지만, 건축 설계자가 altun을 altu(여섯)로 잘못 알아들은 탓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 사원은 크고 작은 260여 개의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벽면을 장식한 푸른색 도자기 타일과 만나며 발하는 빛의 색깔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하루에 다섯 번씩 그들이 믿는 유일신 알라에게 깊은 절로 신앙을 표하는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서 순례자들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같은 하느님을 서로 다르게 고백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본다. 기나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신 하느님을, 세상은 왜 같은 마음과 동일한 신앙으로 고백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해진다.

 

보스포로스 해협 위를 유람하는 배에 오른 순례자들은 이스탄불 건너편 옛 칼체돈 지역을 바라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칼체돈 너머로 그 유명한 니케아도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 두 지역은 한때 보편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이며, 그 두 공의회를 통해 작성되고 공인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미사 전례 안에서 고백하고 있음을 떠올린다. 1500년 넘게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교회의 신앙을 지탱해온 그 신경을, 유람선 위에서 마음을 다해 되뇌어본다.

 

“나는 믿나이다… 창조주를… 하느님의 외아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배에서 내려 순례자들은 15세기에 완성된 오스만 제국의 톱카프 궁전을 둘러본다. 이제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궁전에는 수많은 보물들과 함께 세례자 요한의 두개골, 모세의 지팡이가 보존되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 중에 더 위대한 이가 없다는 그분의 유해 일부분 앞에서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흙에서 났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분 앞에서 한없이 미욱한 존재이기에, 궁전을 떠나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톱카프 궁전을 장식한 수백 캐럿의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더 깊이 새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로마 제국의 지하 저수지였던 예레바탄 사라이, 그곳에서 메두사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기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올라와 한때 10만 명을 수용했던 히포드롬이 자리했던 장소로 이동한다. 델피 신전에 있던 청동 뱀을 가져와 제단을 만들고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 그리고 지금은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전면에 세워져 있는 4마리의 청동 말 장식을 떠올려본다. 어느 도시든 그중 하나만 가질 수 있었어도 전 세계의 순례자와 여행객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향기만이 물씬 풍기는 지금 이 장소에 그 모든 것이 자리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콘스탄티노플이자 이스탄불인 이 도시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했었던 것일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이슬람 국가인 이스탄불이지만, 이곳이 위대한 그리스도교 국가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스탄불 외곽에 위치한 코라 구세주 수도원 성당을 순례한다. 작은 성당이지만 내부에 가득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인해 순례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황금 바탕의 모자이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보다 먼저 그분을 알고 따른 성인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특별히 공경받아 마땅한 성모님의 모자이크에 순례자들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니, 코라 구세주 성당에 오래 머무를수록 고개는 아프기 마련이다. 천장을 쳐다보는 일조차도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음 순례지로 서둘러 이동한다. 떠나는 순례자들은 아픈 목을 매만지며, 오직 두 손만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성당의 천장과 벽면을 빈틈없이 채워냈을 그 시절의 신앙인들에게 잠시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여행자들과 섞여 다니던 순례자들은 좀 더 한적한 장소를 찾아간다.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총대주교청이다. 정교회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기에 다양한 지역교회가 각기 독립적으로 유지된다. 각 정교회마다 자신들만의 고유함을 지닐 수도 있으며 서로의 교회에 어떤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각 교회들 사이에는 충실한 협약과 교의가 있으며 성사적인 일치가 있다. 또한 실제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명예상의 권위를 가지는 교회가 있으니, 바로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 신자인 터키의 한복판에 전 세계 정교회의 중심지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영예로움이 가능한 것은 옛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는 역사적인 위치와 역할 때문이다. 오늘날 대다수 정교회들의 어머니 교회이자 특별히 명예로운 위치를 가지고 3억 명이 넘는 정교회 신자들의 영적 지도자로 널리 존중받는 세계 총대주교의 주교좌성당이라 하기엔 작고 볼품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크기나 신자 수로 세상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향유 냄새로 가득한 성당에서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를 봉헌하고 그 기도의 마음으로 촛불을 하나 켜본다. 비록 그 촛불은 오래가지 않겠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을 하나의 전례와 신앙으로 고백하게 될 시간을 소망하는 마음은 아주 오래 간직될 것이다.

 

거의 모든 국민이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 국가이고 정교회의 명예상 본산이 있는 곳이기에 오히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스탄불 교구청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도 콘스탄티노플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중요하고 오래된 교구이며 지리적으로나 의미상으로도 다양한 종교 간의 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요처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이스탄불교구는 엄밀히 말해서 교구가 아니라 대목구이다.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못한 교구로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이기 때문이다. 정식 명칭은 이스탄불 교황대리감목구이지만 편의상 이스탄불교구라고 부르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주신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도 이스탄불 대목구장으로 재직하시며 동방교회와의 유화 정책을 펴신 바 있고 그 정신이 공의회에서도 반영되었다. 주교좌성당은 성령께 봉헌되었으므로 성령성당이라고 불린다. 길가에서는 성당이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건물 사이에 흰색의 성당 출입문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성당 마당을 지나면 적당한 크기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을 기념한 중앙 제단화 아래 무릎을 꿇고 요한 금구 성인의 성해함에 친구로 경의를 표한다. 순례를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마지막 날에 찾아뵐 그 순간까지 함께 기도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터키로 떠나는 순례자들의 목적은 대부분 바오로의 발자국을 따르기 위함이다. 여타 다른 사도들과는 다르게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회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승복하고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복음 전파에 쏟아 부은 분이다. 바오로 사도의 길을 따라 수천 km를 이동하는 터키의 순례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순례자들에게 이스탄불의 시간은 특별하다. 수없는 역사와 사건이 교차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2000년 전 바오로 사도처럼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사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평신도, 2020년 겨울(계간 70호), 김원창 미카엘(성지순례 인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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