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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59: 조선 사회의 폐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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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15 ㅣ No.2119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59) 조선 사회의 폐습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 · 존엄 실천한 인권운동가

 

 

최양업 신부는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에 기반한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했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한 장면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을 잘 보여준다.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과 인권 의식

 

최양업 신부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폐단과 폐습을 개선하려 헌신했다. 최 신부는 무엇보다 조선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신분제를 혁신하려 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사회 약자를 우선으로 돕고 그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고 행동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화와 학문, 기술을 받아들여 궁핍한 경제 환경과 비위생적 생활 환경을 개선하려 힘을 썼다.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애민(愛民) 정신과 인권 의식은 당연히 그의 가톨릭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의 삶에서 보이고 익혀 자연스럽게 몸과 정신에 배인 됨됨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이가 삶의 자리에서 평등하고 존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틈날 때마다 조선의 양반 제도와 양반들의 폐단을 냉정하게 비판했다.

 

최양업 신부의 이런 의식은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뿐 아니라 김대건 신부와도 확연히 달랐던 모습이다. 김대건 신부는 양반 신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에 ‘김해 김 안드레아’라고 서명할 만큼 양반 가문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김대건은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양반으로 살았다. 하지만 최양업은 그의 부모와 선조, 친지들처럼 신앙을 위해 스스로 양반 신분을 포기했다.

 

당시 조선의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폐쇄된 은둔 국가에 사는 ‘미개인’ ‘야만인’으로 인식했다. 특히 페레올 주교는 서양을 ‘문명국’으로, 아편전쟁 이후 서구 문명과 가톨릭교회의 영향을 받게 된 마카오인을 ‘반(半)미개인’, 교회를 배척하고 있는 중국 북부 지역 사람들을 ‘미개인’, 쇄국 정책을 펴고 교회를 박해하는 조선인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그는 가톨릭교회를 통해 문명화의 길을 가야 하는데 조선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페레올 주교뿐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러한 서양 선교사들의 사고에 대해 수원교회사연구소 이석원 연구실장은 “선교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도덕적이고 애타주의적인 사명감이 넘치는 동시에 그 내면에는 조선인ㆍ조선 문화=미개ㆍ야만, 프랑스ㆍ천주교=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서구 문명(천주교)의 우월감, 전교 제일주의가 뿌리 깊게 놓여 있었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54쪽)

 

 

양반제를 비난하다

 

최양업 신부도 서양 선교사들과 김대건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들이 원했던 것처럼 프랑스 함선이 와서 조선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해 줄 것을 희망했다.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인 프랑스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이미 시작한 좋은 일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최양업 신부가 1849년 5월 12일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본지 2022년 6월 5일 자 제1665호 신 김대건ㆍ최양업 전 50회 참조) 하지만 최 신부는 마카오나 홍콩처럼 조선에 프랑스의 조차지가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프랑스와 청나라가 1844년 체결한 황포조약처럼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선교 보호를 소망했다.

 

글이 장황했다. 되돌아가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과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그의 사상, 특히 양반제 폐습을 비난하는 그의 글을 모아보자. “우리 선교지의 상태는 신자 중에서 신분 계급의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바로잡을 무슨 대책이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 선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할 것입니다.”(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동골 교우촌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양반 신분의 사람들은 대개가 한가로운 생활을 합니다. 아무리 찌들고 가난해서 먹고 살아갈 것이 없어도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일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횡령과 사기와 착취로 살아갑니다. 희생으로 삼을 제물감을 찾아다니면서 한데 어울려서는 도박과 주색잡기에 푹 빠져 지냅니다.”(최양업 신부가 1855년 10월 8일 배론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우리 조선에서 양반이라는 자들에 대한 여론을 말하면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건전한 정신을 가진 양반 자신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백성이 양반 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임을 시인하며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5일 불무골 교우촌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가 꿈꾼 하느님 나라

 

글에서 보듯 최양업 신부는 양반제가 교회 공동체와 사회를 분열하는 큰 폐습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가난한 신자들과 사회 약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대안을 찾았다. 최 신부는 관리와 양반들의 착취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의 궁핍한 삶에 늘 가슴 아파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 그는 법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이런 못난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불쌍한 백성의 처지를 서글퍼했다.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질투심으로 서로서로 함정을 파는 일만 계속하고, 또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임금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조선의 현 정세 아래서는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하고 이런 한심한 부조리를 바로잡을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관장이나 관원들이나 포졸들이나 양반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가렴주구에 눈이 먼 약탈자들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1년 내내 고달프게 일하지만, 조정 관리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최양업 신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했다. 그는 무능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아 스승에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저 박해자들이 마침내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양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주 하느님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에 앞서 선진화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종교 안에서 민족 간의 화합을 이루면 나라가 부흥할 수 있다는 것에 눈을 뜬 조선인이 있었다.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 사절단에 속해 청나라 문물을 견학하면서 이를 목격했다. 건륭제가 티베트-몽골의 불교문화를 통해 이민족들을 자연스럽게 포용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서양 과학 기술과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국운을 융성시키는 것을 체험했다.

 

가톨릭 신앙과 서양 문화 한가운데에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최양업 신부도 연암처럼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을 기반한 ‘하느님의 나라’를 꿈꿨다.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이 나라는 신분도 착취도, 가난도, 굶주림도 없는 참 행복의 나라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8월 1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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