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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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교육으로 읽는 이 시대의 교육: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오라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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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16 ㅣ No.155

[예방교육으로 읽는 이 시대의 교육]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오라토리오

 

 

사대복음서를 통틀어 루카복음 2장만이 ‘예수님의 소년 시절’이라는 소제목 아래 단편적이나마 예수님의 사춘기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시절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런데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살레시오회 안에서 필자는 이제껏 이 대목에 관한 살레시오적인 주석이나 묵상 혹은 문헌을 접한 적이 없다. 분명 필자가 무시하여 아직 이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살레시오회 안에서 아이콘처럼 회자하였을 법한 이 대목이 이처럼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이 복음을 살레시오식으로 표현하자면 나자렛 시골의 목공소와 앞마당 그리고 동네를 중심으로 벌어진 ‘예수님의 오라토리오 생활’ 내지 ‘예수님의 오라토리오’라고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41-52)

 

복음은 열두 살 시골 소년 예수가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명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순간을 알려 준다. 또한, 이 복음은 살레시오회를 비롯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지녀야 할 교육적 삶의 원리를 담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하는 말씀처럼 성 요셉과 성모님도 다 알아듣지 못하였던 예수님 안의 신성(神性)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모나 선생은 알량한 점수 몇 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는 듯이 아이의 인생을 일찍이 결정하려 든다.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에서는 아이 안에 남긴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들 마음의 문을 열고자 하느님께 열쇠를 청해야 한다고 한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는 예수님의 첫 말씀도 적이 인상적이다. 부모나 교육자들은 아이들로부터 “모르셨습니까?”라는 말을 늘 듣는다. 이 문장에서는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아이가 되도록 도움을 주며 장차 아버지가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참된 부성을 증거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니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문장에는 교육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개념 하나가 은밀하게 담겨 있다. 바로 ‘자유’라는 개념이다. “가족에 대한 자유다. 여기서 가족이란 익숙한 것의 상징이다. 우리는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워야 한다. … 자유는 고향을 떠나 낯섦에 처하는 데 대한 동의다. … 어딘가에 뿌리를 두는 것은 삶의 일부요, 사는 맛이다. 이상적인 것은 뿌리박음 – 사회적으로, 나아가 지리적으로도 - 과 고향 떠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다.”1)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를 지항한다. 부모나 교사가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기도하고 아이들과 함께 18년 정도만 성실히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간다면 모든 아이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들 스스로가 자기에게 맞는 유명한 스승을 찾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게 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기들의 계획대로 할 수만 있으면, 돈을 들고 가서라도 선생을 매수하여 아이들이 유명한 선생들을 만나게 하고, 억지로라도 그들의 가르침을 아이들의 머릿속에 박아 넣으려는 듯이 말을 잘 들으라고만 한다.

 

 

오라토리오

 

헨델(1685~1759년)의 ‘메시아(Messiah)’ 등을 통해 알려진 ‘오라토리오(Oratorio)’라는 말은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오페라의 요소를 가미한 독창 · 중창 · 합창 · 관현악의 연주회용 음악의 한 장르이고,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대중적인 연설이나 웅변적 기교 · 기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로마의 사도로 알려진 성 필립보 네리(1515~1595년)로부터 유래한다. 오라토리오는 본래 수도원 혹은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경당을 의미했는데, 필립보 성인이 경당에서 동료 사제들과 영적 모임을 하고 고해성사를 베푸는 모임을 ‘오라토리오회’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 필립보의 오라토리오회는 사제들의 모임으로서 엄격한 생활 규율과 청빈 혹은 별도의 서원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행복한 사제 생활을 지향하며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며 영성 서적과 성인전을 탐독하고 묵상을 나누었다. 이러한 성 필립보의 오라토리오회의 모범은 세월이 가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본당의 주일학교 등을 지칭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돈 보스코 역시 이탈리아 토리노의 발도코라는 곳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다른 본당에서 부르고 있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오라토리오’라고 불렀는데, 이에 따라 돈 보스코의 교육학을 일명 ‘발도코의 정신’에 따라, 혹은 ‘오라토리오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살레시오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의 ‘영원한 기준’이라고까지 부르는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라는 말이 살레시오회 안에서 새로운 고유명사가 된 셈이다.

 

돈 보스코는 밀라노, 브레시아 그리고 로마에 있었던 성 필립보 네리 오라토리오의 모형들을 따랐으며, 토리노에서 몇 해 전에 이미 다른 오라토리오를 시작한 콕키 신부의 노선을 모방했다. 그러나 그의 오라토리오는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독자성을 지닌다. 오라토리오는 돈 보스코의 손을 통해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것으로 발전했다. 전통적인 오라토리오는 본당에 적을 두고 있었던 데 비해, 돈 보스코는 본당을 초월하는 오라토리오를 구축했다. 당시 프란소니 대주교가 말했듯이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본당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본당’으로 변했다. 오라토리오에서 사제의 존재는 ‘근엄한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기쁨을 절제하고 소란스러움을 멀리하는 것이었다. 반면 돈 보스코는 사제 스스로 소란스러운 놀이를 제안하고 기쁨이 터져 나오게 하는 ‘유쾌한 사랑’을 펼쳤다. 전통적인 오라토리오는 오로지 주일에만 국한하였으며, 이마저도 오후 두세 시간으로 한정하였다. 돈 보스코는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만남을 주일 온종일 연장했으며, 이어 야간학교라든지 아이들의 일터 방문 등을 통해 전체 주간으로 연장했다. 일반 오라토리오에 나가는 아이들은 고정된 한 본당으로 갔으며, 그 구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의 아이들은 돈 보스코를 찾아 그와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오라토리오에 왔다. 오라토리오의 중심은 본당-교회라는 시설이 아니라 돈 보스코라는 인격체요 지속적이고도 자극을 주는 그의 현존이었다. 시설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였다. 다른 오라토리오는 우수한 아이들을 선별적으로 받았다. 부모는 아이들을 데려왔고, 자기 자녀가 말을 잘 들을 것을 보증해야 했다. 돈 보스코는 거꾸로 선별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받아줄 곳을 찾지 못하는 출소자들로부터 시작했다. 이어서 집을 떠나온 소년 벽돌공들을 받아들였다. 버림받고 위험에 처한 아이들이 오라토리오의 중심을 이뤘다. 돈 보스코는 당연히 아이들에게 오라토리오에 참가하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협력을 요구했다. 흉기를 지닌 반항이라든지 교회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아이들까지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돈 보스코는 계속해서 그런 아이들까지도 일일이 살피면서 선의로 인도할 방안을 모색했다.2)

 

이를 통해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그때그때 돈 보스코가 아이들과 사목활동을 벌인 ‘장소’를 뜻하거나, 그 장소에서 벌어진 사목 활동의 프로그램이나 ‘내용’ 혹은 이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니 ‘무리’, 그리고 든 보스코와 아이들이 맺었던 ‘관계’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돈 보스코가 직접 저술한 『프란치스코 베수코』의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싣는다. “‘오라토리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종교적 의무를 끝낸 청소년들이 ‘주말’에 모여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장소’를 지칭한다. (돈 보스코 시대) 토리노에도 이러한 오라토리오가 여러 개 있었다. … 또 하나는 평일 낮과 저녁에 모여 공부를 가르치는 곳을 지칭한다. 학비를 낼 능력이 없거나 그 밖의 이유로 시립 학교에 갈 수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평일에 개방한다. … 그 대상은 고아들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이나, 모범적이고 근면해야 하며, 적어도 3학년 이상을 수료해야 그 선발 대상이 된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한 학생은 모두 무료로 입학했다. (당시) 그들은 단지 24프랑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낼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기만 하면 되었다.”3)

 

돈 보스코가 살았던 “토리노에서 신부들 가운데 청소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른 길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었다. 16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그중에 14개는 시내에, 2개는 변두리에 있었다. 본당 신부들은 청소년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저녁 교리 시간이나 주일 또는 사순절 교리 시간에 아이들이 교리실이나 성당에 오기를 기다리는 것에 만족하였다. 아이들이 자신의 출신 성당 신부가 도시에 있는 동료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찾아오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주자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상황에서는 그런 논리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좋은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뭔가 새로운 방식,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장례와 세례를 담당했던 보좌 신부들은 상점, 공작소, 시장들 사이를 바삐 움직이는 사목 활동을 시도해야 했다. 여러 해 전부터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또 다른 대도시) 밀라노에서는 이런 아이들의 문제에 대한 대응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 적절한 시설인 오라토리오의 연계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1850년도 밀라노 교구 연감을 보면 15개의 오라토리오가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이미 1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브레시아에서 루도비코 파보니 신부가 세운 ‘가난하고 무식하고 거친 아이들’을 위한 오라토리오는 심지어 1809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토리노에서는 본당 신부들이 주저하는 가운데 (소위 청소년 문제는) 그냥 문제로 남았다. 1846년, 토리노의 본당 신부들은 밀라노에 가서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살펴보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토리노 시의 본당 신부들은 모임을 하고 오라토리오의 적합성에 대해 다뤘다.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각자 자신의 본당에서 오라토리오를 할 수 없기에, 다른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돈 보스코가 그의 오라토리오를 계속할 것을 권장한다.’”4) 이처럼 돈 보스코의 오라토리오는 산업혁명 이후에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대도시들에서 시골이나 변두리에서 밀려오는 청소년들, 특별히 제도 안에 수용될 수 없었던 수많은 근로 청소년이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대책으로써 마을의 중심이던 성당들 안에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장소를 나름대로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전통적인 오라토리오의 운영에 급급하던 다른 사제들과 달리 돈 보스코는 시대의 징표들을 읽고 이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여 그만의 고유성을 지닌 독특한 오라토리오를 이루게 되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오라토리오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라고 불렀는데, 이 연유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우리는 우리의 오라토리오를 두 가지 이유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첫째, 바롤로 후작 부인은 이 성인의 이름으로 사제들의 수도회를 설립할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런 의도에서 우리가 오라토리오로 쓰게 된 장소의 입구에 성인의 초상화를 걸어 놓게 했다. 둘째, 우리의 시도직은 많은 침착성과 온유함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탁월한 온유함과 사도직의 열매를 본받을 수 있는 은혜를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도록 그를 주보성인으로 택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반종교적인 오류와 토리노에 침투하기 시작한 개신교와 투쟁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얻어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5)

 

원래의 오라토리오가 그러하였듯, 유럽 지역의 오라토리오가 자리하는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역사회와 동네, 혹은 마을에 있는 본당, 혹은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현대사회 속 마을과 지역공동체의 복원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가정과 학교 그리고 지역공동체를 잇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야 할 오라토리오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교육적 개념이다. 오늘날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대어 볼 수 있는 일, 곧 지역공동체, 동네, 가정 내에서만 가능한 바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는 현대사회의 요구 안에서 오라토리오의 개념을 정리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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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수아 바리용, 『흔들리지 않는 신앙』,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사, 2014년, 409~410쪽.

 

2) 테레시오 보스코, 『돈 보스코』, 돈보스코미디어, 2014년, 260~261쪽 참조.

 

3) 성 요한 보스코, 『프란치스코 베수코』, 돈보스코미디어, 2009년, 67쪽 참조.

 

4) 테레시오 보스코, 『돈 보스코』, 돈보스코미디어, 2014년, 210~211쪽.

 

5) E. 체리아 엮음, 『돈 보스코의 회상』, 돈보스코미디어, 2011년, 214쪽.

 

6) 데이비드 W. 오어, 『학교를 잃은 사회 사회를 잊은 교육』, 현실문화, 2009년, 239~251쪽 참조.

 

[살레시오 가족, 2022년 5월호(174호), 김건중 신부(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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