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 (토)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강론자료

2024-09-15.....연중 제2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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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24-09-14 ㅣ No.2467

                                      연중 제24주일 (나해)

이사야 50,5-9ㄱ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2024. 9. 15.

주제 : 내가 드러내야 하는 삶의 태도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지만, 사람의 삶에 행복과 불행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때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도 앏니다. 그 두 가지가 똑같다는 뜻은 아니고, 그렇게 둘 사이에 떨어져 있는 거리가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이라는 정도라는 일을 체험으로 안다는 표현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행복과 불행은 기쁨과 슬픔과 마찬가지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거리만큼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나의 삶에 행복은 기쁨은 늘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그와 상대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불행과 슬픔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옳다고 하겠습니까?

 

내가 원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나의 삶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는 불행과 슬픔을 어떻게 설득해야 내 삶에 가까이 오지 않게 하느냐는 일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자기의 삶에 이루어지게 하려고 많은 사람이 애쓰지만, 성공했다는 비결을 후대의 사람에게 알려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던, 카이사리아라고 불리던 지방의 필리피라는 곳까지 먼 거리를 여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레아호수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은 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이었기에, 보통의 여행이 아니라, 복음선포의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었겠지만, 그곳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가 첫번째 질문이었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가 두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목동의 신 판신을 모시던 곳==바니아스/필리피>

 

예수님께서 하신 이 첫째 질문에 제자들은 현명하게도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살아난 세례자 요한/어떤 이들은 엘리야 예언자/또 다른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을 대답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예수님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질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답을 들으시고,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제자들이 하시는 대답을 듣고자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두 번째 질문을 마치시고, 그 질문에 십자가와 죽음에 관한 말씀을 설명을 덧붙이십니다. 삶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일에도 마찬가지라고는 합니다만, 사람이 죽음과 고통이라는 일을 생각하면, 그가 드러내는 삶의 자세가 매우 진지하고 조심스러워(=愼重/신중)집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신중해진다고 해서 내게 다가온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중요한 일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그 마음에 드는 대답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사도였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자기만의 생각을 담아 대답을 덧붙인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에게 혼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는데, 다음에 자기의 생각을 담은 소리는 잘못된 대답이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은, 오늘의 첫째 독서를 생각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려고 발버둥을 친 이사야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생각하고, 내 삶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해석하겠다고 다짐하면, 하느님의 축복은 나에게 끊임없이 다가올까요? 나는 절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오늘 독서의 말씀을 대하면서 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사람의 삶에 그 어떤 것도 보장은 없습니다. 내가 좋은 생각을 갖지고, 내가 하는 좋은 생각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한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이 나에게 이루어지겠지만, 그때라도 나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야고보사도의 편지에서 들은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좋은 표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올바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심각한 질문을 하셨던 예수님을 위로하면서 그분의 제자로 사는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드러내야 하겠습니까?

 

추석이나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우리가 하는 작은 생각이 모여,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일이 되도록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날로 뜨거워지는 지구가 몸살을 하지 않도록 내가 협조할 방법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될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하는 생각과 실천이 합쳐져서, 우리의 삶에 또 세상의 환경에 좋은 일이 되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이나 행동이 모여, 하느님의 은총을 간절히 바라는 영혼들에게 그 은총이 한순간이라도 빨리 실현되어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에 참여하기를 오늘 미사를 통하여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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