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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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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4 ㅣ No.1150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국문 초록

 

최석우 몬시뇰(1922~2009)은 해방 이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죽을 때까지 고민한 사제였으며,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열심히 공부한 학자였다. 그의 등장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연구자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외국인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인에 의하여 교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주도되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통사 저술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시대사 연구를 계속해서 확대시켜 나가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거의 전 시기를 다루었다. 그리고 통사의 저술에 분류사 저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 다양한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통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가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통사의 저술을 위해서 교회론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시대구분을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을 선교사에서 순교사 및 문화사로, 그리고 다시 민족사를 거쳐서 구세사적 접근으로 나아가는 변화과정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어떠한 사관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또한 깊이 고민하였다. 처음에 그는 교회사가 역사학과 신학이라는 두 개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그는 교회사 연구와 역사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 사료론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사가 민족사만이 아니라, 그리고 세계사와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세계화라는 주제까지 지향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결국 그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교회사가 신학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교회 개념의 적용이 교회사 연구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방향은 구세사적 해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천주교회사 속에서 그 역사적 위치를 뚜렷하게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해서 ‘최석우 사학’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1. 머리말

 

벌써 한참 전인 2001년의 일이다. 필자는 그해 9월의 어느 날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1922. 11. 27~2009. 7. 20) 몬시뇰의 팔순을 기념해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 어떤 일보다도 몬시뇰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해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사학계에서는 생존해 있는 학자의 학문적 업적을 자리매김하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청한 일이 되었지만,1) 그동안 필자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부분의 하나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이었기에, 그 일은 최석우 신부님과 별다른 인연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에게 무척 큰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올해 최석우 몬시뇰 선종 10주년을 기념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필자는 그가 해방 이후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죽을 때까지 고민한 사제였으며,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열심히 공부한 학자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나의 교회 나의 역사』라는 몬시뇰의 수상집에 실린 김창석 신부의 인사말2)에 언급되었듯이 몬시뇰이 오늘의 한국사 연구자나 교회 안의 사제들에게 울린 경종만 보더라도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위치나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필자는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진 그의 교회사 연구에 대해서 ‘최석우 사학’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한국사 연구나 신학 안에서 새로운 한 분야로 확고히 자리를 잡도록 해주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물론 몬시뇰 선종 이후에 몇 편의 글이 나오기는 하였다. 백병근이 「한국교회의 인물상(102)」에서 몬시뇰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개괄적으로 다루었으며,3) 조현범이 몬시뇰의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하면서 펴낸 책에서 해제 형식으로 사료수집이 가지는 의미를 다룬 글도 찾아볼 수 있고,4) 원재연이 몬시뇰의 시대사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교회사연구소 창립 50주년 기념 논문집에 실은 글을 들 수 있을 것이다.5) 그러나 이 정도의 언급만으로는 몬시뇰이 남겨둔 방대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쉽게,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몬시뇰이 교회사 연구를 하면서 어디에 가장 깊은 관심을 두었는가에 대해서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최석우 몬시뇰은 새로운 교회사관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본 고에서 필자는 몬시뇰이 주장한 교회사관이 어떠하였으며, 그것이 그의 시대사 연구와 분류사 연구 및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 서술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한 보다 개별적이고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의 위치 설정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에서 최석우 몬시뇰이 차지하는 위치를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 속에서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몬시뇰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이 드러나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목표로 삼았다. 그 사실은 ‘국산 벽돌’과 ‘서양 벽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한국교회사 서술의 토착화를 주장한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라는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6) 그는 교회사 연구에서 전통의 비판적 계승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사 연구의 쇄신이 교회 자체의 쇄신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 점은 몬시뇰의 학위논문인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1961)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책의 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후기의 대부분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를르 달레 신부의 저술인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채우면서 달레 신부의 저술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7)

 

이와 함께 최석우 몬시뇰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루어진 시기를 설명하면서 “그 이유는 수집한 자료가 이 시대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고, 무엇보다도 이 시대야말로 한국인이 주도 역할을 한, 정체성이 있는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8)라고 언급한 점에서도, 몬시뇰은 연구 초기부터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이 주도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이전과 다른 한국천주교회사를 서술하겠다는 다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에 의한, 특히 한국인 성직자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새롭게 해보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한 여러 글을 남기고 있는데, 『나의 교회 나의 역사』에 실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는 이를 잘 말해준다. 이 글에서 그는 외국인에 의한 연구와 한국인에 의한 연구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외국인의 경우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한 연구와 일본인에 의한 연구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인에 의한 연구에 대한 그의 서술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달레 신부나 다블뤼 주교 이전에 이미 한국인 평신도에 의한 교회사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9)

 

몬시뇰은 한국인 평신도들이 서술한 순교사 연구를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보았다.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목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그보다 앞서거나 뒤이어 순교사 전기가 나왔다고 한다. 황사영의 「백서」나 조선인 신자들의 서한, 『기해일기』 등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10) 따라서 몬시뇰이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에서 이러한 점을 다룬 내용은 새롭게 음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11)

 

이어서 몬시뇰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연구자로서 불교 신자인 이능화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12) 박사학위 논문의 처음에서 달레와 이능화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대비시키고 있으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에서도 이능화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연구사적 의미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였다.13) 그러나 여기에서는 해방 이후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평신도의 교회사 연구를 먼저 들면서, 한국인 성직자로서 주재용 신부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때 그는 1960년대에 외국에서 교회사를 공부하고 돌아온 인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즉 그가 한국인이며, 성직자로서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체계적으로 교회사를 공부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필자는 “신부님께서는 여러 학문의 길 가운데에서도, 매우 어려운 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교회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을 떠나셔서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제대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연구자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며, 동시에 프랑스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외국인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인에 의하여 교회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주도되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님의 귀국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후 신부님에 의하여 창설된 한국교회사연구소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부님께서 지금까지 교회사 연구와 함께 걸어오신 발자취는 바로 현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4)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3. 통사 저술과 분류사 연구에 대한 관심

 

최석우 몬시뇰은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라는 글의 서언에서 “필자는 여기서 한국천주교회가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래 역사가들이 한국교회의 기원과 발전에 관하여 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연구하고 서술해 왔는가를 추적해 보려는 것이다. 그와 같은 회고는 우선 이 방면에서 한국교회가 남긴 귀중한 전통을 찾아보려는 데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총정리가 앞으로의 한국교회사 연구가 해야 할 쇄신에 조금이라도 기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과거 역사가들이 그 시대 시대에 따라, 시대와 더불어 어떻게 의식하며 역사를 서술해 왔는가를 보려는 것이다. 편의상 한국교회사의 서술의 역사를 ‘순교자 전기, 통사, 특수문제 연구’ 이렇게 3기(期)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구분의 기준은 연대순보다 유형적인 것에 치중하였다.”15)라고 하며,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쇄신을 위하여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의 역사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연대순보다는 유형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 순교자 전기, 통사, 특수문제 연구의 3기로 그 변화의 단계를 구분하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이 순교자 전기에서 이제는 통사 저술로, 그리고 특수문제 연구, 즉 분류사 연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서 그는 뒤의 두 문제인 통사와 분류사 연구에 매달렸으며, 여기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1) 통사 저술의 지속적인 강조

 

몬시뇰은 통사에 대해서 “한국교회사에 관한 통사적 서술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창설에서 시작하여 거의 역사가가 살고 있는 시대까지 전시대에 걸쳐 제반 문제를 통관한 역사기술법을 가리켜 말한다.”16)고 먼저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에는 전시대에 걸쳐서, 제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에 대한 관심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수집한 자료의 정리와 검토가 대충 끝나자 시대구분에 들어갔다. 한국교회사의 통사를 쓴다는 것은 시간과 자료의 부족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중 어느 한 시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를 일본교회와의 접촉이 시작되는 1592년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제2대 대목구장의 입국으로 대목구의 존립이 확고해지는 1837년까지로 잡았다.”17)라고 하였듯이,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 저술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

 

몬시뇰은 모두 5권의 개인 저술을 남기고 있다. 한 권은 수상집, 한 권은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라고 되어 있다. 나머지 3권은 『한국교회사의 탐구』 Ⅰ·Ⅱ·Ⅲ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천주교회사를 탐구하는 작업을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첫 번째 책인 『한국천주교회의 역사』(1982)라는 책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곧바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18) 그냥 제목만 보더라도 통사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이다.

 

사실 그는 이 책에 대해서 “과거에 발표한 글 중에서 시대사에 관련된 글들을 한데 묶어 본 것이다.”고 말한다. 이어서 “서명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택한 것은 결코 개설서로 자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으로 새롭고 더욱 완전한 개설서를 쓰는 데에 자극제가 되고 참고가 되기를 바람에서이다.”라고 하여, 통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개항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고서, 현재까지 이르는 교회사 연구가 너무나 부족한 현실을 비판하였다. “필자는 기존 개설서들의 가장 큰 약점이 현대교회사에 대한 연구 부족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개항 이후 현대까지의 교회사 연구가 너무 부족한 현실이다. 그런데 현대교회사 연구 부족의 원인은 자료의 빈곤이라기보다는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말미암은 이 시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 부족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사에서도 공백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시기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야말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다음 해인 1983년에 들어와서도 그는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 “그간 교회사가 다각적으로 연구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미개척분야가 많고 또한 시대사적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대의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거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완전한 역사 서술을 위해 미개척분야나 공백기의 연구가 시급히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19)라고, 다시금 시대사 연구의 확대를 언급하였다. 그와 같은 공백기에 대한 연구가 시급히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가 완전한 역사 서술, 즉 통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개화기 이후의 공백기에 대한 그의 교회사 연구는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에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사를 먼저 다루었다. “나는 고려대학교의 민족문화연구소로부터 천주교의 종교운동사에 관한 원고청탁을 받고, 이에 관한 논문을 집필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현대문화사대계』에 실려 1980년에 간행되었다. 처음에 민족문화연구소에서는 천주교를 제외시켰는데, 조광 교수의 중재로 천주교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나는 그 논문의 서언에서, 일제강점기의 천주교회사는 아직 미개척분야나 다름이 없는데, 그것은 자료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자료에 대한 무관심이나 자료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제하의 민족운동에 관한 위의 논문을 어느 정도 종합적으로 써낼 수 있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그 후에야 발견되었으므로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 후 일제하의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에 관한 연구가 촉진되면서 그 관계 논문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안중근에 관한 논문들은 신자들에게 우리 교회사에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20)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서도 여러 형태로 접근하였다. 이때 그는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북한의 천주교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교계제도의 확립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라든가, 교회일치운동, 교황의 한국 방문까지를 다루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는 일제강점기의 자료만이 아니고, 현대교회사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수집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시급하다는 것이고 현대사를 서술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술은 현시점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급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전 시기의 자료들이 많이 유실된 것을 상기한다면 언제 그러한 위험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에 서두르자는 것이다.”21)라고 하여, 현대 천주교회사 연구의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최석우 몬시뇰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시대사 연구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고 하겠다.22)

 

몬시뇰은 「나와 교회사 연구」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통사의 문제를 다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본 연구소에서 통사를 계획하기는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처음 1989년의 계획은 ‘한국가톨릭문화사대계’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학자들이 참여하는 편찬물로 계획된 데다가 집필자들의 사정 때문에 추진과정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두 번째 계획은 1996년의 일이었다. 그때는 여러 학자들의 참여가 도리어 편집을 지연시키다가 결국 중단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고 집필자들을 한두 명으로 압축시켰으나, 그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통사편찬의 필요성은 현재 마땅한 통사가 없기 때문에 더욱 긴급히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의 각 분야의 전문화로 인한 전반적인 교회사 서술의 어려움은 한국에서도 한국교회사의 집필을 여러 학자들에게 배당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본 연구소의 설립 4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계획된 이번 통사만은 이 심포지엄을 계기로 한층 활기를 띰으로써 머지않은 장래에 결실을 맺어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23)

 

그는 1989년과 1996년에 걸쳐서 처음에는 여러 학자들과 함께, 그다음에는 집필자를 한두 명으로 줄여서 통사의 저술을 시도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989년에 통사를 추진한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 가톨릭교회사』 서술 방향 (1)·(2)」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24) 여기에서 그는 한 사람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 저술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교회사 연구에서 각 분야의 전문화로 인하여 전반적인 교회사 서술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몬시뇰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세 번째로 시도하는 통사의 저술에 대한 기대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를 제외한 상태에서 전 5권으로 발간되었다. 최근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서술을 다시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이 잘 마무리된다면 몬시뇰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나온 『한국천주교회사』 전 5권의 구성이나 현대 편이 서로 잘 조화되고 있는지, 그것이 몬시뇰의 의도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현재 몬시뇰이 개인적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를 저술하려고 시도했던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술하다시피 그가 언제나 통사에 대한 구상과 서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비록 그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 통사를 볼 수는 없지만, 그가 구상한 한국천주교회사 통사의 모습은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 이후 계속적으로 시대사 연구를 확대시켜 나가면서 한국천주교회사의 거의 전 시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양한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통사의 내용을 채워나가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통사를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분류사 연구의 끊임없는 모색

 

몬시뇰의 통사 저술을 이해하려고 할 때 놓칠 수 없는 부분은 그가 다양한 분류사 연구를 끊임없이 시도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에게 통사의 저술과 분류사 연구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의 탐구』의 서언25)에 최석우 몬시뇰은 분류사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동기를 언급하고 있다. 특수분야는 특수문제로도 표현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분류사 연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분류사 연구가 체계적인 통사의 저술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분류사 연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체계적인 통사의 저술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분류사 연구의 대상이 된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사의 흐름을 통사와 다르게 시대구분을 새롭게 하여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26)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분류사 연구가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의 분류사 연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또한 바랐다.

 

사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를 다룬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에서도 통사의 저술에서 분류사 연구라는 새로운 단계로 교회사 연구가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밝힌 바가 있었다.27)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사의 연구가 반성해야 할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특수문제 분야, 즉 분류사 연구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많은 발전을 보이고는 있으나,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기초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순교자 문제를 다루는 것도 하나의 분류사 연구로 볼 수 있지만, 교회사 전반에 걸쳐서 제반 특수문제를 새롭게, 더욱 많이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몬시뇰에 의하면 1930년대부터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특수분야로 전향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해방 이후 한국 성직자들의 해외 유학이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특수문제 연구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28) 물론 평신도 학자들에 의한 분류사 연구가 더욱 다방면에 미치고 있음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대상이 특수한 문제라든가, 특수 지역이나 특수 단체에 관한 연구 등에 걸쳐서 앞으로 활기차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분류사 연구가 더욱 많이 시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래야 교회사 연구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분류사 연구에 미친 영향을 함께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자체의 쇄신을 통해서 우리의 시야를 말할 수 없이 확대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교회를 과거와 현대의 세계에 개방시켰다는 것이다. 내적 생활에 대한 교회의 종교적 자아의식은 전례, 평신도, 사목 등 새로운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더욱이 교회가 인간과 인간세계와 대화를 모색함으로써 생기는 관계에 대해서는 국가, 사회, 문화, 타종교 등으로 극히 광범하고 복잡한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와 관계가 교회사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분류사 연구를 독촉하였다.

 

따라서 현대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사 흐름을 볼 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분류사 연구를 크게 강조하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몬시뇰로 파악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1982년에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함께 발간한 그의 또 다른 단행본인 『한국교회사의 탐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을 것이다.29) 그는 서언에서 “그간 발표한 글 중에서 한국교회사의 특수분야에 관한 글들을 모아 한 책으로 묶어 보았다.”고 말한다. 이때 몬시뇰은 자신이 다룬 분류사 연구의 범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30)

 

몬시뇰은 『한국교회사의 탐구』의 저술이 교회사 연구의 특수분야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하면서도, 「한국교회사의 특수연구」라고 해서 또 다른 편을 설정하여 강조한다. 여기에서는 분류사 연구라는 용어 대신에 특수연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때 그가 대내적인 문제로 연구한 자료, 전례, 성서, 교리서, 교리교육, 선교회, 사회사업, 의료사업 등에 대한 내용들이 분류사 연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몬시뇰은 자신의 분류사 연구가 더욱 확대되기를 바라며 순교사라는 분류사 연구를 넘어서, 전례사나 평신도사나 교구사, 신학사조사, 언론출판사, 여성사, 사회운동사, 독립운동사 등등 미개척분야가 아직도 많다고 덧붙였다.31)

 

몬시뇰의 분류사에 대한 관심은 그의 수상집인 『나의 교회 나의 역사 - 고집쟁이 앤디 신부』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성서의 도입과 번역의 역사, 한국교회 출판의 역사, 한국교회에 나타난 성체 신심의 역사 등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연구서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에서도 그는 자신이 앞장서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분류사 연구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어느 정도 그것이 실천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통사의 저술과 분류사 연구의 관계를 주목하면서, 더욱 완전하고 더욱 풍성한 한국천주교회사를 서술하기 위해서 분류사 연구가 더욱 폭넓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당부하고 있다.32)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에서는 모두 5개의 편이 설정되고 있는데, 3편의 제목인 「한국 천주교 교구 발전사」는 거기에 해당된다. 『한국교회사의 탐구』에서 분류사 연구의 하나로 언급했던 교구사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33) 그러나 이 책의 전편에 걸쳐 분류사 연구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첫 번 『한국교회사의 탐구』와 비교할 때, 이번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는 9년이란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량도 많고 주제도 다양해졌다. 실제로 대내적으로 한국교회의 기원, 교구의 발전, 성직자 양성, 수도회와 선교단체, 토착화문제 등, 대외적으로는 한국민족과 사회, 전통사상,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와의 관계 등 새로운 주제들이 적지 않게 첨가되었다.”34)라고 밝히고 있는 데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몬시뇰의 분류사 연구를 개관할 때 그가 한국사 연구의 연구사 속에서의 분류사 연구를 시도한 연구자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 두고 싶다. 그리고 통사와의 연관성을 모색했다는 점 역시 그러하다. 즉 그는 교회사 연구에서 분류사 연구가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하며, 무엇을 지향하고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4. 새로운 교회사관의 정립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더욱 새겨져야 할 부분은 그가 교회사 연구를 어떠한 사관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의 서언을 통해서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나는 역사연구를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길 원하며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 1954년에 본격적으로 교회사 공부를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늘상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35)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교회사 연구자가 교회사 연구를 어떠한 관점에서 연구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36)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를 하는 학자로서, 사제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연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자 하였으며,37) 교회사 연구자가 가져야 할 사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서 언급하였다. 올바른 교회사관 없이 교회사의 설명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8) 현재에도 그러하지만, 이것은 교회사 연구자들 안에서도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현재 한국사학계가 부딪히고 있는 큰 문제의 하나로 사관부재의 문제를 들고 있는데, 그가 평생에 걸쳐서 교회사관을 독자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려고 노력한 사실은 매우 놀랍게 받아들여진다. 앞으로 몬시뇰의 교회사관을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대강의 내용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교회사 연구가 실증사학의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39)

 

1) 신학 중심의 교회사 연구 제시

 

몬시뇰이 교회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은 연구방법론이었다.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에서부터 이를 단편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교회사는 역사학과 신학 두 영역에 예속되는 특수한 학문이다. 교회사는 그 소재가 신앙에서 본 교회의 기원과 발전인 한에서 신학에 속하는 것이고, 인간으로 구성되고 인간이 지도하는 가시적인 제도인 한에서 역사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의 대상은 신앙의 교회인 동시에 역사의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사의 과제는 시간과 공간을 통한 신과 인간의 협동을 추적하는 데 있다면 신학적 견지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이요’, 역사적 견지에서 그것은 ‘원시교회로부터 세계교회로의 만개를 의미한다.”40)고 하였다. 즉 그는 교회사가 역사학과 신학 두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하면서, 교회사의 대상과 과제를 정의하였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도 “교회사관의 문제이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다면 사가의 사관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박해의 원인을 교회사가로서는 정치적으로 취급할 수는 없고, 거기에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즉 교회사가는 사실(史實)을 또 신앙의 견지에서 보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사가에게 신학적 기초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다.”41)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교회사에서 논의되는 역사적 사실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교회사 연구를 종교의, 신앙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교회사 연구자에게는 신학적 기초훈련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최석우 몬시뇰은 『교회와 역사』 1989년 6월 「권두언」에서 이를 부각시켰다.42) 교회사 연구자에게 어떠한 사관을 가지기를 바라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교회사 연구를 할 때 역사를 보는 눈과 함께 신앙을 보는 눈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단지 옛 조선 후기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거나 고문(古文)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한국천주교회사 안에서 일어난 제 사건들을 새롭게 이해하고 정리하여 신앙 속에서의 한국천주교회사로 자리매김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민족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와 결부된 구세사로까지 교회사 연구가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지향으로서 처음으로 구세사가 언급되고 있다.

 

몬시뇰은 「나와 교회사 연구」에서 이러한 점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한다. “다음은 교회사관의 문제이다.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구원의 역사이다. 물론 민족사나 사회와 관계한 역사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나, 그때에도 구원사적이고 선교사적 사관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 박해시대의 신앙을 내세주의니 개인 구원주의니 하며 과소평가하고 반면에 민족이나 사회에 관계한 역사를 교회사의 전부인 것처럼 과대평가할 위험이 생긴다. 일반 역사연구의 대상은 인간문화이지만, 교회사의 연구대상은 가톨릭 문화이다. 그러므로 문화란 속사(俗事)에 교회 제도와 교리를 접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교회사는 순전한 속사의 서술로 그치게 될 것이다.”43)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몬시뇰은 교회사가 추구하는 민족사의 경우에서도 구원사적이고 선교사적 사관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사에 선교사적 사관이 새롭게 덧붙여지고 있다. 즉 교회사 연구가 단순히 민족사적 접근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박해시대의 신앙이 내세주의나 개인 구원주의로 과소평가되며, 민족사적 의미만 크게 강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교회사의 연구대상은 역사연구의 대상인 인간 문화와 달리 가톨릭 문화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 경우 문화란 속사(俗事)에 교회 제도와 교리를 잘 접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교회사는 순전한 속사의 서술로 그치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새로운 교회사관을 피력해 온 몬시뇰은 그의 마지막 논문인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44)를 통해서 그의 교회사관을 종합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교회사의 주제, 신학으로서의 교회사, 역사학으로서의 교회사 - 이때 민족사 및 세계사와의 관련 -, 구세사로서의 교회사, 교회사의 세속화 극복, 교회사와 교회사가의 과제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는 결론으로 “교회사는 신학이다. 교회사의 교회론적 지향, 즉 교회 개념의 적용은 교회사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그 구세사적 해석은 교회사를 그 최종목표인 종착점에 도달하게 한다.”고 마침내 정리하고 있다. 즉 이제 그는 교회사 연구가 신학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45) 다시 말해서 “교회사가 구세사의 계속임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 구세사적 해석이 가능하다. 교회 개념에 이어 교회사를 신학과 두 번째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 이 신앙”이며, “교회 개념이 교회사 연구의 출발점이라면, 구세사적인 해석은 교회사 서술의 목표인 종착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가톨릭 신앙인이, 그리고 신학을 배운 제대로 된 학자가 교회사 연구를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방향은 교회론적 지향에서 출발해서, 그 최종목표인 구세사적 해석에 도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몬시뇰의 교회사관에는 그의 스승인 예딘(Jedin) 교수의 절대적인 영향이 있었다. 이때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동행과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몬시뇰에 의하면 예딘은 “쌓아 올려진 자료들이나 일련의 사건의 서술까지도 아직은 벽돌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구세사적인 해석이 기초로 놓여 있을 때에만 교회사는 가능하고, 그래야만 진정한 교회이다.”46)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예딘이 “역사 진행의 구세사적 관찰이 어떻게 뒤로 밀려나 거의 포기되기에 이르렀는가?”47)라고 물으면서, 그와 함께 “오늘날 구세사로서의 새로운 입구가 존재하는가? 교회사는 자신에게 제출된 요구에 어떻게 응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졌다고 한다.48) 이에 대해 그는 지금은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구세사적 접근이 새롭게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몬시뇰은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제자가 생각한 것은 고작 교회사의 토착화였으나, 스승은 보다 근본적인 교회사의 연구와 서술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토착화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교회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서술한 후의 문제이다. 교회사의 연구와 서술은 또한 교회사학의 근본문제요, 과제이다.”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즉 교회사 연구에서 토착화보다도 구세사적 접근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몬시뇰 역시 “교회사의 구속사적 해석과 교회론적 지향은 교회사를 심화시키고 풍부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몬시뇰은 자신의 교회사관을 정립하는 데에 일정한 변화과정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그 역시 교회사 연구를 통하여 구세사적 해석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 지향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시뇰은 교회사와 신학 및 역사학의 관계에 있어서 공존을 함께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학의 방법, 구세사적 해석, 교회론적 지향, 요컨대 교회사와 신학과 역사학의 관계는 아직 교회사의 속화가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것을 극복하여 그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교회사의 우선 과제였다.”49)라며, 교회사 연구에서 세속화를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학으로서의 교회사 연구를 추구하기에는 아직까지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교회사의 신학과의 관계, 교회사의 역사학과의 관계는 전자가 교회사의 신학성을, 후자는 학문성을 보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신학을 등한시하면 신학성을 잃을 위험이 있고, 역사학을 등한시하면 학문성을 잃을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신학과 역사학이 교회사의 연구 안에서 독립된 학문으로 공존할 수 있어야 하고, 공존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두 학문은 제 기능과 효력을 발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사도 그만큼 심화되고, 풍부해질 것이다.”50)라고 언급하게 된다. 따라서 몬시뇰은 일생의 교회사 연구를 통해서 교회사 연구의 서술이 어떠한 사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했다고 하겠다. 다름 아니라 그에게 “교회사의 연구와 서술은 교회사학의 근본문제이므로,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사의 과제”51)였기 때문이다.

 

2) 교회사 연구를 위한 사료론 정리

 

몬시뇰은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를 정리하면서 결론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사의 연구가 반성해야 할 점은 교회사를 완전히 종합하여 그 역사를 굳건히 하는 데 전제가 되는 기초 작업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교회사 연구의 기본지침서인 자료목록이나 자료안내서가 거의 없다.”52)고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사 연구에서 자료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지적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료만을 다루는 분류사 연구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이는 통사를 위한 공구류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53) 이때 그는 자료라는 말을 사료라는 용어보다 더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료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담는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서는 사료를 다루는 기초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를 위한 사료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사정은 「나와 교회사 연구」라는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가 얼마만큼 어떻게 평생 사료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몬시뇰은 그가 교회사 연구에서 사료의 중요성을 인식한 계기를, 역시 스승인 예딘 교수로부터 받은 영향임을 밝히고 있다. “예딘 교수는 한국교회사 관계 학위논문을 쓰려면 우선 사료부터 많이 수집해야 한다고 하면서 로마의 포교성성 고문서고,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등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1년 동안 사료를 충분히 수집해 갖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사료들 중에서 미공개 원전들은 논문집 부록에 반드시 첨부해야 한다는 지시도 덧붙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지시들은 물론 원사료를 통한 교회사 연구라는 방법이 한국교회사 연구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소신에서 나온 조언이었겠으나, 나에게는 원사료의 소중함과 그에 따른 올바른 교회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54)고 하였듯이, 그는 예딘 교수로부터 사료의 중요성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그러한 연구방법론이 스스로에게 몸에 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를 위한 사료론 역시 교회사 연구와 신학 및 역사학의 관계를 다시 언급하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교회사 연구가 역사학의 도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있다.55) 그는 신학에는 고유한 연구방법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사 연구를 위해서는 역사학의 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한다고 주지한다. 교회사의 구세사적 해석과 교회론적 지향이 그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사료 연구에 대한 평가절하는 퇴보이지,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56) 그리고 역사학은 교회사의 학문성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7) 여기에서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를 위한 역사학의 방법이 세 단계로 진행됨을 말하며,58) 사료의 수집·분류·정리의 단계와 사료 비판의 단계와 사료의 종합단계로 사료론을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몬시뇰의 사료의 수집 · 분류 · 정리에 대한 관심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사료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천주교회사가 사료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에서 “그런데 현대 교회사 연구 부족의 원인은 자료의 빈곤이라기보다는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말미암은 이 시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 부족에 있다.”라고 하든지,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에서도 “다행히 일제강점기의 교회사 연구는 좀 추진되고 있는 느낌이지만, 광복 이후 현대의 교회사는 자료의 발굴이나 수집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어서 공백 상태나 다를 바 없다. (…)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더욱 많은 자료의 발굴과 간행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지만”59)이라고 말하였다. 즉 그는 사료의 부족이기보다는 사료에 대한 무관심이나 사료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문제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 관한 시대사 연구의 확대를 위해서 사료의 수집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몬시뇰이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정리한 「나와 교회사 연구」를 통해서도 바로 확인할 수가 있다. 일제시대의 교회사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바로 자료의 수집에서 시작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제시대의 교회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이제는 일제시대의 자료만이 아니라 현대교회사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수집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시급하다는 것이지, 현대사를 서술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술은 현시점에서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급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전 시기의 자료들이 많이 유실된 것을 상기한다면 언제 그러한 위험에 처할지 모르기 때문에 서두르자는 것이다. 서두를수록 그만큼 성과도 클 것이다.”60)라고 역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나와 교회사 연구」에 실린 ‘한국교회사 자료의 발굴과 수집에 전념한 1956년’ 61)이라는 소제목은 몬시뇰의 노력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승의 요구에 덧붙여서 로마의 예수회 및 프란치스코회의 고문서도 찾아가서 사료를 찾았다고 한다. 당시 그가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온 힘을 다해서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는가를 자세하게 살필 수가 있다.

 

이것은 박사학위 논문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다시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조현범 역시 이러한 점에 대해서 “나도 확인하면서 딱 한군데 오류를 발견하였을 뿐이다.”62)라고 하며, 몬시뇰이 사료를 대하는 자세가 얼마나 철저하였는가를 드러내 주었다.

 

몬시뇰과 한국천주교회사 사료와의 관계에 관한 내용을 모두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그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사료와 인연을 맺은 과정이나 노력은 「나와 교회사 연구」에 잘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글의 구성인 다른 소제목들이 알려주고 있듯이, 한국교회사연구소를 만든 이후 ‘자료의 수집과 정리’, ‘뮈텔 문서의 발견’, ‘번역 자료집 · 한국어 자료집 · 연구 자료집의 간행’에 실린 내용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몬시뇰은 그다음 단계인 사료 비판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교회사 연구에서 사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끈질기게 매달리게 된 이유로 당시까지의 연구에서 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의 혼란에 크게 주목하였다. 이에 그는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를 통해서 “우선은 기존 자료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해석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극히 원칙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의 고증과 사실의 해석은 역사학의 기본이다. 그런데 올바른 사료 비판 없이 사실에 대한 진위의 확인은 있을 수 없다.”63)고 주장하였다. 올바른 사료 비판 없이 교회사 연구가 행해진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도 “어떤 사료의 내용을 연구하기에 앞서 그 사료의 저자와 그 저자의 진실성부터 검토해야 하는 것, 즉 먼저 철저한 내적비판과 외적비판을 거친 다음 사실(史實)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사학가의 기초훈련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비판이 철저히 가려지지 않고 있는 느낌이고 그 결과 한국천주교회의 기원과 초기 인물에 관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64)고 말하였다. 그것은 천진암 주어사를 한국천주교회의 기원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견해나, 김범우의 유배지나 순교여부에 대해 혼란을 일으켜주는 연구들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나왔다. 몬시뇰은 「나와 교회사 연구」의 결론 부분인 ‘몇 가지 제언’에서 사료 비판의 문제와 사료를 다루는 역사가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65)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가 바로 사료 비판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벽의 『성교요지』가 가지고 있는 사료 비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66) 그 무엇보다도 역사가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집에 못지않게 수집만이 아니라 사료 비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몬시뇰은 마지막 단계인 사료의 종합, 즉 사실에 대한 해석 및 의미 부여에 대해서도 정리한다. 사료의 비판 역시 기초공사인데, 종합이야말로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다. 거기에 해석과 의미 부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 서술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 서술이란 바로 사실과 해석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역사 서술에서의 주관성과 객관성, 그리고 호교론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성 그리고 호교성이다. 물론 임의대로 하는 해석이나 호교적 태도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 서술에서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 호교적인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본다.”67)고 말하였다. 예를 들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학자들의 서술이 딴판으로 나타나는데, 양측에서 모두 호교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완전한 객관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역사가의 철학적, 종교적, 교회적인 견해는 최대한 객관성에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역사학에서처럼 가치의식을 그 인식의 기초로 하고 있는 학문에서는 도저히 주관적인 요소를 제외시킬 수 없다고 한다.68)

 

이에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에서 학문적 진리를 찾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1883년 교황 레오 13세는 처음으로 바티칸 도서관을 공개하면서 역사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역사의 첫째 법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아첨과 원한의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고, 어디까지나 사료에 의지하여 거짓과 허위사실을 반박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역사가가 지켜야 할 윤리의 문제”69)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오늘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몬시뇰이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하여 제시한 사료론은 그의 교회사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바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와도 서로 맞물리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교회사 연구를 위한 사료론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3) 교회사 연구의 세계화 지향

 

몬시뇰의 교회사관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그가 교회사의 토착화, 민족사에 대한 연구, 더 나아가 세계사 및 세계 천주교회사와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세계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교회사 연구에서 토착화는 우선 한국인에 의해서 한국인이 드러나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70) 그러나 그에게 토착화는 한국교회의 토착화 문제와도 맞물려서 다루어졌다. 그는 「동아세아에서의 교회의 토착화 - 한국교회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서 선교와 식민주의, 번역에 의한 토착화, 적응에 의한 토착화, 상황화에 의한 토착화라는 주제로 나누어서 자세히 검토하였다.

 

몬시뇰은 과거 선교사들이 저술한 교회사로 인한 식민주의적 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지인 교회사가들에 의한 교회사의 서술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71) 식민주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 시대의 유산과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72) 왜냐하면 제3세계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참된 의미의 교회사를 가지지 못했고, 서구 교회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교회사의 강의를 되풀이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번역은 최초의 토착화의 단계인 동시에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경우 적지 않은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지역의 문화보다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충실하려고 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문화와의 근본적인 만남이 없이 토착화는 이루어질 수없다고 말한다.73) 그런데 적응을 통한 토착화는 지역의 문화에 더욱 접근시킨다는 점에서 번역보다 진일보한 방법이라는 것이다.74) 이때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추구한 적응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 문화란 다름 아닌 서구문화였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상황화를 통한 토착화에 주목하였다.75) 번역과 적응이 지식의 추구 결과로 말미암아 얻은 신학자들의 업적이라면, 상황화는 구체적인 민중의 생활 속에서 체험으로 얻어지는 확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화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대화가 필수적이고 긴급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직자 지상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제휴할 위험성이 있다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성직자 지상주의가 오늘의 아시아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한국교회와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때문에 몬시뇰은 ‘한국교회는 토착화된 교회인가?’, 다시 말해서 ‘고유한 지역 신학을 가진 하나의 지역교회로 자처할 수 있는 교회인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서 던졌다. 그는 교회사 연구에서 토착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보았다. 자신이 참여하였던 4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희망은 기대 이상으로 실현된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였던 것이다.76) 그러나 한국교회의 토착화에 대해서 그는 지극히 부정적인 대답을 한 선교사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좀 지나친 말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문화와 역사의식이 크게 부족한 현상에서 볼 때 사실에 가까운 발언으로 볼 수 있겠다고 한다.77)

 

따라서 그는 한국교회는 진정으로 역사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는 서구교회들이 하는 말이나 신학을 더 이상 규범으로 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 정치적 · 문화적 · 종교적 요구, 한마디로 역사적 요구가 한국천주교회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실천을 좌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식 없이 지역교회들이 그들의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교회의 과거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이해는 비단 교회사 연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의 쇄신을 위해서도 필요불가결의 것이다.”78)라는 몬시뇰의 교회사관이 나오게 되었다. 교회의 쇄신과 교회사의 연구와 서술이 서로 매우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몬시뇰은 “토착화 없이 민족의 복음화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착화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긴급한 과제이다. 물론 토착화는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에서 비롯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토착화는 첫째로 교회의 본질에서 요구되는 것이지, 복음화의 수단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토착화가 되면 될수록 그만큼 복음화에도 기여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토착화는 복음화를 위해서도 시급하다는 것이다.”79)라고 정리하였다.

 

한편 몬시뇰의 토착화에 대한 강조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의 민족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의 사제서품 5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집의 제목이 『민족사와 교회사』인 것이 잘 말해주고 있지만, 일찍부터 그는 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의 ‘맺음말’에서 몇 가지 제언을 하였다. 교회사관의 문제, 그리고 사료 비판, 시대사의 확대를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교회사 연구가 좀 더 민족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80)고 말하였다. 교회사 연구와 민족사의 관계에 대해서 『나의 교회 나의 역사』에 실은 「천주교와 함께 역사의 지평에 떠오른 평민」81)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서 먼저 종교사적 측면이 중시되고 올바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사 역시 종교사의 민족사적 측면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종교사가 단순히 선교의 발자취를 밝혀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동시에 민족사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그 사회적 기능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사를 천주교 입장에서 살핀다는 것은 곧 한국사와 한국천주교회사가 서로 교섭하고 관계한 역사를 밝혀내는 일이고, 구체적으로는 한국사 발전에 있어서 천주교가 한 역할과 미친 영향 등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그는 일제시대 이후 현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제시대와 광복 이후 현대의 교회사는 아직도 거의 미개척분야이다. 다행히 일제강점기의 교회사 연구는 좀 추진되고 있는 느낌이지만, 광복 이후 현대의 교회사는 자료의 발굴이나 수집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어서 공백 상태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앞으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라는 시각에서 더욱 그것들과 연관해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와 민족, 교회와 사회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의 상호관계가 올바로 밝혀지면 그만큼 서로의 만남이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동시에 교회도 자신의 현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교회사에 대한 한국사의 인식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82)라고 하며 이들 시대와 관련해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와 민족사 연구의 만남을 추구하였다.

 

몬시뇰은 우리는 한국민족사와 한국 천주교사가 서로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충돌하였으며, 천주교회가 한국사회에 토착화함으로써 한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고, 실제로 기여한 사실을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한국 천주교사는 전횡적인 왕권과 가부장권을 상대화시킴으로써 한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교적 정교합일주의에서 정교분리에의 길도 열어놓았다고 보았다. 둘째로, 천주교회사는 인간 평등의 입장에서 인간의 품위를 의식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셋째로, 천주교는 당시 민중과 함께 천대받던 민중의 글인 한글을 교회의 공용어로 채용함으로써 한글의 품위를 높이는 동시에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천주교회사는 한국사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담당해 왔고, 이를 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한국사 발전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몬시뇰은 이러한 민족사적 입장에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몬시뇰의 교회사 연구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로만 그치지 않는다. 몬시뇰의 관심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세계화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주목하는 세계화란 한국천주교회사와 세계사, 그리고 세계천주교회사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교회사 연구와 세계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83) 그에 의하면 고대와 중세와 달리 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사와 세계사가 구별되었다고 한다. 이를 구세사로부터의 세계사의 분리, 그리고 교회로부터의 분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교회사의 세속화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그는 교회사의 속화 과정을 살폈으며, 이를 극복하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교회사 연구에서의 교회 개념의 분리, 신학적 전제가 거부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은 몬시뇰이 그토록 강조한 분류사 연구까지도 교회사 연구의 교회론적 지향과 관련시켜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교의신학자 콩가르(Y. Congar)에 의하여 성취된 교회 개념을 들어,84) 교회 개념의 심화가 교회사 연구의 심화를 가져오며 교의사나 전례사나 신심사와 같은 교회사에서 다루어야 할 분류사 연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였다. 이 역시 교회사 연구의 쇄신, 즉 구세사적 해석의 심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세계사 및 세계천주교회사와 결부되어 이해될 때 교회사 연구가 지향하는 선교사적 및 구세사적 의미도 올바르게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몬시뇰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세계화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85) 그는 민족사와 세계사와 구원사의 연관성을 주목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가 민족사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세계천주교회사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사가 세계사와 구별되는 점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사실 한국천주교회사를 세계천주교회사와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몬시뇰의 관점은 박사학위 논문의 저술에서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동아시아 교회사, 그리고 세계교회사로, 이는 다시 로마 교황청 및 여러 전교회와의 관계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이 서양과 접촉한 과정이나, 문화라든가, 서양인들의 한국인식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번역한 『세계공의회사』(2005)나 『세계교회사』(2001)를 통해서 파악할 수가 있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계교회사』의 경우 그가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에서 강조한 내용이 지적되고 있어 주목된다. 거기에는 “또한 역사적 사실의 개관에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신학의 주요한 흐름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86)는 교회사관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 역시 그가 교회사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신학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몬시뇰이 한국천주교회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세계천주교회사의 배경이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과거나 현재에도 한국천주교회사가 동아시아 천주교회사를 비롯해서 세계천주교회사의 이해에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세계천주교회사와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천주교회사 내에서 한국천주교회사의 위치를 찾으려는 데에 우선적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세계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그 방향성을 함께 두고 있다고 하겠다.87) 그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나, 세계천주교회사 연구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한국천주교회사의 체계적 이해

 

그러면 최석우 몬시뇰이 시대사 연구와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 통사의 저술에서 드러내고자 한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은 어떠한 것일까를 마지막으로 알아보자. 몬시뇰은 생전에 전문연구서를 포함하여 모두 13권의 저서, 18권의 번역서, 59편의 연구논문, 75편의 논고, 85편의 기고문을 발표했다고 한다.88) 이에 대해서는 현재 목록이 작성되어 나와 있다.89) 몬시뇰의 사후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번역이 나온 결과, 그의 교회사 연구를 모두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던 점은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몬시뇰이 통사에 대한 저술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방대한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통해서 그 전체의 흐름을 곧바로 정리하기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교회 나의 역사』에 실린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90)를 통해서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 장에서도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그의 체계적 이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시대구분론과 내용의 구성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살펴보면 그가 시대구분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부터 한국천주교회사의 시대구분론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한국천주교회사의 통사를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한 시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에 그 시대를 일본교회와의 접촉이 시작되는 1592년부터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대목구장의 입국으로 대목구의 존립이 확고해지는 1837년으로 한정시켜 잡았던 것이다. 즉 이러한 기간이 몬시뇰에게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하나의 시대로 파악되었다고 하겠다.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과 관련해서 하나의 시대를 설정한 몬시뇰은 그 범위 내에서도 다시 시기를 구분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의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이라고 제목을 붙인 다음, 그 시대를 ‘조선에 천주교를 도입하려는 초기 시도들’(1592~1783), ‘조선의 평신도 공동체(1784~1790)’, ‘박해들(1791~1802)’, ‘조선 교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도들(1802~1831)’, ‘조선 대목구의 초창기(1831~1837)’의 다섯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의 처음부터 한국천주교회사를 서술할 때 시대구분을 어떻게 하였으며, 개별 시대 안에서도 시기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몬시뇰은 분류사 연구를 통해서도 다양한 시대구분론을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검토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91)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통사의 경우에는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을 어떻게 시대구분하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시대구분론을 바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우선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그의 시대구분론을 보여주고 있다. 몬시뇰은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에서 ‘1. 준비시대(1592~1784), 2. 교회 설정과 교구설정(1784~1831), 3. 박해시대(1785~1881), 4. 개화기(1881~1910), 5. 일제 시대(1910~1945), 6. 현대(1945~현재)’ 여섯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시대를 구분하였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몬시뇰이 이원순 교수, 김진소 신부, 조광 교수와 함께 『한국 가톨릭교회사』라는 통사를 저술하려고 한 시대구분과 비교할 수가 있다.92)

 

제1편은 ‘천주교의 조선 전래와 초기 교회’인데, 가톨릭 신앙이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16세기 말부터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는 1801년까지가 해당된다. 한국교회의 여명기와 창설기라고 한다. 제2편은 ‘박해시대의 천주교(1801~1875)’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3편은 ‘개화기의 천주교(1878~1909)’로, 1878년 ‘문호개방으로부터 한일합방 이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고 부제로 밝히고 있다. 제4편은 ‘일제 시대의 교회(1910~1945)’로 설정되어 있으며, 제5편은 ‘현대의 천주교(1945~1998)’로 되어 있다.

 

제4편은 몬시뇰이 집필을 담당할 부분이었다. ‘일제 시대의 교회(1910~1945)’라고 설정되고 있는데, 이 시기의 교회사를 교회와 선교, 조직, 생활, 활동, 저항의 5개의 장으로 서술해 보려고 하였다. 그 구성을 통해서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제1장은 ‘교회의 선교활동’으로, 교세 발전의 요인들, 장애 요인들의 2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2장은 ‘교회조직의 발전’으로, 교구 행정과 교구의 증설, 신학교육, 교회 회의와 교회 지도서의 3개 절로 구분되고 있다. 제3장은 ‘교회 생활’로, 전례와 성사, 신심 운동, 수도 생활의 3개 절을 다루고 있다. 제4장은 ‘교회의 활동과 사업’으로, 교회의 문화활동과 교회의 사회활동의 2개 절로 나누고 있다. 제5장은 ‘교회의 항일운동’으로 교회의 수난과 교회의 저항의 2개 절로 서술하겠다고 한다.

 

두 개의 구성을 비교해 보면, 몬시뇰의 시대구분이 6개로 보다 많다. 이때 박해시대 이후의 4개 시대에 대해서는 모두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박해시대의 시작을 몬시뇰은 1785년부터 설정하고 있는데, 『한국가톨릭교회사』에서는 1801년의 신유박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또한 개화기의 시작을 몬시뇰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는 1881년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한국 가톨릭교회사』에서는 문호개방으로 설정하고 있는 데에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그 앞의 시대에 대한 설정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사』에서는 「천주교의 조선 전래와 초기 교회」라고 하여 하나의 시기로 묶었다면, 몬시뇰은 두 개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되었는가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교회와 교구의 설정을 독립된 시대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그가 일제시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서술하고자 한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교회론이 반영되어서 나온 시대구분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몬시뇰의 시대구분론은 교회론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과 함께, 교회론이라는 일관된 기준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시대구분을 설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 파악

 

몬시뇰이 이러한 시대구분론을 바탕으로 개별시기에 어떠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는가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통해서 그가 서술한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이 선교사에서 순교사 및 문화사로, 그리고 다시 민족사를 거쳐서 구세사적 접근으로 나아가고 있는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준비시대(1592~1784)93)

 

몬시뇰은 준비시대를 신앙의 여명기로도 표현한다. 그는 한국의 경우 교회의 창설은 20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16세기 중엽 이래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일본은 벌써 16세기 말엽에 수십만의 신자를 헤아릴 정도로 그 전성기를 구가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조선에 함께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가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선교사의 시도가 성공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민간인 포로들이 천주교로 귀의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으며, 이들 가운데 순교한 사람들도 나오게 되자, 일본의 선교사들은 자연히 이들을 통해서 조선에 복음을 전파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러한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몬시뇰은 중국으로부터의 조선 선교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당시 중국교회 역시 일본처럼은 아니더라도 예수회 선교의 영향 아래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에게 알려졌고, 이들이 북경의 성당을 찾아와서 선교사들과 서양문물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선교사들이 이러한 기회를 선교에 이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신들에게 과학서적과 함께 종교서적을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북경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직접 복음을 전할 생각을 가졌으며, 실제로 그러한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조선 선교 여부 및 가능성을 먼저 검토한 다음, 조선에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천주교가 수용되는가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북경을 통하여 조선에 전달된 천주교 서적들은 처음에는 학자들에게 순 학문적인 관심에서 애독되었으나, 1770년경부터 종교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서술한다. 홍유한을 비롯해서, 주어사의 강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토의하고 연구한 끝에, 나름대로 교리를 실천하면서 조선에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교회의 설정과 교구의 설정 시대(1784~1831)94)

 

몬시뇰은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조선에 교회가 설정되었다고 보았다. 이승훈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또 그들과 같이 주일이나 첨례를 지키기 위해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이리하여 조선 땅에 처음으로 천주를 찬양하는 신자 공동체, 즉 성서적인 넓은 의미에서의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탄생된 조선교회가 부딪힌 근본적인 문제점을 언급한다. 이른바 가성직제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조선의 신자집단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789년부터 북경교회에 밀사를 파견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이 북경 주교와 접촉하여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달하였으며, 조선교회의 이러한 사정이 교황청에까지 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북경 주교는 우선 조선에 중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를 1795년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자가 수년 만에 1만 명으로 불어났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그동안 조선교회가 이룩한 모든 발전이 폐허화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조선교회는 10년 만에 다시 일어났는데, 이때도 성직자의 영입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신자들은 서한으로나 밀사를 통해서 북경 주교와 접촉하는 한편, 자신들의 사정을 담은 서한을 교황에게까지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북경의 천주교회는 단 한 명의 선교사도 파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몬시뇰은 교황청에서 조선교회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을 위해서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섭을 시작하였으며,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함으로써 급진전되었다고 한다. 이에 교황청은 1831년에 조선 포교지를 조선교구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그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조선교회가 제도적으로도 거의 완전한 교회가 되었다고 규정한다. 즉 교회 창설에서 교구 설정의 단계로 조선의 천주교회가 발전했다는 것이다.

 

몬시뇰의 이러한 서술은 이후 논란이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창설과 교구의 설정에서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1784년과 1831년의 두 시기 가운데에서 어디에다가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95) 몬시뇰이 박사학위 논문의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필자가 보기에 1784년은 조선교회의 시발점이 아니다. (…) 필자는 1831년을 조선교회의 공식적인 시발점으로 본다. 이 해는 대목구가 설립된 때”로 보았기 때문이다.96)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과 이를 비교해 보면, 1784년을 성서적인 넓은 의미에서 교회의 창설시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그의 견해를 조금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1831년에 있은 교구의 설정이 가지는 의미를 조선교회가 제도적으로 거의 완전한 교회가 되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기본적인 입장은 변화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를 한국천주교회의 새로운 발전의 분기점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는 1784년이 일반적으로 교회가 시작한 때라고 한다면, 1831년은 법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완성된 시기라고도 표현하였다.

 

여기에는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방법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의 학위논문은 바로 선교사(宣敎史)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자신의 저서가 가지는 의의를 뮌스터 선교학 연구소의 평 - “보다 원사료에 의거한 선교사의 서술이 요구되고 있으나 유럽의 선교학자들이 언어의 장벽으로 포교지에 관한 원사료들을 가까이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선교사의 연구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때에 한 젊은 한국인이 이 임무에 착수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 한국 선교사에 관한 이 저술은 포교성성과 파리 외방전교회 등에서 발굴한 제1차 사료에 근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많은 새로운 사료들이 드러나고 있을뿐더러, 저자는 풍부한 한국사료들을 이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실과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97) - 을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몬시뇰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를 선교사의 관점에서 서술해 왔다는 사실은 다시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행한 이후의 교회사 연구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가지는 사학사적 의미는 사료의 수집 및 발굴과 관련해서 단순하게 살피는 것보다는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선교사 연구의 주제들과 관련된 것으로, 한국에 천주교가 어떻게 들어왔고, 누구에 의하여 수용되었으며, 어떻게 교회가 창설되고, 이어서 교구가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3) 박해시대(1785~1881)98)

 

몬시뇰에 의하면 조선의 천주교 신자집단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박해는 이미 신자 공동체가 탄생한 다음 해, 즉 1785년부터 시작되어 10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는데, 큰 박해만 4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몬시뇰의 박해시대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박해의 원인에 대한 견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는 조선정부가 박해를 일으킨 이유로 당쟁, 세도정치, 쇄국양이(鎖國攘夷) 사상과 같은 정치적인 원인도 있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인 이유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를 유교의 정교합일주의와 천주교의 정교분리로 구분하여 그 대립으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정교합일주의라고는 하지만 정치가 종교에 종속된 것을 말하며, 정교분리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서로가 대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견해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유교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바로 이러한 종교적 견해의 차이와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만을 대군대부로 섬기고, 따라서 국가나 국왕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같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종식되는가를 검토하였다.

 

몬시뇰은 100여 년에 걸친 박해 동안 순교한 신자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를 계속해서 다루었다. 박해 별로 그 숫자의 변화양상을 설명하면서 병인박해 때의 희생자가 이전의 다른 박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박해 별로 주요한 순교자와 순교지를 함께 주목하고 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어떻게 종식되었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고서 병인박해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가 그치지 않았는데 1881년에 있었던 척사윤음(斥邪綸音)에 주목하였다. 이번 윤음은 종전과는 달리 박해를 가열시키기는커녕 박해를 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정부가 개화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유학자들의 박해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를 금지했다는 것이다. 이에 교회는 무수한 순교자들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 100년 만에 세속 권력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4) 개화기(1881~1910)99)

 

몬시뇰은 한불조약의 체결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이러한 사실과 함께 병인양요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하였다. 그는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양국관계」에서 프랑스가 추진했던 포함외교(砲艦外交)의 목적이 영토적인 야심보다는 선교사, 즉 자국민의 보호와 통상요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때문에 그는 본격적인 식민지 확보정책인 제국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였다.100) 이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했던 한국천주교회의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 데에서 나온 견해가 아닐까 싶다.

 

몬시뇰은 개화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본당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이제 한국천주교회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먼저 선교활동의 중심역할을 하게 될 본당조직이 급속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공소 역시 무려 1천 개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1910년에 신자의 숫자가 7만을 넘게 되었는데, 병인박해로 인한 폐허 위에서 교회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 사실을 기억하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교구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교구의 중심인 서울에 주교관, 주교좌성당, 인쇄소, 고아원, 수녀원 등 교구의 기본적이고 필요한 시설이 착착 건설되었다고 한다. 신학교도 서울로 옮겨와서 한국인 성직자가 잇달아 배출됨으로써 본당의 증설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남녀 수도회가 처음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수도생활이 꽃을 피우게 됨을 알려준다고 한다. 이제 이들 수도회를 통해서 교회의 교육사업이나 자선사업이 활기를 띨 것이며, 간호학교와 사범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에 걸친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술에서 잊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업적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민족운동을 벌인 사실을 계속적으로 연구해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이 시기 교회사 연구에서의 민족사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교회 창설과 교구 설립의 시대만이 아니라, 개화기 및 일제시대에 대한 그의 연구는 그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안중근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이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몬시뇰은 개화기에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한국교회도 이러한 민족적 과제에 동참하고자 특히 교육과 언론활동을 통해 애국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1905년부터 시작한 학교설립의 붐을 타고, 천주교회에서도 많은 학교를 세웠는데, 그중에는 안중근과 같은 평신도나 본당 청년회에 의해 설립된 학교도 있다고 한다. 1906년에 발간된 『경향신문』 역시 참된 개화를 강조하면서 한국 국민운동을 계몽시키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평신도 중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특히 안중근은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에서 일제의 침략행위에 무력으로써 항거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다루어주었다.

 

(5) 일제 강점기(1910~1945)101)

 

몬시뇰은 이 시기에 교회가 민족과 함께 일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구와 본당 등 교회 조직 면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교구가 이제 6개의 교구로 증설된 사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때 연길교구와 전주교구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가 간도까지 진출했으며, 또한 전주교구의 경우 최초의 한국인 자치 교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구의 증설로 선교사가 크게 증원되었을뿐더러, 새로 여러 선교 단체들이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선교사의 증원과 한국인 성직자의 증가에 따른 뚜렷한 성과로 개화기의 한국천주교회처럼 본당과 공소의 놀라운 증가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낙후지역으로 남아 있던 모든 지역에도 복음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당은 170여 개로, 공소는 1,500여 개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 수도회들의 진출로 교회의 교육 · 의료 · 사회활동도 다양해지고 활발해졌다고 한다. 이리하여 처음에 7만 명이던 신자가 18만 명을 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개화기와 비교하면 미미한 발전이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한국천주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에 대해서 인원과 재원의 부족이란 대내적인 사정도 있겠으나, 역시 가장 큰 요인은 대외적인 것, 즉 일제의 탄압이었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매우 자세하게 『경향신문』의 폐간을 비롯해서, 일본인 교구장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일제가 한국천주교회를 탄압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몬시뇰은 개화기에 이어서 일제시대에 있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저항에 다시 주목한다. 일련의 일제의 탄압 앞에서 교회가 항거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3·1운동에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천주교 신자도 전국에서 53명이나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교세로 보아 그 비중이 적지 않다고 보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가톨릭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았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일자리를 잃게 된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한국천주교회가 일제에 충분히 저항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라도 저항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개화기나 일제강점기에 한국천주교회가 저항운동을 벌였다고 강조하며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그의 교회사 연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6) 현대(1945~현재)102)

 

몬시뇰은 8·15해방이 교회에도 해방을 초래하여 비로소 완전한 종교자유의 시대를 열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례없는 가혹한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히 6·25전쟁을 전후하여 주교와 신부,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가 체포되어 살해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동안 남한에서도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북한에 의해서 학살되었으며, 외국인 성직자들의 경우 이른바 ‘죽음의 행진’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몬시뇰은 휴전이 성립된 후 남한의 천주교회가 유례없는 발전을 해온 사실들을 서술하고 있다. 10년 사이에 40만의 신자가 불어났고,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한국천주교회는 완전한 자립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교구는 정식 교구로, 서울과 대구와 광주는 대교구로, 서울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국천주교회의 쇄신과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모국어의 미사 집전은 신자들의 전례 생활에 일대 전환기가 되었고, 평신도들의 활동도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교회일치운동도 활발히 진행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신·구약성서의 공동번역을 가장 획기적인 일로 평가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 점차 사회참여 의식이 고조된 것도 공의회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1981년과 1984년은 한국천주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그리고 교회창립 200주년 기념에는 교황과 함께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한국천주교회가 순교자를 성인으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1989년에 열리는 세계 성체대회 역시 쇄신과 발전의 또 하나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그는 선교 300년대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자신과 교회의 쇄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103) 쇄신만이 교회의 참된 발전을 보증해 준다는 것이다. 참된 발전이란 교회의 내적이고 영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한국천주교회는 외적 성장 못지않게 내적 성장의 모범을 보여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천주교회의 쇄신과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거기에서 그가 말하는 교회사 연구의 구세사적 접근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6. 맺음말 - 거듭해서 다시 읽기

 

지금까지 최석우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교회사관과 통사 저술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다루어보았다. 이를 통해서 그가 왜 그의 교회사 연구를 한국 천주교사라고 부르지 않고,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로 불렀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104) 교회사 연구방법론으로서 주장한 교회론이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몬시뇰이 얼마큼 교회를 사랑하며, 학문을 사랑하며, 학자로서의 길에 얼마나 일관되게 충실했는가를, 그 길을 통해서 사제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몬시뇰의 교회사관이 오늘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그가 앞으로의 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교회사 연구가 과연 신학의 영역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끄집어내어서 다시금 다루고 싶어진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누가, 어떻게 교회사를 연구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천주교 신앙인이, 신학을 배운 제대로 된 연구자가,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에 의해서 교회사가 연구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그것은 사제로서 그의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쩌면 지나친 바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견해가 혹시나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105)

 

다시 말해서 과연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신학적 기초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한국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정말 불교 신자였던 이능화와 같이 비신앙인은 한국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신학적 기초를 요구한다면 신학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평신도 연구자의 경우에는 어떡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현재의 여건을 고려할 때 어디에서 신학을 배울 수 있으며, 그때 이들 평신도 연구자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도 생기게 된다고 하겠다. 현재 여러 조건들로 인하여 평신도 연구자가 더욱 줄어들고, 성직자나 수도자인 연구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교회사 연구까지도 마치 이들의 전유물로 이해되고 있는 우려스러운 현상과도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몬시뇰이 교회사 연구와 관련해서 설명한 신학에 대해서도 막연한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와 관련해서 강조한 신학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 내용일까, 그것이 제대로 된 방향을 추구하고 있는가도 동시에 물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신학에서 분리되어 나온 역사학의 영역을 그러한 방법으로 신학과 다시 결합시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에서도 여러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에 나온 후카이 도모야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2018)는 신학과 역사학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에서 신학의 의미와 기능을 다시금 찾아보면서 교회사 연구가 신학과 역사학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새롭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회사 연구를 통해서 역사학과 신학이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와 신학의 결합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 특히 신과의 관련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역사연구에서도 그와 같이 신과 인간의 관계까지를 추구하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까지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상사 연구라는 연구영역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한 역사학자 손진태의 경우 문자와 유물이 아닌 제3의 사료로 보이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정신과 사상의 영역까지를 설정하면서 그러한 부분까지도 역사연구자들의 관심을 확대시켜 왔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역사연구를 통해서도 우리가 시대와 사회와 관련해서 추구해야 할 가치나 이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생각이 든다. 역사연구에서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인간의 이상을 추구하고, 사람답게 제대로 사는 세상을 바란다면, 교회의 이상과 역사의 이상 사이에서 서로 연결되는 공통점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역사학이 지나치게 강조되어도 안 되겠지만, 신학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읽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한국천주교회사가 더욱 풍성해지고 완전해지리라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러한 논란을 넘어서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대해서 필자뿐만 아니라 여러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이 새롭게,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강조하고 싶어졌다. 그는 사제로서나, 학자로서나 삶과 학문에서 많은 장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퇴근했다는 사실이나, 일관되게 자신만의 사관으로 교회사 연구의 길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존경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연구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료에 대한 중시에서도 그러하며, 통사, 즉 개설서의 서술에 대한 부분 또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선종 1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가 삶과 학문으로 보여주었던 덕목들이나, 관심을 가졌던 수많은 주제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서양사연구자인 양병우는 『역사의 방법』(1988)의 결론에서 사료는 사람에 따라 또 세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므로, 천 번 사용되고 난 책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가 있다. 그 어느 날 누가 처음으로 누구에게나 익숙했던 그 사료에서 새로운 사실과 관점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는 사료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연구에 대해서도 필요한 일로 생각한다. 언제나 새로운 연구자에 의하여 사람이나 연구가 새롭게,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필자의 경우 2004년과 2006년에 두 분의 한국사 선생님들이 세상을 떠나고서, 이분들이 연구하였던 주제나 방법이나 내용에 대해서 새롭게 논문 쓰기를 시도해 보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오늘의 한국사학에서 소홀히 되고 있는 연구사 정리와 더불어, 선학의 연구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도 후학들이 몬시뇰의 연구를 거듭해서 읽어나가는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갈 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제대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몬시뇰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도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참고문헌


1. 저서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신수판, 1991.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_____, 『나의 교회 나의 역사―고집쟁이 앤디 신부』,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_____,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_____,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_____, 조현범·서정화 역,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 2012.

A. 프란츠, 최석우 역,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개정 증보판, 2001.

 

2. 논문

 

김수태, 「최석우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와 역사』 319, 2001.

_____, 「이기백의 한국사 시대구분론―분류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31, 2015.

백병근, 「최석우 몬시뇰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 『교회와 역사』 422, 2010.

원재연, 「최석우 교회사학의 사학사적 의의」,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논총, 2014.

_____, 「최석우 교회사학의 사학사적 의의」, 『교회사연구』 43, 2014.

이원순 · 김진소 · 최석우 · 조광, 「『한국 가톨릭교회사』 서술 방향 (1) · (2)」, 『교회와 역사』 167·168, 1989.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사목』 34, 1979.

_____,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 1983.

_____,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제언 - 교회사와 교회학자 -」, 『교회와 역사』 169, 1989.

_____, 「한국교회사의 “세계화”를 위하여」, 『교회와 역사』 236, 1995.

_____,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_____,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2004.

 

………………………………………………………………………………………

 

1) 김수태, 「최석우 신부님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와 역사』 319, 2001, 49~52쪽.

2) 최석우, 「고집쟁이 앤디 신부」, 『나의 교회 나의 역사 - 고집쟁이 앤디 신부』, 1991, 4쪽.

3) 백병근, 「최석우 몬시뇰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 『교회와 역사』 422, 2010, 30~37쪽.

 

4) 최석우, 조현범 · 서정화 역, 「역자 후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 2012, 290~303쪽.

 

5) 원재연, 「최석우 교회사학의 사학사적 의의」, 『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 -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 논총』, 2014, 901~943쪽(이하 원재연, 「최석우 교회사학의 사학사적 의의」, 『교회사연구』 43, 2014 논문을 인용함).

 

6)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사목』 34, 1979 ; 『한국교회사의 탐구』, 1982, 235~236쪽(이하 『한국교회사의 탐구』의 쪽수를 인용함).

 

7) 최석우, 조현범 · 서정화 역, 앞의 책, 156~158쪽.

8)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699쪽.

9)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교회와 역사』 100, 1983, 9~11쪽 ; 『나의 교회 나의 역사』, 391쪽.

10)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28쪽 ; 「최양업」, 『나의 교회 나의 역사』, 91쪽.

 

11) 필자도 이능화, 최양업 신부 및 김대건 신부, 달레 신부, 구베아 주교 등의 교회사 서술들이 가지고 있는 사학사적 의미를 계속해서 다루어 왔는데, 이번에 몬시뇰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인용하지 못한 무지함을 알게 되었다.

 

12)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1~233쪽.

13)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3쪽.

14) 김수태(2001), 앞의 글, 49~50쪽.

15)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22쪽.

16) 최석우, 앞의 논문, 227쪽.

17)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699쪽.

18) 최석우, 「서언」,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1982, 5~6쪽.

19)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6쪽.

20)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716쪽.

21) 최석우, 같은 논문, 716쪽.

22) 최석우의 시대사 연구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는 원재연, 앞의 논문, 165~178쪽을 보라.

23)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2004, 24쪽.

24) 이원순 · 김진소 · 최석우 · 조광, 「『한국 가톨릭교회사』 서술 방향 (1) · (2)」, 『교회와 역사』 167·168, 1989. 4·5.

25)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5쪽.

 

26) 김수태, 「이기백의 한국사 시대구분론 - 분류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31, 2015에서 이기백의 통사 저술과 분류사 연구의 상호관계를 살핀 바가 있다. 이기백 역시 『한국사신론』의 저술을 위해서 다양한 분류사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몬시뇰의 그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27)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2~234쪽 및 236~237쪽.

 

28) 몬시뇰은 서양인들이 특수분야의 연구를 했다고 말한다. 특수분야에서 제일 먼저 소개된 것은 역시 한국의 언어와 문자로 파악하였다(최석우, 「서양에 비추어진 한국」, 『나의 교회 나의 역사』, 298~299쪽).

 

29)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4쪽.

30) 최석우, 같은 글, 4쪽.

31) 최석우, 같은 글, 4~5쪽.

32)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2쪽.

 

33) 최석우는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7쪽에서는 교구사와 함께 본당사 연구도 언급하였다. 교회사 연구를 위해서 그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34)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1쪽.

35)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2000, 한국교회사연구소, 3쪽.

 

36) 여기에서 그가 생각하는 연구자나,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는 자세히 논의하지 않겠다. 그것은 『나의 교회 나의 역사』에서 「사제와 학문」에 대한 편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살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7)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21쪽.

38)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2쪽.

 

39) 몬시뇰이 기존부터 강조해 오던 실증주의 역사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그의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한 토론이 본격화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원재연, 앞의 논문, 164쪽 및 181쪽).

 

40)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7쪽.

41)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6쪽.

42)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제언 - 교회사와 교회학자 -」, 『교회와 역사』169, 1989, 1쪽.

43)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717쪽.

44)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교회사연구』 23, 2004, 20쪽.

45) 이에 몬시뇰은 역사신학이란 용어도 드물게 사용하고 있다(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717쪽).

46)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7~8쪽.

47) 최석우, 같은 논문, 14쪽.

48) 최석우, 같은 논문, 20쪽.

49) 최석우, 같은 논문, 20쪽.

50) 최석우, 같은 논문, 21쪽.

51) 최석우, 같은 논문, 20쪽.

52)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6쪽.

53) 김수태, 「교회사 관련 사료의 새로운 인식」, 『한국교회사 연구자모임』 (2), 2013.

54)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695쪽.

55)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11쪽

56) 최석우, 같은 논문, 20쪽.

57) 최석우, 같은 논문, 21쪽.

58) 최석우, 같은 논문, 11~12쪽.

59)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2쪽.

60)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2000, 716쪽.

61) 최석우, 같은 논문, 2000, 695~697쪽.

62) 조현범, 앞의 논문, 300쪽.

63)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2쪽.

64)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6쪽.

65)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716쪽.

 

66) 『성교요지』에 대한 비판은 윤민구 신부에 의해서 정리되었다(윤민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 국학자료원, 2014).

 

67)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717쪽.

68)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12쪽.

69)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7~238쪽.

70) 최석우, 앞의 논문, 235쪽.

 

71) 서양인 선교사들의 역사 서술이나 한국인식에 나타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을 참고하라.

 

72) 최석우, 「동아세아에서의 교회의 토착화 -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466~469쪽 및 484쪽.

 

73) 최석우, 같은 논문, 469~473쪽.

74) 최석우, 같은 논문, 473~478쪽.

75) 최석우, 같은 논문, 478~483쪽.

 

76)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7쪽. 그러나 이에 대해서 원재연은 아직 교회사 연구의 진정한 토착화는 실현되지 못한 것 같다고 하면서 요원한 현실로 평가한다(원재연, 앞의 논문, 180~181쪽).

 

77) 최석우, 「동아세아에서의 교회의 토착화 -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484~485쪽.

78) 최석우,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술되어 왔는가?」, 236쪽.

79) 최석우, 「동아세아에서의 교회의 토착화 -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484~485쪽.

80)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학 어디까지 왔나?」, 396쪽.

81) 최석우, 「천주교와 함께 역사의 지평에 떠오른 평민」, 『청년』 15, 1981 ; 『나의 교회 나의 역사』, 147쪽.

82) 최석우, 「서언」,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2쪽.

83) 최석우, 「교회사 연구와 교회사 서술의 문제」, 15쪽.

84) 최석우, 같은 논문, 20쪽.

85)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세계화”를 위하여」, 『교회와 역사』 236, 1995, 1쪽.

86) A. 프란츠, 최석우 역, 『세계교회사』, 분도출판사, 개정 증보판, 2001, 552쪽.

87) 이기백, 「서장」, 『한국사 신론』, 일조각, 신수판, 1991에서 다루어진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문제를 참고할 것.

88) 백병근, 앞의 논문, 33쪽.

89) 원재연, 앞의 논문, 185~192쪽.

90) 최석우,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 『나의 교회 나의 역사』, 1989, 

91) 때문에 여기에서는 통사의 서술과 관련된 몬시뇰의 시대구분만을 다루었다. 

92) 이원순 · 김진소 · 최석우 · 조광, 「『한국 가톨릭교회사』 서술 방향 (1) · (2)」, 『교회와 역사』 167·168, 1989. 4·5.

93) 최석우,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 251~253쪽.

94) 최석우, 앞의 논문, 253~254쪽.

 

95) 조현범, 앞의 논문, 299~230쪽에서는 “아마 ‘공식적인’이라는 구절에 방점을 찍어서 해석해야 할 듯하다. 어쩌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좀 더 유연하고 역동적인 교회 개념이 제시되기 이전에 나온 논문이었기에 지역교회의 시발점을 논할 때 제도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였던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편 원재연, 앞의 논문, 163~164쪽에서는 “최 몬시뇰은 1961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한국교회사의 공식적인 시점을 1831년이라고 주장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 그가 선종할 때까지는 이와 같은 주장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고, 1784년 이승훈에 의한 ‘세례 공동체’의 탄생을 한국교회의 시점(시작)으로 규정”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몬시뇰은 두 단계를 설정하고, 그것이 가지는 각각의 의미를 일관되게 살피고 있다고 하겠다.

 

96)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 156쪽.

97) 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2000, 700쪽.

98) 최석우, 같은 논문, 255~256쪽. 

99) 최석우, 앞의 논문, 256~258쪽.

100) 최석우,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양국관계」, 『한국교회사의 탐구』 Ⅱ, 1986.

101) 최석우,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사」, 258~260쪽.

102) 최석우, 앞의 논문, 260~261쪽.

103) 최석우, 「한국 천주교의 어제와 오늘」, 『나의 교회 나의 역사』, 1989, 250쪽.

 

104) 이러한 점에서 최석우와 조광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가 가지는 차이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조광은 박사학위 논문인 「조선 후기 천주교사 연구」(1988)부터 정년과 함께 펴낸 『조선 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2010)와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2010)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일관되게 한국 천주교사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105) 원재연 역시 “최석우 몬시뇰이 평소에 강조하던 구세사적인 전망에 대한 논의도 부족할뿐더러”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원재연, 앞의 논문, 180~181쪽).

 

[교회사 연구 제55집, 201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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