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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가문의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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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5 ㅣ No.1135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 가문의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

 

 

최양업 신부의 활동 가운데 한국천주교회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실은 새롭게 주목받아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서한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 다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수집과 정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자기 가문의 순교사, 즉 1839년에 순교한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에 대한 전기를 구체적으로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 가문의 신앙전통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박해시기 신자들이 신앙실천을 위해서 선택하였던 삶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신자들의 고민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말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순교자전기 서술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준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Ⅰ. 문제의 제기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은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의 입국 이후로 이해하고 있다.1)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직접 수집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아마도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801년에 저술된 《황사영 백서》에 더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동안 《황사영 백서》는 그 구성상 네 번째 부분에 해당되며, 전체의 1/5도 되지 않는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에 집중적인 관심과 논란이 있었다. 이와 달리 약 70%에 달하는 분량을 차지하는, 정작 중요한 두 번째 부분인 ‘신유박해의 발단과 그 진행과정’과, 세 번째 부분인 ‘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순교자들의 열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중심으로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백서에 서술하였던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이들 내용에 대해서도 검토되기 시작하였는데,2) 이는 올바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황사영 백서》는 한국인 천주교 평신도에 의해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순교사 저술로 불릴 수 있다.3)

 

황사영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한국인 신자들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졌다. 그 10년 뒤인 1811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4) 그러나 그것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아마도 기해박해시기로 생각된다.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자 한국인 신자들이 그의 뜻을 따라 순교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전체 순교의 역사가 아니라 처음과는 그 방향을 달리하여 기해박해에 국한되어 나타났다. 왜냐하면 최영수가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1840년경에 초고를 만들었는데, 1841년에 현석문이 이를 수정 · 보완하여 완성한 《기해년 치명일기》(즉 《기해일기》)가 신자들에게 보급되었기 때문이다.5) 따라서 기해박해기는 신유박해기에 이어 한국천주교회사의 순교사 저술에 중요한 한 분기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이후 여러 차례 정리되었다. 우선 김대건 신부에 의하여 1845년 서울에서 작성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들 수 있다.6) 이 보고서는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순교사는 ‘조선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의 두 내용을, 순교자들 부분에서는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순교자들의 숫자는 《기해일기》와 달리 33명으로 축소되어 기록되고 있는데, 여기에 서술된 내용은 《기해일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보고서가 지니는 독자적인 가치는 1839년까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다룬 첫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간략하지만 당시까지의 교회사개설이라는 점에서 그 나머지 본문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7)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에 기해박해만이 아니라, 그 해 일어난 병오박해의 순교자들까지를 함께 다룬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로 만들었다. 이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이때 기해박해의 순교자들은 《기해일기》와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의 두 자료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리되었다.8) 그리고 이들 자료는 홍콩에 머물고 있던 최양업 부제에 의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1847년에 파리의 외방전교회를 거쳐 교황청에 제출되었다. 그 결과 1857년 9월에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기해 · 병오박해의 순교자 82위는 가경자로 선포될 수 있었다.

 

그런데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에 대한 정리와 관련된 최양업 신부의 활동 역시 새롭게 주목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9) 그의 활동이 단순히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에 다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나름대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그는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수집과 정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활동은 그의 서한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역시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황사영이나 현석문과 같은 평신도나, 프랑스 선교사가 아니라 이제 한국인 사제들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이해는 특히 자기 가문의 순교사에 대한 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에 대한 전기를 새롭게 저술하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해박해의 순교자로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인물로서, 그의 먼 친척인 최해성에 대한 전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술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양업 신부가 시도한 가문의 순교사 정리는 그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는 측면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인 최희정의 부인인 이 마리아와, 둘째 동생인 최선정은 최경환과 이성례의 신앙에 대해서 증언을 했다. 셋째 동생인 최우정의 아들인 최상종은 〈최 바시리오 이력서〉 및 〈최 신부 이력서〉를, 넷째 동생인 최신정의 부인인 송 아가다는 대필한 〈송 아가다 이력서〉를 통해서 자기 가문의 신앙의 역사를 정리하였던 것이다.10) 그러므로 개별 가문의 순교사 및 신앙의 역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최양업 신부 가문의 천주교 신앙에서 나타나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이 글에서는 최경환 가문의 여러 자료들 가운데에서 최양업 신부가 그의 편지를 통해서 언급한 부모에 대한 전기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봄으로써 최양업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알아보고자 한다.11) 이때 그 내용을 이전에 나온 《기해일기》 및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등의 내용과 비교해봄으로써 최양업 신부가 자기 가문의 삶과 신앙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의 저술과 뒤이어 나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술과의 차이점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최양업 신부의 편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새롭게 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Ⅱ. 순교사 연구에 대한 깊은 관심

 

최양업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그의 편지들을 통해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12) 1843년에 들어와서야 부모의 순교 사실을 알게 된 최양업 신부가 이를 처음 언급한 것은 1844년 5월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통해서였다.13) 최양업 신부는 부모 및 부모와 함께 있다가 죽거나 많은 고통을 당한 다른 형제들을 따라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도, 또한 그를 만회할만한 커다란 공훈도 세우지 못한 사실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부모의 이러한 순교가 그로 하여금 순교사에 깊은 관심을 갖는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1847년의 네 번째 편지에서는 1846년의 병오박해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죽음을 먼저 언급한 다음,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기록하여 보내준 《기해 · 병오 박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이 그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14)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그것에만 머물지 않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자료가 로마에 전달되어 로마 교회 역시 한국의 순교자들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순교사에 대한 관심은 조선에 들어온 이후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1850년 조선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보낸 일곱 번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신앙의 자유가 조금도 없는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을 먼저 전한다.15) 전국적인 박해는 없으나 부분적인 박해는 결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라는 한 처녀를 통해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여러 성인전 및 조선의 여러 순교자들의 행적과, 그 밖에 한글로 된 신심서적들을 암송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당시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1851년에 보낸 여덟 번째 편지에서 그는 순교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16) 페레올 주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한 그의 불만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는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한국 순교사의 이해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그는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정리함으로써 그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현석문이 앵베르 주교의 명을 받아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기해일기》가 이 책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양업 신부는 앵베르 주교가 현석문에게 올바른 서술을 위해서 순교자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수집하도록 특별히 당부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앵베르 주교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여러 신자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그중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기록한 것이라고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이야기들에 대한 목격자들이나 증인들이 별로 없는 것이 커다란 문제라는 것이다. 아직도 모든 증인들을 통하여 조사해야 하거나 더 정확히 심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의 중요한 바탕이 된 《기해일기》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불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올바른 순교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목격자와 증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순교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더 나아가 최양업 신부는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라는 이 작은 책의 끝 부분에 가면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어떤 것은 아예 몽땅 빠진 점도 상당한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순교자들의 시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내용이 간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정리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부모에 대한 기록을 그 한 예로 들고 있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면 아버지 최경환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어머니인 이성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경환의 경우 《기해일기》의 그것과 비교할 때 매우 소략한 내용으로 순교사실만을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성례는 《기해일기》와 달리 순교 사실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그렇게 빠진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완전한 역사를 위해서나, 신자들의 교화를 위해서 재미있고 중요한 것이 적지 않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올바른 순교사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다. 완전한 역사가 되어야 하며, 신자들의 교화라는 목표를 함께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비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의 서한에서는 최경환이 곤장으로, 이성례는 참수된 순교사실만을 매우 짧게 언급하였다.17)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수리산의 신자들이 체포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최경환과 이성례에 대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제 혹은 주교에 의해 시도된 순교사 정리에서 자기 가문의 순교사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기존의 이해와 다른 순교사 저술을 새로이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닐까 한다.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국에서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그 내용에 대하여 더 정확히 써서 새로이 보고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자신의 조상들의 순교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오랫동안 맹세해 온 서원이기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구전으로나, 기록만이 아니라, 목격자와 증인들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서술된 새로운 순교사가 최양업 신부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완전한 순교사라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한 이후 바로 이 일을 하지 못하였다. 우선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려고 힘썼으나, 성무를 집행하느라고 항상 바빠서 휴가는 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851년에 들어와서 다행히 공소 순방을 일찍 마쳐서 잠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무렵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사목을 하면서 꾸준히 확보한 수많은 증언들을 바탕으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정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정확히 기록하려 한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한다. 자신의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들도 포함하여,18) 순교자들과 함께 살았던 증인들, 또한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서나 형벌을 당할 때 함께 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증언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전에 살았던 생활에 관한 증언들을 포함하여 최양업 신부 자신까지 증인이 되어 가능한 대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충실하게 서술하도록 제 능력껏 힘쓸 작정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의 순교자 전기를 가장 먼저 서술함으로써 그가 어떠한 순교사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에 실려 있는 최경환과 이성례에 대한 순교전은 그가 지향한 순교사가 무엇인가를 잘 반영해주는 것으로 파악된다.

 

최양업 신부는 1855년에 보낸 열한 번째 편지를 통해 르그레즈아 신부가 그에게 명령한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19) 르그레즈아 신부는 최양업 신부에게 그의 부모, 즉 최 프란치스코와 이 마리아의 순교행적에 대해 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이성례가 누락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부모의 체포, 투옥, 고문, 문초, 순교 등에 관한 모든 경위를 더 자세하고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그 증인들을 두 명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미 보고한 것보다 자세한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경환이 순교할 때 함께 감옥에 있었던 사람의 새로운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를 통해서 최경환의 배교자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성례의 경우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 가르쳤던 예비자 한 명이 형장에 따라가 목격한 사실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부모의 무덤에 대한 문제를 끝으로 말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즈아 신부로부터 받은 두 번째 명령은 부모 이외에 또 다른 순교자들과 그 밖의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해서도 적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는 글로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들을 많이 찾아내기는 하였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보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후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면 빠뜨리지 않고 알리겠다고 대답하였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6년의 열두 번째 편지에서도 르그레즈아 신부가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 만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라고 한 사실을 상기시킨다.20) 그래서 그는 그런 사건들을 계속해서 수집 중에 있다고 전한다. 그 경우 대체로 필요한 증인이 없어서 확증된 것을 많이 수집하지는 못한 형편도 함께 말한다. 여전히 증인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 한 명을 새로이 찾아낸 사실을 그 자세한 내용과 함께 보고하고 있다. 그에 대한 구술내용을 적어놓은 종이를 발견하였는데, 아버지, 아내, 아들, 친구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순교에 대한 증명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최해성 요한이었다. 그는 최양업 신부의 먼 친척이었지만 이 보고에서 그러한 사실은 밝히고 있지 않다. 이 밖에 최양업 신부는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많으나 아직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하고 하면서,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게 되는 순간에 더 자세히 보고할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최양업 신부가 순교자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매우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1857년에 보낸 최양업 신부의 열세 번째 편지를 보면 이때 최양업 신부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21) 그는 지난번 편지에서 약속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순교사를 서술하는 것이 이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그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넘겼다는 것이다. 그가 아니라, 다블뤼 주교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에 대한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앵베르 주교가 시도했던 것처럼 당시까지의 순교사 전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블뤼 주교가 앞으로 파리에서 그 사적들을 읽을 수 있도록 보낼 것이 확실하므로 그가 따로 보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 날에 계속해서 보낸 열네 번째 편지에서도22)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1856년부터 다블뤼 주교가 정식으로 순교자들의 행적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일어난 변화였다. 그동안 순교사와 관련된 일을 해오던 최양업 신부에서 다블뤼 주교로 왜 갑자기 교체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어머니 이성례의 순교사실과 관련된 논란이 거기에 작용하였던 것인지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에게 그 일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한의 내용들을 통해서 볼 때 최양업 신부가 순교사에 대해 변함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해준다.23) 따라서 그의 순교사 저술을 위한 노력은 비록 중단되었지만, 다블뤼 주교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술을 위한 자료수집에 최양업 신부의 노력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기억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1859년에 보낸 열일곱 번째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1857년에 82명의 가경자가 선포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24) 그는 조선의 순교자들이 온 세계에 가경자로 선포된 소식이 지극히 기쁜 소식이고, 더할 수 없는 큰 위로라고 말한다. 그는 사제로서 아버지를 가경자로 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지향은 “언젠가는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적으로 공경을 받으시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되겠습니까?”라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 성인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때문에 최양업 신부는 아직까지 조선 순교자들의 전구로 공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실을 크게 아쉬워하였다. 그것은 성인이 탄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원인을 아마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우리의 정성이 미약하고, 우리가 순교자들에게 전구할 줄을 몰랐고, 또한 그것을 우리 신자들을 계몽시키는 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하여 어떤 기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신빙할만한 증인이 없어서 분명하고 확실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그는 앞으로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전구를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기적을 얻도록 가르치면서 순교자들을 더욱 열절하게 공경하도록 인도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가 첫 번째 편지에서 성인의 유해를 얻기를 바란 것에서 볼 수 있듯이,25) 그만큼 한국 천주교회에 성인이 탄생하기를 간절하게 지향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그 위치를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되기를 바란 최양업 신부의 지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순교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Ⅲ. 최경환 · 이성례전의 저술

 

현재 최양업 신부가 한국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가진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필 수 없다. 때문에 최양업 신부가 새롭게 저술한 자기 가문의 순교사 내용을 통해서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밖에 없다. 최양업 신부는 여덟 번째 편지에서 아버지인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에 대한 순교자전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6) 그러한 이해가 그 이전의 서술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검토함으로써 최양업 신부의 저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문의 신앙전통 강조

 

최양업 신부의 순교자전에서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가문의 신앙전통을 강조한 점일 것이다. 그는 첫 부분에서 《기해일기》나,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27) 달리 부모의 출신지인 청양 다락골을 말하고 있지 않다. 《기해일기》에서는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서울 근처라고 혼란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기해일기》는 최경환과 같은 홍주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이 서울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통해서 다락골이 최경환의 고향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28)

 

그러나 《기해일기》와 달리 최양업 신부는 자기 가문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최경환전에서는 부계의 신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친지 중에 세력 있는 고관이 있다는 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양반 신분임을 드러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자기 가문의 신분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는데,29) 그것이 천주교 신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인 이성례가 조선의 저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 명 배출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최양업 신부가 부계 보다 모계의 신분을 오히려 높게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는 어머니 가문의 신분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 보다는 어머니 가문의 인물인 이존창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깊은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 가문과 이존창의 밀접한 관계를 크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논란이 있지만,30)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를 이존창과 같은 경주 이씨 출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임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모계를 통해서 자기 가문과 이존창의 관련을 확인한 최양업 신부의 서술 가운데 크게 주목되는 내용의 하나는 이존창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이씨 가문에서 나온 그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 이존창이라는 것이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이존창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사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존창이 첫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가 복음을 전하려 조선에 오기 전까지 시골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제의 직분을 행한 분이었다고 말한다. 이존창의 생애 가운데에서도 사제로서 활동한 사실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존창이 사제가 된 것은 1784년 이벽의 부탁을 받아 북경에서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이존창 등 여러 사람들을 사제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이존창 집안의 딸들에게서 자신과 김대건 신부라는 두 명의 사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가문이 한국 천주교회를 성립시킨 중요한 역할을 한 이존창과 밀접히 연관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이존창이 맡았던 사제직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그가 사제가 된 의미를 여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앙이란 단순히 자기 가문만의 그것만이 아니라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과 밀접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가 이존창을 순교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존창은 후에 이와 같은 일이 잘못됨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영화로이 순교하였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존창이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존창의 죽음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새로운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황사영 백서》에서 이존창이 아직 배교 중에 있으며 순교하였는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한 이해와는 커다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이존창의 배교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양업 신부가 당시 이존창의 순교 여부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 이존창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양업 신부가 이존창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한 것은 역시 여러 증언들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한 이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양업 신부는 이존창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면서, 부모의 죽음 역시 그러한 순교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자기 가문이 천주교를 언제 어떻게 수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가 신자였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최인주가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고초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줌으로써 그 이전에는 이미 신자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주목한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천주교 신앙이었다. 그가 이들에 대해서 고결하다고 언급한 것은 그들의 남다른 신앙심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은 《기해일기》와 다른 부분이다. 거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양업 신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천주교 신앙을 크게 강조한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할머니의 신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최인주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매우 인상 깊게 설명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웃사랑과 평등의 추구였다. 최인주의 이웃사랑은 애긍과 화목으로 또한 구분되어 언급되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가 유별났으며,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화목의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최인주가 평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최인주가 신분이나 계급이 이웃 사랑에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최인주가 하느님 안에서 모두 같은 한 형제자매라는 이상을 추구한 것으로, 그가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신앙 안에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인주가 자식들에게 스스로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31)

 

사실 이것은 최양업 신부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부분이다. 최양업 신부가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들 중에서 신분과 계급의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이다. 그리스교의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되고 있다”고 하면서32) 이러한 폐단의 시정을 요구한 일에서도 잘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신자들까지도 그러한 상태에 놓인 것을 고려할 때 그의 할아버지인 최인주는 신자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표현을 따른다면 최인주는 이웃에 대한 형제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전을 서술하면서 이를 먼저 기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최인주의 천주교 신앙이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최양업 신부가 최경환과 이성례의 삶과 신앙과 관련하여 들고 있는 많은 사례들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과 이성례 모두 자신의 가문이 추구해온 신앙전통을 잘 이은 인물임을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2. 신앙실천의 새로운 길 제시

 

최양업 신부의 순교자전에서 또한 들 수 있는 사실은 박해가 닥친 이후 일어난 자기 가문의 움직임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신앙실천의 길을 새롭게 걸어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는 가문의 신앙전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문에도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음을 전한다. 그 결과 배교까지는 아니더라도 냉담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기해일기》의 최경환전에서는 가산의 부유함이 원인이라고 하고, 이성례전에서는 친척들의 번성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부모에 대한 순교자전을 통해서 1801년의 신유박해와 주문모 신부의 순교 후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의 상종으로 말미암아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갔다고 이해하였다. 1791년과는 달리 최경환 가문이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의 어려움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밝히고 있듯이 주문모 신부까지 순교한 상태에서 최경환 가문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 신자로서 최경환의 역할이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아버지 최경환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다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최경환이 가문의 신앙이 냉담해진 상황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소년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한 최경환이 나이가 들면서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상태를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최경환이 자기 가문의 신앙적 위기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최경환 가문의 천주교 신앙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인 ‘버리고 떠나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최경환이 가족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성례전에서는 이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에 의하여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앙이 새롭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최경환 가문이 고향인 다락골을 떠나 시작한 서울 시절에 대해서는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는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해일기》의 최경환전에서는 서울로의 이주 배경이 간략하게 언급된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고 최경환이 한 편지로 이별을 말하고 집을 나간 사실과, 이후 집안사람들이 편지를 보고 마음이 크게 감동하여 즉시 그를 찾아 한가지로 상의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최경환이 이주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여러 형들이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말하는 등 최양업 신부가 저술한 최경환전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최경환전은 이러한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최경환이 아버지 최인주가 살아 있을 때 부모와 형제들에게 권고하여 가문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자고 여러 차례 졸랐음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최경환이 혼자서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등 우여곡절 끝에 25명이나 되는 가족 전체는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서울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가문이 왜 서울이라는 장소를 선택하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서울이 청양보다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경환전은 최경환의 서울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최경환의 서울 집이 천주교 신자들의 중요한 모임 장소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해일기》에서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신자들이 최경환의 서울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간에 대해서는 수년 동안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최양업 신부의 최경환전에서는 3년이 지나자 이웃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설명해주고 있다. 이제 최경환 가문이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최경환은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최경환 가문은 최경환의 의사를 받아들여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서울로 옮겨왔지만 말 그대로 아직도 고향과 재물과 친척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최경환이 고향을 왕래하면서 남은 재산을 관리했다는 다른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33) 여전히 고향과의 관련성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점은 최양업 신부에 의해서도 약간 혼란스럽게 언급된다. 최경환전과 달리 이성례전에서는 서울시절을 언급하지 않은 채 산속으로 이주해가면서 그렇게 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해일기》의 내용과 공통적인 것이다. 서울로 갈 때에는 가산을 흩어버렸으며, 산중에 들어가면서 가산을 모두 다 버린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 역시 최경환의 산골 이주를 설명할 때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해일기》와 달리 최양업 신부가 저술한 최경환전에서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더 알려주고 있다. 비신자 이웃에 의하여 최경환 가문의 사람들이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했을 때 친지 중에 세력 있는 고관들이 최경환에게 비신자들의 술책에서 집안사람을 구출한 방법으로 그 주동자를 중하게 처벌하자고 제안하였다. 고관들까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최경환 가문의 신앙생활로 상당한 물의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최경환 가문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경환은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거부하고 산속으로의 피신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이 역시 청양에서 서울로의 이주와 마찬가지로 최경환이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신자들이 산골로 이주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는 그의 일곱 번째 편지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34) 다락골과 같이 평야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비신자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신자들은 거의 모두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산속에서도 그들은 오래 살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신자로 살면 점차 비신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게 되자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에게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보았을 것이다. 최경환 역시 조선의 중심인 서울이 아니라 완전히 주변지역인 산속으로 피신하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보다 더 확고한 신앙생활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비신자들로부터 당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한편, 신자들로만 구성된 교우촌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최경환은 천주교 신앙을 위해서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포기해야만 했다. 최양업 신부는 여덟 번째 편지에서 최경환이 옮겨간 여러 지역들을 소개하고 있지 않으며 한꺼번에 묶어 산골 시절로 정리하고 있다.35)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에 실린 최경환전과 이성례전은 이러한 산골시절의 천주교 신앙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최경환 가문의 산골생활이 서울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최경환 가문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 자갈 밭을 개간하여 연명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 자발적인 포기와 가난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지만, 모든 것을 자진해서 버리고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경환은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든, 어쩔 수 없이 다가온 고통이든 간에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일은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 때문에 절망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보다는 하느님이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자신들을 어떠한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더욱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최경환의 놀라운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산골시절 최경환이 보여준 신앙생활을 매우 인상 깊게 서술하고 있다. 최경환이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아침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는 신앙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최경환이 비록 한문교육을 별로 받은 바가 없었으나 자주 깊이 묵상하고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자신들이 바라던 것처럼 서울을 떠나 산속으로 옮겨가 생활하면서 보다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산골시절 최경환의 신앙심이 성숙되면서 나타난 또 다른 양상으로 그가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최경환이 얻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신부가 그 열심 성실함과 도리에 명백함을 아름다이 여기시어 회장으로 차정하심에 모든 이가 탄복하는 바이러니, 마귀의 투기함이 심하여 이상한 소리와 자취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요혹하게 함에 프란치스꼬도 영적(靈蹟)으로 알고 의심하여 해혹(解惑)하지 못하더니 주교가 들으시고 마술로 결단하시고 효유하시니 명령을 들은 후 즉시 청명(聽命) 순종함에 형적이 아주 없더라.

 

《기해일기》는 수리산 시절 최경환이 한때 마귀의 홀림에 빠진 적이 있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에 실린 최경환전에는 생략되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이 하느님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를 간단하게 지적함으로써 최경환이 그가 즐겨한 묵상을 넘어서 이제 관상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와 함께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의 신앙이 스스로에게만 한정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그가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섰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는 최경환의 신앙이 단순히 교리지식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고 삶으로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하였음을 전해준다. 최경환이 묵상과 신심서적을 통해서 열렬한 애덕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경환의 애덕 실천은 다락골 시절의 최인주가 보여주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락골 시절에는 최인주가 가지고 있던 풍부한 재물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골시절 최경환의 사정은 그와 전혀 달랐다. 최경환이 가난한 가운데 애긍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가 가진 많은 것을 나눈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작은 것까지를 다시 나누고자 한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 준 것이었다. 이는 최경환 가문이 추구한 애긍의 정신이 새로운 형태로 발휘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 마침내 아버지가 수리산 시절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회장이란 그와 같이 신앙의 올바른 모범을 보인 사람만이 임명되어야 함을 시사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양업 신부가 최경환이 산골시절 성인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였음을 전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최경환이 성인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름으로서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최경환이 그리스도와 성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전을 통해서 산골 시절이 최경환 만이 아니라 이성례의 신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을 알려준다. 《기해일기》에 의하면 이성례는 결혼하기 전에는 천주교를 믿고 있었지만 도리에 밝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최경환전에 의하면 심문을 받던 최경환에게 신심서적을 읽히게 한 관원들이 이성례에게도 그 책을 읽으라고 했는데, 그녀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대답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이성례가 글을 모른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는 좀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성례 역시 천주교 신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은 그녀의 셋째 아들인 최선정의 증언에 의하면 한글로 된 신심서적이었기 때문이다.36) 이성례가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으며, 또한 최양업 신부의 열한 번째 편지에 보이듯 그녀가 감옥의 하인 한 명을 가르쳐 예비자로 만들 정도였다는 사실에서 달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최경환과 마찬가지로 산골시절의 생활을 통해서 이성례의 신앙이 크게 달라지는 계기를 맞이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기해일기》의 내용 역시 그 대부분 산골시절 이후 이성례의 신앙을 전하고 있다. 《기해일기》는 이성례의 신앙을 여러 모습으로 전한다. 기쁨의 신앙을 그녀 역시 추구하고 있음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 역시 최경환과 마찬가지로 이성례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고통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하였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고 말한다. 《기해일기》에서도 이성례의 애긍을 말하고 있는데,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가 그녀를 체포하러 온 포졸들에게 베푼 애긍사실을 새롭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기해일기》는 이성례가 그리스도와 성인의 길을 따르고자 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전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으며, 최경환전에서만 이를 기록하고 있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전에서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이성례가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할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다는 것이다. 이때 그녀가 아내는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자식들과 함께 화목하게 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례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가정의 모범을 추구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성례가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다. 최경환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이것은 최양업 신부가 이성례를 통해서 최경환 가문이 순교의 길을 어떻게 선택하고 준비하고 있는가를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산골시절 최경환 가문의 신앙실천에 있어서 최경환만이 아니라 이성례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서술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3. 배교와 순교의 의미 모색

 

최양업 신부가 부모에 대한 순교자전을 서술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이들이 체포된 이후 순교하기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최경환전과 이성례전이 실려 있는 여덟 번째 편지만이 아니라, 열한 번째 편지에서도 이 부분을 크게 주목하였다. 그는 이를 체포, 투옥, 고문, 문초, 순교 등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이는 《기해일기》의 내용과도 크게 차이가 난다. 최경환의 경우 최양업 신부가 쓴 최경환전과 그 구성이 비교적 같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에서는 매우 소략하기 때문이다. 이성례의 경우에도 고문을 받게 된 때부터 다루고 있는 것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부모들이 어떠한 고민을 하였고, 어떠한 태도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순교행적에 대해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최경환전에서는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최경환이 보여준 새로운 애덕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최경환의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그가 순교자의 유해를 수습한 일이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 서울에서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되었는데, 신자들이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최경환은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순교자의 유해에 대한 관심은 최양업 신부에게서도 찾아진다. 그는 열한 번째 편지에서도 부모의 시신과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37) 최경환의 시신은 아들과 친척들이 다 찾아서 매장하였으며, 신자들 무덤 사이에서 똑똑히 구별할 수 있게 묻혔다는 사실을 새로운 증언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성례의 시신은 함께 참수된 동료 순교자와 묻혔는데, 비신자들이 무서워서 밤중에 비신자들 무덤 사이에 묻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무덤이 어디인지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무덤에 대한 언급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매장한 최경환과 마찬가지로 최양업 신부의 순교자 유해에 대한 공경과 연결시켜 이해할 측면이 있을 것이다.38)

 

한편 최경환이 순교를 맞이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가문의 냉담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향과 재산을 버렸던 최경환은 여러 차례의 이주를 통해서 박해를 피해 다녔지만, 이제는 그것을 피해서 옮겨 다니기보다는 순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경환은 순교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최경환은 수리산의 교우촌에 머물고 있던 가족을 포함한 자기 마을의 신자들에게 순교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날마다 이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39) 최경환은 이를 신자들의 거룩한 의무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최경환은 포졸들이 수리산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왔을 때 “어째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가문을 비롯하여 수리산 교우들이 함께 체포되어 서울의 감옥으로까지 50리의 거리를 행진하는 과정을 매우 감명 깊게 서술하고 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노소의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최경환이 앞장섰고 그 다음에는 일행이 따라갔는데, 포졸들이 맨 뒤에 따라갔다. 이 행진은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이들이 이러한 행진을 보면서 악담과 저주를 하거나,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을 쉴 때마다 선두에 선 최경환은 열렬하고 큰 목소리로 이런 요란스러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용솟음치는 용맹을 심어 주었다. 최경환은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말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우리들도 함께 걸어가자고 신자들에게 계속해서 격려하였던 것이다. 산골시절 이성례가 지향하였던 십자가의 길을 이제 최경환이 실제로 걸어가게 되었음을 알려준다.40)

 

이후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문초와 고문과 죽음을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다. 최경환과 네 아들, 이성례와 갓난 막내아들은 서로 분리되어 투옥되었는데, 그 다음날부터 문초와 고문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이 인식한 배교와 순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최경환의 순교과정을 자세히 언급한다. 이때 판관들이 최경환에게 배교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최경환은 40일 이상 참혹하고 지극히 혹독한 고문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차례 당하였으나 끝까지 요지부동한 항구심으로 견뎌내었다. 그래서 고문자들은 그에게‘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최경환은 마지막 고문을 받은 지 사흘 뒤 함께 잡힌 동료에게“나는 오늘 죽을 겁니다. 목이 아주 마르니 마실 것을 좀 찾아주시오”하고 예견하였다. 이에 그는 가져다 준 물을 마신 다음 1839년 9월 12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순교하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의 순교만이 아니라 당시 신자들이 고민하였던 배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최경환이 순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교를 선택하게 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또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최양업 신부가 열한 번째 편지에서 아버지 최경환의 최후를 목격한 새로운 증인을 통해서 파악한 사실이다.41) 다름 아니라 아버지 최경환의 배교자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최경환이 마지막 고문을 당하여 반죽음이 된 채 감옥으로 운반되어 왔는데, 그가 차츰 정신을 되찾자 자기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한 자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매우 슬퍼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최경환은 단순한 관심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죽기 전에 가져다 준 물을 마신 다음 다시 한 번 배교자들에 대하여 동정하는 말을 하면서 조용하고 평안하게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최경환이 순교와 배교라는 서로 엇갈린 길을 간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기도하면서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들 역시 한 형제였으며, 그들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천주교 신자는 그들을 박해하는 반대자들이나, 이들 배교자까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경환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천주교 신자의 올바른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포졸들이 최경환을 진짜 천주교 신자라고 불렀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언급이 잘 보여주듯이 최경환의 가족을 포함해서 수리산의 교우들이 모두 최경환이 선택한 순교의 길을 곧바로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어른에서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함께 투옥된 40명이 모두 고문을 받았는데, 모두가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문으로 초죽음이 되어 배교한다는 말을 중얼거린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때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와 동생처럼 자신의 가문에서 일어난 배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정면으로 드러내놓고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최양업 신부의 동생이 한 배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최경환의 둘째 아들인 열네 살의 야고보 역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아무 의식이 없을 때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는 어린 동생인 야고보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이성례전에서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배교하였던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에 줄곧 머물면서 어머니와 함께 갇혀있던 다른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례가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이는 야고보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는 야고보가 어머니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되고자 하였음을 전한다. 그러나 그는 이성례가 순교하는 현장까지는 함께 하지 못하였다. 이성례가 나머지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을 야고보에게 맡겼다. 무엇보다도 서로 형장에서 보게 되면 다시 야고보의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형장에 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야고보는 어머니 이성례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며 작별인사를 하였으며, 감옥의 사람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고 지켜줄 것을 부탁하고 감옥에서 나왔음을 알려준다. 최양업 신부가 동생 야고보의 삶과 신앙을 이와 같이 자세히 언급한 까닭은 그가 한때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살아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당시까지 논란이 되었던 어머니 이성례의 배교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주목하였다. 그는 어머니 이성례가 왜 배교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과정과 이유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전에서 먼저 이성례가 순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적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수리산에서 최경환을 비롯해서 다른 일행이 체포되어 감옥을 향해 먼저 떠났을 때 이성례는 어린 아이 때문에 잠시 지체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이성례가 도망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례는 그 아이를 안고 뒤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례 역시 감옥에서 최경환처럼 혹독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녀는 팔과 다리가 고문으로 으스러지고 곤봉에 찢겼으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최경환이 살아있는 동안에 줄곧 꿋꿋이 버티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이 극도의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순교하자 그녀는 흔들리기 시작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겨우 두 살 된 어린 막내아들이 굶주려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마음이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곤장이나 칼에도 용맹하였던 이성례는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져 마침내 배교하여 풀려나왔다고 언급된다. 이는 《기해일기》가 이성례가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하였다고 본 것과는 다른 점이다.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의 배교에 대해서 자식에 대한 그릇된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마음과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는 말을 한 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것 역시 그릇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이를 이성례가 배교를 극복하고 순교를 새롭게 준비하는 시기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이성례는 풀려나 있는 동안 그의 맏아들인 최양업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는 사실이 탄로 나서 다시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기해일기》의 최경환전에서는 최경환이 혹독한 문초를 받은 이유의 하나로 아들이 신부 근처에 가서 공부한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례전에서는 그녀가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일이 드러났기 때문에 풀려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전에서 자신의 유학 사실이 드러난 시기를 이성례가 배교하고 석방된 이후의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이 시기를 이성례에게 하느님의 자비로 그녀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받을 수 있는 은혜의 순간으로 파악하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다른 용감한 신자들이 다시 투옥된 이성례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할 것을 권고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이성례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배교를 취소하였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는 그녀가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또한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다고 서술한다. 이때 이성례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와 비참으로 눈앞에서 죽는 끔찍한 모습까지 목격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이성례는 최양업 신부와 함께 막내 아들까지를 하느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이를 통해서 최경환 가문에서 최경환에 이어 또 다른 한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최양업 신부는 이제 어머니 이성례가 아무런 걸림 없이 순교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서술한다. 이성례의 막내아들인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순교를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막내 동생의 순교와 어머니의 순교를 연결시켜 서술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최양업 신부의 막내 동생이 순교한 사실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기해일기》와는 달리 여덟 번째 편지와 열한 번째 편지에서 어머니 이성례의 처형과정을 십자가의 길과 연관시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산골 시절 그녀가 지향하였던 십자가의 길을 마침내 따른 것으로 보았다. 사형집행인들이 십자가 형틀을 만들었는데, 이성례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그 십자가 형틀에 동여매어져 소달구지에 실렸고,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갔다는 것이다.42) 이러한 이성례의 처형과정은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의 〈사형을 집행하는 모양〉에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연상시킨다.43) 사실 그것은 이성례의 처형과정을 이야기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최양업 신부는 어머니 이성례의 죽음을 서술하면서 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을 받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였다고 마무리한다. 그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이성례의 순교여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성례가 순교를 결심하다가, 흔들려 배교하고, 다시 그것을 극복하고 순교한 사실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양업 신부가 이성례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며, 이성례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성례가 기쁜 낯빛으로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양업 신부의 동생 야고보에게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가문에 속하는 사람들 역시 박해 때문에 한때 배교하였음을 주저없이 알려주고 있으며, 이들의 향배 또한 자세히 서술하였다. 즉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 신자가 한때 배교하였더라도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그것을 철회하고 형장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역시 순교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44) 이는 최양업 신부가 부모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후 자신이 고민해오던 배교와 순교의 문제를 새롭게 정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Ⅳ. 맺음말 - 프랑스 선교사들의 저술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가 새롭게 저술한 최경환과 이성례의 순교자전기가 이전에 만들어진 《기해일기》와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 실린 내용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것임을 검토해보았다. 이때 최양업 신부의 새로운 저술이 《기해일기》와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최양업 신부가 단순히 자기 가문의 순교사 혹은 순교자전를 서술하는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료의 수집 및 증언의 채록이나, 순교자전을 서술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을 통해서 이후의 순교자전에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당시 교회에서 가장 고민하던 배교의 문제까지를 정면으로 다루는 등 최양업 신부 자신의 현실적 관심과 동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초기 한국천주교회가 보여주었던 순교자들의 전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이제 최양업 신부에 의해서 보다 체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작업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를 마지막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최양업 신부의 서술과 다블뤼 주교 및 달레 신부의 저술을 비교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여러 곳에서 이존창을 순교자로 일관되게 규정하고, 매우 자세히 순교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45) 이는 최양업 신부의 이해와, 그에게 넘겨진 자료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블뤼 주교가 최경환의 신앙생활에서 강론이 중요한 한 특징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점도 최양업 신부의 서술과 공통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46)

 

그러나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실린 최경환전에서 최양업 신부의 서술을 거의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물론 그는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도 따르지 않았다. 다블뤼 주교는 서술의 주된 근거를 그 보다는 《기해일기》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최경환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내용은 최양업 신부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생략되고 있지만, 그 나머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새롭게 표현하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다블뤼 주교는 최양업 신부와는 달리 최경환의 신분을 양인으로 규정하는 등 이후의 연구에 논쟁을 일으키는 내용을 새롭게 첨부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의 이성례 부분에서도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참수된 사실만을 소개하였다. 또한 논란이 된 그녀의 배교문제에 대해서 다블뤼 주교는 “나는 그녀의 배교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녀를 뺐는데, ‘감옥에서는 증언을 번복했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그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보류해두려고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이성례의 순교를 사실로 본다고 말하면서도, 일단 이에 대해서 판단하기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최양업 신부가 보여준 이성례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와 이해를 전혀 따르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최근의 연구는 다블뤼 주교가 그와 같이 파악한 이유를 동료 신부의 어머니이기에 배교가 더 크게 생각되었는지도 모른다든지, 배교 후 회두 여부와 관계없이 감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크게 보았을 수도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47)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다블뤼 주교가 왜 그와 같이 판단하고 서술하였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는 이성례전을 마련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최양업 신부의 서술보다는 역시 《기해일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다듬은 정도에 그치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이성례전을 통해서 강조한 내용으로, 그녀가 1801년에 순교한 이존창의 집안이라는 사실이 추가되고 있는 정도이다. 이성례의 막내아들이 무죄한 어린이 순교자였음은 최양업 신부의 서술과 마찬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배교자들이 배교한 이후에도 즉시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지 못하였던 사실을 주목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다블뤼 주교는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48)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가 배교하여 감옥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투옥된 것으로 보았는데, 다블뤼 주교는 《기해일기》의 내용을 따라서 그녀가 석방되지 못했다고 본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그의 동생들과 얼마동안 함께 지낸 사실이 첨부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경환과 이성례에 대한 다블뤼 주교의 서술은 최양업 신부의 그것보다는 《기해일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다블뤼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정리된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49) 최경환에 대한 서술에서는 《기해일기》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실린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에 실린 최경환전의 일부 내용을 길게 인용하고 있는 점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서술이 이제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경환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달레 신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이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다고까지 언급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50) 이것은 최경환의 천주교 신앙을 한마디로 압축해주는 말인 것이다.

 

달레 신부는 최경환의 서울시절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설명과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가문을 도와준 사람들을 고관으로 세력이 있는 친지로 표현하였는데, 달레 신부는 여기에서 매우 부유하고 세력 있는 몇몇 친구들로 수정되고 있다. 이것이 다블뤼 주교가 양인신분으로 파악한 최경환 가문의 신분 이해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이 어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이성례에 대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서술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기해일기》를 바탕으로 한 다블뤼 주교의 서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레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주목한 막내 동생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역시 이렇게 뽑힌 아기는 옥중에서 배가 굶어 죽어 하늘나라로 날아가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인 성영해(예수의 탄생 이후 헤로데에 의해 학살된 무죄한 어린이들을 말함)의 숫자를 늘였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51)

 

조선에 돌아온 이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하고 새로이 순교자전을 만든 최양업 신부의 작업이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하여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앞으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순교사 연구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가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될 때 그 이유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52)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순교자 전기의 서술에 그토록 강조했던 증언록 채집 부분이 이후 시복이 추진되면서 이루어진 것은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하여 1883년 3월 18일부터 시작하여 102회에 걸쳐 42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53) 이것은 올바른 순교사의 정리를 위해서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최양업 신부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순교자들이 가경자로 선언된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 성인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최양업 신부의 기원은 1925년의 시복식을 거쳐, 1984년 시성식을 통하여 마침내 이루어졌다.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이 성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인 이성례는 최석우 몬시뇰에 의해서 문제가 제기된 이래54) 최근에 들어와서야 시복대상자로 선정되는 등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최양업 신부 역시 어머니와 함께 시복대상자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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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기진,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 역주〉, 《교회사연구》 12, 1997, pp.225~226.

2) 여진천, 〈백서의 원본연구〉, 《황사영 백서연구》, 2009, pp.89~129.

3) 김수태,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료 재조명〉,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2013.

4)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2000.

 

5) 〈기해일기〉의 작성과 관련하여 최영수와 현석문의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는 방상근, 〈『기해일기』에 대한 기초적 연구〉, 《한국사학사학보》 12, 2005를 참고할 것.

 

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1996, pp.216~341.

7) 방상근, 앞의 논문, p.105.

8)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자료 연구〉, 《교회사연구》 26, 2006, pp.102~104.

 

9) 기존의 연구로는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14, 1999, pp.50~51 및 양인성, 〈조선인 사제의 등장〉, 《한국천주교회사》 3, 2010, pp.170~173의 간단한 내용이 있을 뿐이다.

 

10) 이들 인물들에 대한 분석은 원재연, 〈최경환 성인 가문의 삶과 신앙〉, 《교회사학》 6, 2009, pp.175~186을 참고할 것.

 

11)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의 삶과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최경환과 이성례의 삶이나 신앙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받지를 못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최경환 가문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는 필자를 비롯해서 여러 연구자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김수태에 의해서〈최경환 성인의 천주 신앙과 순교〉, 《교회사학》 6, 2009와 〈최경환 가문의 천주교 수용〉,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2010이라는 두 편의 글이, 최경환 성인의 부인인 이성례에 대해서는 김정숙에 의해서 〈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 《교회사학》 6이, 원재연 앞의 논문에서 최경환 이후 후손들의 삶과 신앙이 다루어졌다.

 

12)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대한 번역은 정진석, 《너는 주추 놓고 나는 세우고》, 1995와 천주교 배티성지 양업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2009가 대표적이다. 이를 서로 비교하여 사용하겠지만, 후자의 자료를 중점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

 

13)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pp.30~31.

14) 위의 책, p.37.

15) 위의 책, p.71 및 p.78.

16) 위의 책, pp.101~102

1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p.89 및 p.101.

 

18) 최양업 신부는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실린 첫째 동생인 최희정의 부인인 이 마리아와 둘째 동생인 최선정의 증언도 직접 들었을 것이다.

 

19)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pp.128~131.

20)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pp.136~140.

21) 위의 책, pp.142~143.

22) 위의 책, p.155.

 

23) 열다섯 번째 편지에서 전국적인 잔혹한 박해가 없다든지, 열여섯 번째 편지와 열여덟 번째 편지에서 제주도의 선교 가능성을, 열아홉 번째 편지에서 경신박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24)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p.177.

25) 위의 책, p.28.

 

26) 최경환은 위의 책, pp,102~111에서, 이성례는 위의 책, pp.111~117에서 기록되고 있다. 이하의 서술에서 여덟 번째 편지를 인용할 경우 일일이 전거를 밝히지 않는다.

 

27) 《기해일기》는 하성래 감수, 성황석두루가서원, 1996에서 나온 것을 이용하였다. 이성례는 pp.131~133에, 최경환은 pp.157~158에 실려 있다.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청주교구 배티성지, 1997에서 펴낸 책을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최경환은 p.229에 나온다.

 

28) 청양 다락골에서 사목한 김용덕 신부의 교시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는 그가 고향을 언급한 적도 없고, 고향 가까운 지역에까지 사목방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29) 양반이냐 양인이냐, 혹은 양반신분의 자발적 포기 등의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김수태, 〈존재 이외의 조건을 버리는 참된 신앙을 바라면서〉, 《부산교회사보》 69, 2011).

 

30) 김정숙, 앞의 논문, pp.110~115. 그러나 전주 이씨라는 새로운 설명은 따르기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조카가 경주 이씨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31) 김수태, 앞의 논문, pp.90~91.

32) 최양업 신부의 열 번째 편지,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pp.122~123.

33) 김수태,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 pp.20~24를 참고할 것.

34) 위의 책, p.79.

35) 서울에서 처음 이주한 강원도의 산골지역을 김수태, 앞의 논문, pp.17~20문에서는 김성으로 읽었으나 금성으로 수정한다.

 

36)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교회재판 증언자료〉, 《교회사학》 6, p.205에 실린 유 바르바라 증언에서 《사말론》으로 언급되고 있다.

 

37)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 pp.129~130.

38) 김수태, 앞의 논문, p.36.

39) 최선혜, 〈기해박해〉, 《한국천주교회사》3, pp.69~70.

 

40) 최양업 신부는 열두 번 째 편지에서 친척인 최해성을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그가 고문을 받았을 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상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주목하였다”고 전한다. 최해성에 대해서는 여진천, 〈‘하느님의 종’ 최해성(요한)에 대한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를 참고하라.

 

41)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 pp.128~129.

42)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 p.129.

43)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pp.47~48.

 

44) 정진석이 번역한 최양업 신부의 열 다섯 번째 편지, 앞의 책, pp.154~155에서는 사천성 시노드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사천성 시노드에서는 배교자에 대한 사목이 중요한 주제였다(조현범, 〈1803년 사천성 시노드 연구〉, 《교회사연구》 24, 2005, p.26). 한편 당시에 있었던 배교자 사목에 대해서는 김수태, 앞의 논문, pp.35~37을 참고할 것.

 

45)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및 《조선 순교사 비망기》의 이존창전을 참고할 것.

46)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및 《조선 순교사 비망기》의 최경환전을 참고할 것.

47) 김정숙, 앞의 논문, p.140.

48) 다블뤼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는 이들이 단계적으로 석방되었다고 보고 있다.

49) 샤를르 달레, 앞의 책, p.430.

50) 샤를르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중, 1980, p.431.

51)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p.435.

 

52) 페레올 주교의 경우 최양업 신부와 페레올 주교 사이에 사목방침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신부의 관계는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교회사학》 5, 2008을 참고할 것.

 

53) 이 작업은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으로 정리되었다.

54) 최석우,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교회와 역사》 286, 1999.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212801&Page=1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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